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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Oct 24. 2021

꿈을 이룬 세 친구 이야기

<두 명의 뮤지션과 한 명의 호텔 주인>


 그러고 보니 2년 전 이맘때쯤이다. 스마트폰 속 ‘구글 포토’가 추억을 소환하는 사진 한 장을 이른 아침부터 내게 건넨 걸 보니.

 2019년 10월의 끝자락, 멀리 일본에서 친구가 왔다. 이름은 고 코무로. 일본의 소도시 가마쿠라에서 방 여섯 개짜리 로컬 숙소를 운영하고 있는 친구다. 사실 친구라고 하기엔 조금 어설픈 사이이긴 하다. 내가 그의 숙소에서 이틀간 머물면서 인터뷰를 청하고, 밤늦도록 대화를 나눈 게 우리 관계의 전부였으니까. 그러나 아직은 아닐지라도 시나브로 친구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도 같았다. 숙소를 떠나면서 ‘한국 오면 꼭 연락을 달라’던 나의 당부에 그는 일곱 달만에 응답했다. ‘오랜 친구들과 함께 모일 예정인데 합류해줬으면 한다’는 그의 정중한 이메일을 받고 얼마나 설레던지. 그렇게 지금 망원동의 한 숯불갈비집으로 나는 향하고 있다. 한 뼘씩 서로 스며들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시계를 더 돌려 일곱 달 전. 가마쿠라에 봄이 갓 열리던 무렵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아이아오이 호텔의 주인장이었고, 나는 숙박객이었다. ‘쪽빛 푸르름’이란 뜻의 아담한 숙소는 단지 거기 머무는 것만으로도 여행이 되었고, 영감이 되었다. 공간에 쏟은 주인장의 정성도 놀라웠지만, 자신의 취향과 철학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조합해내었다는 게 무엇보다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그는 지역성을 살리기 위해 음식을 포함해 대량생산한 어떤 제품도 쓰지 않고 숙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벽에 바른 모래 한 톨까지도 고향 앞바다에서 실어왔다. 제철에 맞는 소박한 음식만 내어주고, 일회용품은 휴지 한 장, 칫솔 한 가닥도 쓰지 않았다. 호텔 앱에서 예약할 수도 없고 심지어 사진도 못 찍게 하는 이 소도시 여관급 숙소에 사람들이 줄기차게 찾아드는 이유는 그 청명한 방향성 때문일 것이었다. 미리 인터뷰 요청을 드린 터라 늦은 밤까지 그와 이야기를 나눈 뒤, 나는 처음으로 이런 공간을 꾸린다는 의미에 대해 고찰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첫서재와 첫다락이 되어 지금 내 눈앞에 있다.


(호텔 아이아오이에 관해 쓴 브런치 글)


 이렇게 멋진 사람을 알게 되었으니 어떻게 놓치고 싶었겠는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엔 조심스러웠기에 그저 ‘한국 오면 연락을 달라’는 인사치레 같은 말에 웅크린 진심을 툭 묻혀두었다. 그런데 그가 정말 연락을 해줬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회사 일을 부랴부랴 마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인 망원우체국 인근 숯불갈비집으로 향했다. 마지막 횡단보도를 건너기 직전, 건너편 가게 유리벽 안으로 이미 붉게 달아오른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그 옆에는 몇몇 친구들이 함께 있었다. 얼른 길을 건넌 뒤 들어가 인사를 나눴다. 고 코무로 말고도 익숙한 얼굴이 두 명이나 더 보였다. 오늘 함께 만나기로 한 고 코무로의 ‘오랜 친구들’은, 사실 나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들은 나를 처음 만나겠지만.

 펑크록 밴드 ‘노브레인’의 보컬 이성우 님, 그리고 국내에서 스카밴드의 새길을 개척한 ‘킹스턴 루디스카’의 보컬이자 리더 최철욱 님. 오늘 함께 만나게 된 고 코무로의 오랜 친구들이다. 저 멀리 일본 소도시에서 고 상(고 코무로)에게 그들 셋의 인연을 듣게 된 것도 마냥 신기했는데 이렇게 한 자리에서 막상 마주하니 더 놀랍고 기막혔다. 더군다나 그들은 나의 학창 시절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뮤지션이었기에 개인적으로도 목덜미가 쭈뼛하고 생광스러운 자리였다. 신분을 속이고 홍대 펑크 클럽 <드럭>을 찾아가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의 라이브에 미친 듯이 뛰었던 고딩 시절의 나, 그리고 킹스턴 루디스카의 스카음악에서 거슬러 올라 밥 말리에 푹 빠지게 된 대학생 때의 나는, 지금부터 그들과 잠시나마 술잔을 기울일 것이었다. 어쩌면 고 상은 내게 이런 만남을 선물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가마쿠라에서 대화하다 내가 은연중에 밝힌 팬심을 잊지 않고 있었을 수도.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고 상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25년 전 처음 만났다. 막 스무 살 남짓이 된 고 상이 처음 서울 여행을 왔을 때였다. 당시만 해도 반항기 넘치는 청년이었던 고 상은 머리를 샛노랗게 탈색하고 다녔는데, 그 시절만 해도 한국에서 탈색이나 염색은 금기시되었기에 걸을 때마다 눈초리를 받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반가운 소동이 일어났다. 경복궁 인근을 걷다가 맞은편에서 자신과 똑같은 머리 스타일의 한국인을 발견한 것이다. 젊은 시절, 데뷔하기도 전인 노브레인의 이성우 님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머리를 가리키며 호탕하게 웃었고, 그날 밤 이성우 님의 공연장에서 술을 마시며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킹스턴 루디스카의 최철욱 님도 소개를 받아 같이 친해지기 시작했다. 셋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교류를 이어갔다. 고 상은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게 좋아 교환학생 명목으로 한국에 6개월간 머물기도 했다. 젊은 시절 타오르다 꺼질 것 같던 관계는 도리어 길고 가느다랗게 이어졌다. 서른이 넘어 고 상이 결혼할 때는 이성우 님이 가마쿠라로 날아가 축가를 불러주었다.

