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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Nov 07. 2021

높은 곳을 오르는 두 가지 방식

<나의 도시에 들어선 관광기계를 미워하며>


 코로나19로 잠시 멈췄지만, 일 년에 열흘씩 나는 제법 히피스러운 여행자였다. 직장인이 된 이후에는 쭉 그래왔다. 혼자 여행하는 시간은 곧 나를 살리는 시간이었다. 너저분한 365일 사이에 낀 담백한 빈틈이었고, 숨 쉴 구멍이었다. 마음을 한없이 낮추는 어느 이름 모를 골목의 변두리 같은 삶 앞에서 나는 무언가를 진심으로 우러러보는 시선을 복기했고, 낯익은 일상에서 흘린 잘못들을 낯선 길을 걸으며 부지런히 줍고 다녔다. 그렇게 틈틈이 여행하지 않았다면 체질상 직장을 제대로 다니지 못했을지 모른다. 삶의 모양은 지금보다 더 반듯하지 않았을 테다. 어쩌면 스무 달의 휴직을 한 뒤 춘천에 내려와 사는 지금도 아주 긴 여행을 떠나온 건지 모르겠다. 물론 이번엔 혼자가 아니지만.


 그렇게 일 년에 열흘씩 히피로 사는 생의 궤적을 10여 년째 반복하다 보니, 여행지에서 주워 먹은 내공들도 시나브로 쌓여갔다. 예컨대 관광명소가 없는 평범한 여행지에서도 비범하게 행복할 수 있는 나만의 공식 같은 게 생겼다. 어느 여행지이든 통용되는 행복의 공식인데, 그중 하나를 공개하자면, 동네의 가장 높은 언덕에 올라보는 것이다. 특히 딱히 갈 만한 곳이 없는 날에는 더욱 유용하다. 발 딛고 선 땅에서 한 바퀴 시선을 훑은 뒤 가장 높은 곳을 향해 발길이 닿는 데까지 올라본다. 대개 발바닥이 아플 때까지 걸어야 하지만, 꼭대기에 다다라 올라온 길을 돌아볼 때의 후련함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렇게 걸어 오른 호엔 잘츠부르크 성, 말라가의 히브랄파로 요새, 스리랑카 홍차밭의 립톤 시트, 모로코 메르주가와 몽골 초원의 이름 모를 언덕들, 그리고 후암동과 낙산공원의 낙엽빛 노을은 잊히려야 잊힐 수 없는 순간으로 각인되어 있다.


스리랑카 하푸탈레의 립톤시트와 태국 빠이의 협곡


 이렇게 높은 곳을 오르는 행복에 굳이 단계를 나누자면, 그 기준은 ‘얼마나’보다 ‘어떻게’로 가늠할 수 있겠다. 얼마나 높이 올랐는지보다, 키 낮은 언덕이라도 어떻게 올랐는지에 따라 만족의 정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치앙마이에서 가장 높은 산인 도이 인타논을 올랐을 때는 해발 2,565m 중 거의 2,500m를 투어 프로그램 차량을 타고 올랐다. 중간중간에 내려 폭포와 절벽을 구경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정상에서 본 광활한 경관의 감흥도 그날까지였다. 내겐 무엇도 남지 않았다. 다음날 떠난 산골마을 빠이에서는 정반대의 경험을 했다. 마을 어디에서나 보이는 산 중턱 불상을 향해 무턱대고 올랐는데, 길을 몇 번 잃은 뒤 겨우 다다른 불상 앞에서 큰 대자로 뻗어 몇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모른다. 그곳에서 뒤돌아 본 광경은 여전히 나의 낭만이자 자부심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니까 목표하는 곳이 어딘지 잘 몰라서 헤매고 더 힘들게 오를수록, 높은 곳에서 되찾은 행복은 반대급부로 커졌던 셈이다.


