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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Sep 05. 2021

나는 젊은이일까?

<'젊음의 기준’이 될만한 두 가지 키워드>


 나의 가게 ‘첫서재’가 있는 춘천 약사리 마을에는 대략 구십여 가구가 산다. 가게로 출퇴근하다 보면 동네 주민을 자주 마주치게 되는데, 여태껏 수십 명의 주민과 인사를 나누면서 나보다 어린 사람은 고작 두 명밖에 보지 못했다. 첫서재로 들어서는 골목길 끝자락에 사는 일곱 살 현표와 그의 고등학생 누나, 단 둘 뿐이다. 다시 말해 성인 중에는 마흔 살인 내가 동네에서 가장 어릴지도 모르는 셈이다. 그래서 동네 주민들이 나를 일컫는 말은 통칭 ‘젊은 사람’이다. “그 있잖아. 가게 하는 젊은 사람”, “젊은 사람 왔네 그려”라는 소릴 들으면 백이면 백 내 얘기다.

 약사리에서는 이토록 젊은이 대접을 후하게 받고 있지만, 좁은 동네만 살짝 벗어나면 현실감이 정반대로 와닿는다. 고개 넘어 삼사 분만 걸어가도 ‘진짜 젊은이’들이 들끓는 육림고개 청년몰과 명동이 나오는 까닭이다. 스파 브랜드 매장, 영화관, 프랜차이즈 음식점부터 개성 있는 청년가게까지 밀집되어 있는 춘천 최대 상업지역이다. 춘천은 인구에 비해 대학교가 많아 여느 지방 도시에 비해 활동 인구가 젊은 편이다. 그래서 가끔 고갯길 넘어 혼밥을 하러 갈 때면 주눅이 들기도 한다. ‘힙’하다는 맛집이나 카페에 들르면 괜히 나 때문에 물이 흐려지진 않나 눈치 보이고, 거리만 활보해도 내가 이 길의 평균 연령을 높이고 있다는 생각이 확 든다.

 고개 하나 두고 젊은이에서 늙은이를 오가는 일상을 보내다 보니, ‘나는 젊은이인가?’라는 물음 앞에 가끔 멈춰 서곤 한다. 통상의 세대 구분에 따르면 1982년생인 나는 MZ세대의 맨 앞줄이다. MZ세대가 젊은 세대를 총칭하는 말로 쓰이는 걸 감안하면 여전히 사회에서는 젊게 분류되는 셈이다. 나보다 어린 세대의 노래를 즐겨 듣고, 그들이 생산해낸 콘텐츠에 크게 이질감도 느끼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장래희망’이란 단어를 입밖에 꺼내는 것조차 철없어 보이고, 동년배 친구들끼리 모여도 미래보다 과거 얘기를 더 많이 하게 되는 걸 보면 더 이상 ‘젊다’는 희망찬 수식어에 어울리지 않는 것도 같다.

 물론 정해진 나이와 세대론만으로 젊음과 늙음의 구분선을 그을 수는 없을 터이다. 주변을 보면 나보다 나이는 많은데 더 젊게 사는 분들도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더러 있으니까. 5년 전 브라질 리우 올림픽 출장을 갔을 때의 일이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밤, 한 선배 기자와 함께 ‘리우의 홍대’쯤 되는 라파 거리의 한 클럽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가게 문밖으로 음악이 쿵쾅쿵쾅 새어 나오고 거리의 청년들은 거기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몸치인 나는 멀찍이서 말똥히 눈을 뜨고 구경하기 바빴는데, 함께 길을 걷던 선배는 멈춰서 같이 스텝을 밟으며 몸을 들썩이더라. 나보다 열 살은 더 많은 선배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보다 더 젊은이다웠다. 음악과 거리와 인파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을 나는 관망했고, 그는 흡수했으니까. 생각해 보면 그 선배가 나와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는 것 또한 다 그의 감수성과 사고방식이 노화하지 않고 열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그런 사람들은 대개 얼굴도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인다.

 그 선배뿐 아니라, 유독 나이보다 젊다고 느끼는 손윗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저 ‘나잇값 못하고 철없다’는 느낌은 결코 아니다. 동안이 아니어도, 패셔니스타가 아니어도 뭔가 감각적으로 젊은 에너지가 움찔움찔 새어 나오는 사람들. 유의미한 통계는 아니겠지만 그들을 곰곰이 떠올려 보면 크게 두 가지 공통분모가 감지된다. 우선 그들은 갈망하는 삶을 살고 있다. 무언가를 쉴 새 없이 추구한다. 그래서 궁금한 게 많고, 듣거나 배우려 들고, 자신이 이제껏 이룬 걸 늘어놓기보다 못 이룬 걸 채우려는 욕구에 더 허기져 있다. 그런 사람과 말을 나누다 보면, 과거나 현재보다는 앞날에 관한 상상과 고민이 주로 대화의 소재가 된다. 미래지향적으로 삶이 움직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터이다. 젊음은 필연적으로 잠재력과 등치 관계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고, 해낸 것보다 해낼 게 더 많은 사람에게만 헌사할 수 있는 단어인 셈이다. 물리적인 나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나이를 떠나 젊게 산다는 건 여전히 그 사람에게 잠재력이 감지된다는 말과도 같겠다. 그들이 젊게 보이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 사람은 여전히 해낼 게 많다'는 기운이 타인의 시선에 스며들기 때문이 아닐까.

