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를 내보일 용기
<남들이 쓴 손편지를 매일 읽어내리며>
초고를 누구에게 보여줘 본 적이 없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더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글이 정돈되고, 더 세밀하게 표현이 된다. 더 잘 쓴 글을 보여줄 수 있는데 굳이 처음 쓴 투박한 글을 선보여 평판을 깎아먹을 필요는 없었다. 화장을 즐겨하는 사람이 민낯을 드러내기 꺼려하는 심정과 같을까. 아무튼 갑자기 초고 얘기를 꺼낸 이유는, 이 글이 초고이기 때문이다. 저장 버튼을 누르면 다시는 고치지 않을 생각이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선보이는, 다듬어지지 않은 필력의 민낯인 셈이다. 그래서 여기까지 단 몇 줄 쓰는 것도 평소보다 몇 배는 신중하고 느렸다.
갑자기 쌩얼 공개도 아니고 초고를 내보이기로 결심한 이유는, 요즘 불특정 다수의 초고를 매일같이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가게 첫서재에서는 손편지를 쓰고 가는 손님께는 공간값을 받지 않는다. 물론 몇 가지 조건이 붙는다. 수신인이 분명하지만 부칠 수는 없는 편지여야 하고, 이름을 제외한 편지 내용이 공개되는 걸 동의해야 한다. 어쨌든 그래서 하루 평균 한 통씩은 손편지가 나무의 우체통에 쌓인다. 주로 나는 퇴근길에 발신인들이 남겨두고 간, 닿지 못할 진심을 읽어내리며 걷는다. 편지의 사연은 대개 절절하지만, 필력으로 따지면 탁월한 글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아마도 손편지는 초고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느 유명 작가의 글이라도 고치지 않고 처음 쓴 대로 접하면 감탄할 만한 작품이 거의 없지 않을까. 게다가 지금 이 글은 노트북으로 쓰고 있는 만큼 백스페이스나 마우스 클릭으로 쉽게 덧대거나 뺄 수라도 있지, 볼펜으로 종이에 쓰는 편지 초고는 중간중간 고쳐 쓰기도 어렵다. 그러니 미문이나 명문을 기대하긴 아무래도 힘들 수밖에.
그런데 매일 퇴근길마다 편지를 읽다 보니 초고만의 묘한 매력에 조금씩 빠져들게 된다. 그 어느 잘 다듬어진 글보다 더 흥미롭거나 각인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편집을 여러 번 거친 녹화방송보다 실수투성이 생방송이 더 정감이 가듯, 날것의 글이 선사하는 생생하고 투명한 기운에 마음을 불현듯 빼앗기게 된다. 초고는 대개 불필요한 수식이 적고 담백하다. 누가 썼든 그렇다. 나 역시 글을 다듬을 때마다 자꾸 뭘 덧붙이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비유를 동원하고 비슷한 뜻의 단어를 겹쳐 쓰거나, 아름답게 문장을 꾸미려 형용사와 부사를 덧댄 적이 많았다. 물론 더 여유를 두고 거듭 고치다 보면 결국 그런 수식어를 다시 다 들어내곤 했지만, 어쨌든 고치는 과정에서 문장이 한 번씩은 뚱뚱해지는 경험을 자주 겪었다. 그런데 내가 퇴근길에 읽는 손편지들은 대개 표현이 단순하다. 사연 자체가 워낙 절절해서 굳이 꾸밀 것도 없거나, 이름을 걸고 세상에 드러낼 글이 아니니 만큼 화려하게 장식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진심을 흘리고 가는 데에는 그다지 수식이 필요치 않을 테니까.
또 초고는 정돈되지 않은 글이지만, 그렇기에 쓴 사람의 의식의 흐름에 더 가까이 닿게 된다. 포장된 길보다는 샛길, 엉뚱한 길, 비포장도로로 비껴 걷고 싶은 여행처럼, 글도 가끔은 예상 밖을 벗어나 누군가의 자유로운 흐름을 따라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비록 잘생긴 글은 아닐지라도 도리어 그런 글에 마음을 빼앗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음이란 늘 투박하고 거칠고 어지러우니까, 글의 모양새나 흐름이 그런 마음을 닮아 있을 때 더 나답게 읽혔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완숙미 대신 서투름이 잔뜩 담기고, 어디로 흘러가 어디에 닿을지 종잡을 수 없는 글만의 자유로운 힘이 손편지에는 담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초고에는 용기가 담겨 있다. 남에게 자신의 민낯을 보여주는 용기 말이다. 부치지 못하는 손편지를 남기고 간 이들의 글 역시 고치고 다듬을수록 예뻐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제약을 그들은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서툰 생산물을 기꺼이 넘겼다. 내가 초고를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던 까닭은, 꾸밈없는 나를 보여주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었을 게다. 포장되고 정돈된 모습만 보여온 나의 글은 그래서 의식의 흐름을 따라 경로를 이탈한 적도 드물고, 대개 예측 가능했다. 그게 장점이어서 늘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쉽게 읽힌 것 같지만, 반면 예상치 못한 흐름과 서툰 문장과 진심 같은 것들로 타인의 정서에 훅 들어가 박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퇴근길마다 누군가의 용기를 눈에 담으며, 나는 투명하고 거친 살결을 타인에게 내보인 적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되묻곤 한다.
이 글은 그 자문에 대한 소심한 대답이다. 초고에 관한 짧은 단상을 주제로, 난생처음 불특정 다수에게 읽히는 나의 초고를 내어본다. 그렇다고 이 글이 의식의 흐름을 따랐다거나, 한 번도 고쳐지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고칠 수 없다는 불안감에 머릿속으로 미리 개요도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정교하게 짜 놓았고, 저장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지금도 계속 처음부터 훑어내리며 백스페이스를 눌러대고 있다. 나는 그냥 그런 사람인 것이다. 물론 며칠이고 십수 번씩 글을 다듬어 세상에 내놓던 보편의 나에 비하면 이 정도라도 큰 용기이겠지만, 아직 완벽한 민낯을 보이기까지는 부끄럽기만 하다. 언젠가는 생각나지는 대로, 손가락이 닿아지는 대로, 그냥 써지는 대로 쓴 뒤 툭, 하고 글 하나 세상에 내보이고 싶다. 뭘 덧입지 않은 나는 이 정도야, 어쩌겠어,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첫서재에 손편지를 남기고 떠난, 다듬고 꾸민 모습이 도리어 더 궁금해지는 그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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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 초고를 누군가에게 보여줘 본 적이, 굳이 따지자니 있었다. 그 옛날 연애편지는 늘 손편지로 썼으니까. 그러고 보니 남의 손편지를 매일 읽으면서 내 손편지는 아주 오래 쓰지 않아 왔던 것 같네.
p.s 2 : 여기까지 쓰고 저장 버튼 누르는데 또 사십 분이 흘렀다. 많이도 고쳤네. 이제 정말 누르고 끝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