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떠나 춘천에서 2년간 살기로 한 뒤에도, 서울에서 찾아온 친구들과 조우할 때가 많다. 그들이 가장 많이 묻는 말 중에 하나는 '서울 안 그립냐?'는 것이다. 나의 대답은 늘 단순했다.
'하나도. 아직까지는.'
명료한 마음을 드러내려 더 수식하지 않았지만, 다소 과장된 표현이긴 하다. 완전한 진심을 말하자면 '거의 그렇지만, 이따금 떠오를 때가 있긴 해' 정도일 것이다. 언제 떠오르냐고? 참 단순하게도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없을 때 그렇다. 달리 말하면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다.
춘천에 내려온 지 반년. 그 사이 서울은 서너 차례밖에 다녀오지 않았지만, 갈 때마다 꼭 들르려 애쓴 가게들이 있다. 다른 음식들은 어느 정도 대체 가능한 맛집을 춘천에서 찾았지만, 이제 소개할 다섯 곳의 가게는 아직 어떤 곳으로도 대체되지 못한 탓이다. 비단 음식 맛뿐 아니라 그 가게만의 고유한 정서까지 음미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하기 때문이겠지.
각설하고 하나씩 소개해보려 한다. 순서는 순위가 아니다.
[가타쯔무리]
일일삼면(一日三麵)을 즐기는 내게, '인생 면집'이 몇 군데쯤 있는 건 당연하다. 그중 한 곳이 작은 우동집 <가타쯔무리>다. 대학가 후문의 조용한 골목에 있는 가게인데, 찾아가 보면 음식점 이름보다 낡을 대로 낡은 '대우전자 영업소' 간판이 더 크게 걸려 있다. 언제 적 대우전자인가. 음식점이 되기 이전 간판을 그대로 걸어 둔 데서 이미 주인장의 방향성이 단명하게 드러나 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더 그렇다. 테이블은 단 네 개뿐이고, 3명 이상 먹을 수 있는 테이블은 고작 하나뿐이다. 음식을 주문하면 그때부터 주인장 부부가 면을 삶기 시작하는데, 우동 한 그릇이 나오기까지는 꼬박 20여 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가게의 온기에 기분을 데우다 보면 그 시간이 전혀 지겹지 않다. 오래된 선풍기와 옛날 나무테이블, 빈티지한 소품에 차가운 루이보스차 한 잔, 창밖에는 담쟁이넝쿨. 비좁은 공간이지만 20분의 허기를 채우기엔 눈으로 씹을 것들이 차고 넘친다. 심지어 매번 가도 그렇다.
이곳에서 나는 주로 가케우동과 유자우동을 주문한다. 멸치육수를 우려낸 맑은 국물의 가케우동은 간을 거의 하지 않아 시원하고 뒷맛이 남지 않는다. 삼삼한 맛을 좋아하는 내겐 최적의 육수다. 국물의 뜨겁기도 정할 수 있는데, 나는 주로 뜨거운 육수와 찬 육수를 반반 섞은 미지근한 상태로 먹는다. 유자우동은 국물 없이 면발에 유자즙만 뿌려 먹는 방식이다. 오로지 면의 식감과 유자의 향긋함으로 한 끼를 채우는 셈이다. 정갈하게 말아 올린 면을 조금씩 풀어 꼭꼭 씹을 때면 그 탱글하고 쫀득한 감촉에 혀를 말아 올리게 된다.
면에 즙을 뿌려 먹는 유자우동(왼쪽)과 맑은 국물의 가케우동
굳이 가게의 흠결을 찾자면, 처음 갔던 2014년에 비해 지금은 너무도 유명해졌다. 어느새 오전 11시에 문 열자마자 줄을 서야 겨우 먹을 수 있는 전국구 맛집이 되어버렸다. 어차피 하루에 정해진 양만 음식을 내어준 뒤 이른 오후에 문을 닫는 가게라, 이런 인기가 주인장 입장에서도 마냥 반갑기만 하진 않으실 것 같다. 예전에 회사 동료가 방송 출연도 제안했지만 '그저 동네 사람들이 찾는 소박한 가게로 남고 싶다'며 한사코 거절하신 사장님이라는 걸 알기에 더 그렇다. 그래도 한 시간씩 줄을 서서 부산스럽게 먹더라도, 나올 때는 '한 끼 잘 대접받았다'는 느낌이 꼭 드는 포근한 집이다. 음식과 사람을 대하는 정성이 말이 아닌 것들로 감지되기 때문일 것이다. 도쿄와 가마쿠라에서 미쉘린 가이드에 몇 년째 오른다는 우동가게들도 가봤지만, 결코 그에 비해 맛이 덜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 우동은 '가락국수'가 더 나은 표현이지만 가게 메뉴 이름대로, 글맛대로 표현했습니다.)