 왜 그렇게 느꼈는지 여행할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지금은 분명히 알겠다. 과정 자체가 여행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장대한 풍광을 보기 위해 오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나는 내가 애써 걸어 올라온 그 길을 뒤돌아보기 위해 오른 것이었다. 그 길에서 나는 생태계의 다양한 모양새를 들여다 보고, 높다란 언덕에서 나지막이 사는 이들의 삶의 애씀도 마주하고, 점점 지저분해지는 신발과 불안해지는 마음도 만났다. 그것들이 생략된다면 정상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그 어떤 것도 내 것일 수 없었다. 쉽게 오른 길은 감흥도 여운도 없이 쉽게 잊혔다. 과정의 결여는 곧 행복의 결여라는 진리를, 그냥 무조건 높이 올라가 본 여행길에서 스미듯 터득한 셈이다. 그 후로는 아무 과정 없이 결과의 열매만 쉽게 얻은 사람들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재벌 2세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도리어 그들은 내가 체득한 행복을 평생 모르고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주제넘게 측은해하기까지 했다.


 어디든 높이 올라가 보는 여행의 습관을 문득 소환한 이유는 조금 난데없다. 지난달 춘천 의암호 위를 가로지르는 삼악산 케이블카가 개장한 탓이다. 3.6km에 이르는 국내 최장 케이블카란다. 뉴스를 보니 평일에도 인파로 북적이고 주말이면 1시간은 대기해야 할 정도로 개장 특수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나는 전국 케이블카 과열 경쟁을 취재해 보도한 적이 있다. 어느 도시가 케이블카로 관광객을 끌어모은 이후 전국에 우후죽순 케이블카가 생겼다는 내용이었다. 춘천도 그 행렬에 뒤늦게 동참한 셈이다. 관광에 대한 지자체의 창의성 부재는 결국 경관만 해친 뒤 낡은 기계만 덜렁 남는 미래를 부추길 것이었다. 물론 소멸해가는 지방도시들 앞에서 자연경관 보호나 장기적인 안목 따위가 얼마나 배부른 구호인지도 잘 안다. 당장 옆 도시에 관광객 다 빼앗길지 모르는데 얼마나 급하겠는가. 그저 더 기다랗게, 더 아슬아슬하게, 더 높게 만들고 봐야겠지.


 그런 차원의 논쟁까지는 차치한다 하더라도, 나는 우리 동네에 새 명물로 자리 잡은 케이블카를 타보러 가지는 않을 것 같다. 광고에 따르면 케이블카를 타고 삼악산에 이르러 약 10분만 걸으면 정상이라고 한다. 삼악산은 해발 600m가 넘는다. 그저 기계에 올라 타 쉽게 정상에 닿아 풍경을 감상하는 코스에 내 돈 2만 몇 천 원씩을 들이긴 좀 아깝다.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명백히 마음이 채워지지 않을 여정일 것 같아서 말이다. 몸이 늙어 오르막길마다 다리가 후들거린다면 모를까, 아직까지는 차라리 삼악산 제일 밑에서 등산하는 데 입장료 3만 원을 내야 한다고 하면 고민 없이 그쪽을 택하겠다. 적어도 그 비용만큼 나는 과정의 행복을 선물 받을 테니까.


 사랑에 빠진 도시 춘천이 잘 되길 바란다. 관광객이든 여행자든 되도록 많이 찾았으면 좋겠다. 다만 여행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도시가 아니라, 여행의 과정 자체가 설레는 도시로 타지인의 마음에 스며들었으면 한다. 숨 막히는 관광지보다는 숨 쉴 수 있는 여행지로 말이다. 춘천은 ‘뭐 보러 갔어?’라고 물으면 딱히 대표적으로 대답할 건 없어도, 그저 걷는 골목골목과 들여다보는 구석구석이 아름다운 도시다. 평범한 여정이 특별한 낭만이 되는 그런 여행지는 흔치 않다. 이렇게 고유한 매력을 지닌 도시가, 굳이 다른 도시들이 어쩔 수 없이 건설한 관광기계들까지 덩달아 들여놓는 방식으로 조급하게 사람을 모으지는 않았으면 한다. 때마침 춘천시의 관광 슬로건이 ‘낭만도시’이다. 하늘 위에 케이블카가 떠다니고 대형 놀이시설을 앞다퉈 들이면서 낭만까지 바란다면 과욕이 아닐까. 적어도 내가 낯선 여행지에서 무명의 오르막을 부단히 걸어 오르며 느꼈던 낭만들은, 그런 ‘쉽고 빠른 관광’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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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뾰족한 글 좀 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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