 오늘은 그런 그들이 몇 년 만에 다시 뭉친 자리였다. 그렇다 보니 덤으로 낀 내가 도착했을 무렵엔 이미 다들 너나 할 것 없이 취해 있었다. 함께 온 고 코무로의 일본인 친구들과 노브레인 팀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취할수록 옛날은 더 진하게 소환되었다. 가진 것 없이 샛노란 머리와 젊음만 있던 시절의 얘기들. 당시 이성우 님과 최철욱 님은 낮에 '막일'로 돈을 벌고, 밤에 공연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아마추어 뮤지션이었다고 한다. 고 상 역시 지금은 우아한 호텔 주인이자 지배인이 되었지만, 그 시절에는 아무 계획 없이 한국에 와서 하루 잘 곳을 구하러 다니던 무모한 청년이었단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서로의 언어와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서툰 영어를 쓰지 않고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하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어릴 적 얘기를 한참 듣다가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당시 서로가 그린 서로의 미래는 어땠을까. 지금 40대 아저씨가 되어 옛 시절을 회상하듯 그때도 20년 후 미래를 상상하는 꿈의 언어들이 술자리에서 오가지 않았을까.

“그때 혹시 서로 궁금해하지 않았나요? 나중에 다들 뭐가 되어 있을지.”


 가장 빠른 속도로 취해 내 어깨에 고개를 반쯤 기대고 있던 최철욱 님이 중얼거리듯 답했다.


 “그때 우리끼리 서로에게 물어본 적이 있어요. 뭐가 되고 싶냐고.”
 “뭐라고 하셨어요, 다들?”
 “음, 그러니까. 나랑 성우 형은 가수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어요. 고 코무로는 호텔을 차리는 게 꿈이라고 했고요. 아마 스무 살 막 지났을 무렵이었을 거야. 그렇지 고 상?” 


 고 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성우 님이 말을 이어받았다.


“그땐 막 서로 무시하고 웃고 그랬죠. 너가 무슨 가수냐. 너가 무슨 호텔 지배인이냐고. 그런데 신기하죠? 지금 진짜로 다들 말한 대로 살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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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자리는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헤어지기 전 우리는 숯불갈비집을 나와 ‘아루감’이라는 이국적인 펍에 들러 맥주 몇 잔을 더했다. 이성우 님의 단골집이었는데, 한국인 아내와 베트남계 미국인 남편이 함께 운영하는 작은 펍이었다. 뒤늦게 우리 자리에 합류한 남편 사장님께 ‘가게 이름이 멋지다’고 말했더니, ‘아내와 처음 만난 스리랑카 해변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일러주었다. 함께 보낸 옛날을 다른 공간에서 잇고 있는 사람들. 내 옆과 앞자리에. 온통 멋진 인생투성이인 밤이었다. 질투나도록.




 2년 전 술자리의 기억을 이렇게 소환한 건 처음에 말했듯이 ‘몇 년 전 오늘’ 사진을 임의로 꺼내어 보여주는 스마트폰 앱의 신기술 덕분이었다. 그렇게 꺼내어진 2년 전 당시만 해도 없던 기술인 것 같으니, 세상은 참 빠르게 진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빨리감기를 해놓은 듯한 세상의 속도감에 정신없이 휘둘려 살지만, 정작 내 삶을 증명해주는 순간들은 정지 버튼을 누른 듯 늘 멈춰 있는 것 같다. 바삐 흘려보낸 오늘 하루보다 2년 전 멈춰 있던 오늘이 나의 오늘을 더 오늘답게 해주었듯이 말이다. 그만큼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나의 현재에 닿아 있다. 그날 이후 ‘어릴 적 꿈을 이뤄가며 사는 삶’에 대한 동경이 내 가슴이 아닌 머릿속에 실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누군가와 그렇게 살아가고 싶었다. 그 후로 작가를 꿈꾸던 시절을 복원했고, 글을 쓸 서재를 차렸다. 그리고 나의 서재에 불특정한 누군가를 초대해 이야기를 쌓기 시작했다. 2년 전 오늘 이후 나는 이렇게 흘러 여기 이르렀다. 투명한 부러움이 삶을 부지런히도 움직였다.

 어서 코로나 시국이 끝나, 그들에게 나의 지금을 하루빨리 보여주고 싶다. 나 역시 그런대로 꿈을 이뤄가며 살아가고 있다고, 당신들의 우정 덕을 나도 좀 봤다고, 아이처럼 자랑하고만 싶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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