[원당국수잘하는집]
면식기행(麵食紀行), 그 두 번째로 꼽을 만한 동네 국숫집이다. 합정동 끝자락과 망원동 초입 사이에 있는 이 가게는 서울 살 적 우리 집과 회사 가운데 있어서 비교적 더 자주 들르기도 했다. 내가 가장 자주 주문한 메뉴는 '메비곱'이다. 메밀 비빔국수를 곱빼기로 시키면 차림사 님이 주방에 크게 '메비곱 하나!'를 외치는데 그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입에 군침이 돈다. 보통 비빔국수가 각종 채소와 버무려 나오는데 비해 이곳의 비빔국수는 국수와 비빔양념, 오이, 무생채로만 구성되어 있다. 나는 오이를 싫어하는 만큼 구성이 한결 더 단출해진다(사장님, 오이 빼주세요!). 다른 비빔국수가 맵고 청량하고 가벼운 맛인 데 비해 이곳의 양념은 꽤나 무겁고 되직하다. 이 되직함을 한입 베어 물면 신기하게도 향긋한 기운이 입 안에 퍼진다. 이런 신비한 비빔국수보다 더 인기 있는 메뉴는 잔치국수다. 4,500원에 이 정도 감칠맛 나는 국물을 배불리 먹는 기쁨이라니. 값싸고 흔한 메뉴지만 아직 내 입맛에는 이와 비견할 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
되직할 것이냐, 감칠날 것이냐
이 국숫집에 처음 들른 건 2013년 겨울이었다. 그 당시 엄마 뱃속에 있던 아들내미는 이듬해 태어나 이제 여덟 살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매년 아이가 한 살씩 자랄 때마다 이 가게에서 국수를 먹으며 한 장씩 사진을 찍어두고 있다. 아이의 성장기가 고스란히 담긴 음식점을 하나쯤 남기고 싶은 마음에 소소하게 시작한 기록인데, 벌써 여덟 장의 사진이 쌓인 셈이다. 앞으로도 아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매년 찍을 생각이다. 가족의 세월을 담을 식당으로 이곳을 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20년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 같아서.
[아오이토리]
대학 입학 이후 지난겨울까지 20년 가까이 신촌과 홍대 주변에서 살았다는 건 큰 축복이었다. 문화적 혜택도 편하게 누릴 수 있었고, 무엇보다 지척에 맛집이 널려 있었으니 말이다. 그중 우리 집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던 빵집 <아오이토리>는 지난 수년간 우리 식구의 주말 브런치를 책임져주었다. 요리에 취미도 재능도 없는 식구인 데다 주중에는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었기에, 주말 오전 11시면 느지막이 일어나 옷을 대충 걸쳐 입고 나가 늘 같은 빵집으로 향했다. 세 식구의 배곯은 걸음부터, 빵집에 옹기종기 앉아 제각기 좋아하는 빵을 오물거리고, 나와서 경의선 숲길을 한 바퀴 나른하게 산책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한 시간 반 남짓. 어김없이 반복되던 이 아침은 주말이 왔다고 지저귀는 평온한 알람이자, 일주일을 정리하는 완벽한 쉼의 패턴이었다.
내가 가장 즐겨 먹던 메뉴는 두 가지다. 먼저 야키소바빵. 양념과 면을 버무린 야키소바를 길쭉한 샐러드용 빵 안에 듬뿍 담아 넣었다. 마요네즈 맛이 입에조금 물릴 때쯤이면 잘게 썬 초생강이 아삭, 하고 씹히면서 새로운 자극을 입 안에 불어넣는다. '빵 안에 면'이라는 환장할 탄수화물 조합으로 허기진 아침을 채우기에도 그만이다. 춘천은커녕 서울 다른 곳에서도 아직 이런 형태의 야키소바빵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새우카츠버거. 작은 햄버거용 빵 안에 살짝 튀긴 다진새우를 욱여넣고, 달걀을 버무린 샐러드를 얹었다. 꽤나 거친 빵의 식감에 갓 튀긴 몰랑몰랑한 다진새우가 어찌나 조화로운지, 야키소바빵을 다 먹어 배부른 뒤에도 늘 몇 입 안에 순삭해버리곤 했다.
초생강이 정확히 한가운데 들어간 야키소바빵, 그리고 조합만으로도 사기인 새우카츠버거.
물론 춘천에도 유명한 빵집들이 있다. 그러나 아오이토리 만의 독특한 맛, 그리고 일본 소도시에 여행 와 있는 듯한 가게 분위기는 이곳에서 내가 되찾을 수 없는 고유함일 터이다. 특히 첫서재를 개업하고부터는 주말에도 늘 가게 문을 열어야 하기에 더 간절하게 생각이 난다. 주말 오후 한창 바쁜 시기가 지나면 카운터에 앉아 나무 천장을 올려다보며 잠시 쉬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아오이토리와 함께 했던 홍대의 주말 아침을 떠올린다. 나무천장마저 빵의 색깔을 닮아서 그 달콤했던 쉼의 맛이 더 간절해진다.