 또 하나의 공통분모를 꼽자면, 그들은 대화가 통한다. 갈망하는 삶을 살지라도 자기만의 꿈을 향해 직진하느라 주변을 돌보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란 얘기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아무리 내가 손아래 세대일지라도 대화가 자연스럽고 끊어지지 않는다. 의사소통이 일방적이라는 기분도 들지 않는다. 공통의 취향이나 가치관이나 취미가 있기에 가능한 상황일 것이다. '어떻게 저 사람이 우리 세대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지?'라는 생각에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문득문득 감탄하곤 한다. 예컨대 즐겨 듣는 음악이 비슷하다거나, 이전 세대에는 흔치 않았던 독립영화, 독립서적에 관해 잘 알고 있다거나 하는 식이다.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시점도 마찬가지다. 비교적 최근 이슈인 여성주의, 소수자 문제, 비정규직 문제 등에 대해 관점은 다를지라도 시점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아마도 생각이 굳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덜 여물었기에 변화무쌍한 사고야말로 젊음의 도드라진 특성이자 특권일 테니까.

 이렇게 '갈망'과 '대화'가 그들의 정신 노화를 방지하는 두 개의 알약이라면, 과연 나는 처방대로 약을 삼키며 살고 있을까? 나 스스로 증상을 평할 수는 없겠지만, 다행히 요즘 들어서는 노화 속도가 조금씩 완화되고 있는 것도 같다. 우선 몹시 갈망하던 삶을 지난해부터 하나씩 이뤄내는 과정에 있다. 10년 넘게 다닌 직장을 잠시 쉬기로 결심한 뒤 60년 묵은 폐가를 고쳐 공유서재로 만들었다. 이곳에서 이것저것 새로 작당할 것들을 궁리하며 지내다 보니 머릿속에 신선한 공기가 드나드는 기분이다. 그리고 나의 공유서재에 찾아주는 사람들 덕에 대화의 폭도 부쩍 늘었다. 2002년생 스무 살부터 40대에 이르는 북스테이 손님들과 일주일에 한 차례씩 차를 마시며 인터뷰를 나누고, 상담 쪽지와 손편지 프로젝트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고민을 기웃거린다. 나와 도무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다 보면 그들에 대한 무관심이 관심이 되고, 아른거리거나 분석하게 되고, 한 겹씩 이해하게 된다. 물론 궁극의 이해까지 닿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그럴 필요성이 내 안에 스며들고 있음을 체감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오랜만에 옛 친구나 회사 동료가 춘천에 찾아오면 ‘너 젊어졌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인사치레겠지만 다행스럽기도 하다. 남들이 돈 버는 사이 돈 쓰면서 자아실현하고 있는데, 적어도 노화의 속도는 줄어야 하지 않겠는가.




 젊음은 돈과 달리 모으거나 불릴 방도가 없기에 아낌없이 막 써야 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결코 소유할 수 없기에 미련 두지 말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유할 수 없는 걸 소유하려 할수록 더 불행해지기만 할 테니까. 게다가 ‘젊은 사람은 결코 젊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명제까지 감안하면, 내가 젊니 마니 이렇게 글을 쓰는 것조차 수줍은 노화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물론 서서히 늙어가는 섭리를 두려워하거나 돌이키고 싶은 욕망은 추호도 없다. 다만 나이를 핑계로 갈망하는 삶까지 노화시키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다.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 이해 못하겠다'는 말을 나이가 훈장인양 쉽게 꺼내고 싶지도 않다. 새로운 세대가 끊임없이 탄생할수록 끊임없이 알아가고 싶다. 손윗사람과의 대화에서는 말을 더 많이 뱉더라도, 나보다 어린 사람과 얘기할 때는 말을 더 삼키고 더 많이 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직은 아는 것보다 배울 게 많다고, 지켜나갈 것보다 바꿔나갈 게 더 많다고, 해낸 것보다 해낼 게 더 많다고 나를 긁어대고 싶다. 그 가려움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잃고 싶지 않다. 그것까지 노욕이라면, 그 정도 노욕은 부리며 살겠다는 마음이다.

 스무 살의 시선에도, 예순 살의 시선에도, 아직은 내가 '꽤 젊은이'로 보였으면 좋겠다. 흰머리가 나고 머리숱이 줄어가고 몸은 예전 같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래 보였으면 좋겠다.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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