[탐스피자]
역시 신촌-홍대살이의 가장 큰 혜택이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피자에 환장하지?'라고 의아해했던 내게 '피자 맛은 이런 거니까'라고 알려준 동네가게다. 맛을 정교하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재료들이 버무려지지 않고 저마다의 맛을 내는 것 같아서 좋고, 도우가 얇게 잘 구워져 물리지 않는 것도 좋다. 나는 주로 '소시지 & 페퍼'와 ‘탐스콤보’ 피자를 반반으로 주문했다. ‘소시지 & 페퍼’는 가게 주인장이 직접 다진 고기의 짭짤하고 알싸한 향이 입맛에 꼭 맞았고, ‘탐스콤보’는 조각마다 한 덩어리씩 들어간 크림치즈가 별미였다. 거기에 '핫소스광'으로 유명한 사장님이 진귀한 핫소스들을 가게에 잔뜩 들여놔서 다양한 소스 맛을 음미해가며 먹을 수도 있다. 수제 에일 맥주까지 탭으로 따라 마실 수 있고, 냉장고에는 내가 좋아하는 '홉스플래시' 캔맥주가 늘 준비되어 있다. 도대체 가지 않을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사랑스러운 골목가게다.
번화가의 한적한 이면도로에 숨은 가게.
미국인 남편이 요리를 맡고 한국인 아내와 외국인 알바생이 서빙을 맡은 이 피자집은 2018년 무렵부터 나와 인연을 맺었다. 홍대입구역과 가깝지만 이면도로에 숨어 있는 조용한 다세대주택가에 있는데, 이 가게가 들어선 뒤 골목에 하나둘 작고 개성 있는 가게들이 늘었다고 한다. 골목의 기운과 역사를 바꾼 가게인 셈이다. 주로 외국인 손님이 더 많아서 그런지, 가게에 머물면 마치 미국 어느 골목 피자집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1년 전 유명 유튜브 채널에 소개된 덕에 지금은 주말마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가게가 되었지만, 여전히 사장님은 넉넉한 미소와 여유로운 도우질(?)로 단골들을 맞이한다. 춘천에 와서도 주말 저녁이면 탐스피자의 다진고기맛과 핫소스, 그리고 에일 생맥주 한 잔이 문득문득 그리워지곤 한다. 물론 맛도 맛이지만, 사장님 부부와 인사하며 더듬더듬 서툰 영어로 이야기 나누던 정겨운 시간이 더 그리워서일 것이다.
[서울집시]
아마 우리나라 최고의 사워에일 펍이 아닐까, 싶은 가게다. '동네가게'라고 하기에는 시내 한복판에 있지만 그래도 규모가 작고 한적한 골목에 자리하고 있기에 이 글에 꼭 보태어 넣고 싶다. 아담한 한옥을 개조한 공간도, 창밖으로 바라보는 성곽도 운치 있고 골목가게로서의 정체성을 체감하게 해준다. 무엇보다 내게 서울을 그리워하는 몇 안 되는 이유가 되어주었으니까.
대략 이런 풍경.
뱃살로 두둑이 검증된 맥주애호가인 나는 맥주 취향이 뚜렷한 편이었다. 라거보다는 에일, 그중에서도 홉향이 거칠게 나는 스타일의 IPA 맥주를 즐겨 마셨다. 10년 가까이 변하지 않던 나의 맥주 취향이 지난해부터 비로소 급변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 가게 때문이다. <서울집시>는 계절마다 다른 맥주 라인업을 선보인다. 그중에서도 직접 생산하는 사워에일 류의 맥주가 수작이다. 이제껏 신맛이 강하게 나는 맥주를 그다지 즐겨 마신 적 없었지만 다 이 가게를 못 만났던 탓이었다. 맥주선진국(?)으로 해외여행을 다녔을 적에도 산미 있는 맥주 중에는 이 정도 맛을 내는 가게를 찾지 못했기에, 만약 외국에서 맥주를 좋아하는 친구가 온다면 가장 먼저 데려가고 싶은 펍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도 고품질 사워에일이 있다는 걸 자랑하고 싶기도 하고, 한옥에서 성곽을 바라보며 마시는 기분도 덤으로 안겨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춘천에도 훌륭한 양조장과 수제맥주 펍들이 있다. ‘스퀴즈 브루어리’와 ‘감자 아일랜드’에서 양조하는 맥주들을 주말마다 테이크-아웃으로 즐기는데, 이런 맛있는 로컬 맥주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다만 <서울집시>가 그리운 이유는 오로지 그 시큼한 맛과 홉향의 조화 때문이다. 비슷한 맛을 찾으러 춘천 시내를 샅샅이 뒤졌지만 아직은 찾지 못했다.
복분자IPA.
갑자기 이 글이 쓰고 싶어진 이유는, 이번 달 말 잠시 서울에 다녀올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드물게 다녀오는 도시가 된 만큼 나는 저 단골가게들 중 한두 곳은 꼭 들를 심산이다. 38년간 살아온 서울은 내게 그리 매력적인 도시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떠올리면 간절히 가고픈 곳들이 몇몇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미우나 고우나 고향이고, 살던 흔적이 묻어 있는 동네이고, 돌아가야 할 터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