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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Mar 06. 2022

카누예찬

<직진하지 못하는 배>


 말하자면 나는 취미 부자다.


 독서, 글쓰기, 영화감상, 축구, 농구 등 남들의 단골 취미는 전부 내 취미이기도 하다. 도보여행과 기타 연주도 곧잘 즐겨왔다. 칵테일을 조주하고 좋은 술을 마시는 것도 취미의 영역일 게다. 하지만 그렇다고 특출나게 하는 건 없다. 일 년에 책을 수십 권씩 읽어치우는 다독가도 아니고, 그다지 내세울 만한 영화광도 아니다. 축구와 농구도 팀에서 에이스 대우받을 실력은 못 된다. 베이스 기타 역시 밴드 합주에 민폐 끼치지 않을 정도만 연습하는 수준이고, 칵테일 조주도 손재주가 부족해 늘 한 뼘 아쉽다. 못 하는 건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잘하는 것도 없는, 그저 ‘좋아하는 게 많은 어른’인 셈이다.


 그렇게 많은 나의 취미 중에 굳이 단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뱃놀이다. 서른 살 무렵 안나푸르나 설산이 감싸 안은 네팔의 작은 마을 포카라에서 며칠간 머물면서 처음 갖게 된 취미다. 아늑한 페와(Fewa) 호수의 품에 안겨 노를 젓거나 둥둥 떠 있다 보니, 기자 초년생의 마음을 차갑게 얼렸던 경쟁심과 압박감이 마법처럼 녹아내렸다. 그 후로는 여행지를 선택할 때마다 ‘배를 탈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그렇게 지난 10여 년간 코타키나발루의 남중국해, 방비앵의 남쏭강, 하롱베이, 바이칼 호수, 그리고 몽골의 홉스굴 호수 등지에서 노를 저었다. 내가 탄 배들은 하나같이 어른 두 명이 넘게 탈 수 없을 만큼 작았고 손으로 물살을 만질 수 있을 만큼 키가 낮았다. 이를테면 카약과 카누 같은, 몸에 착 달라붙는 배들 말이다. 그보다 큰 배에서는 페와 호수에서 만끽했던 행복한 고립감과 맑게 씻기는 기분에 취하지 못했다.

 

네팔 포카라의 페와(fewa) 호수 (2011년 봄)

  작고 비좁은 배에 올라타면 나는 일단 뭍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최대한 멀리 노를 저어 간다. 떠나온 나루터가 가물가물할 즈음에야 비로소 귀가 맑아지기 때문이다. 소음이라곤 노를 저을 때 일정하게 들려오는 물살 소리뿐인 세상과의 신비한 접선이다. 어느덧 드넓은 호수나 먼바다의 한 점이 되는 순간에 이르면, 노를 내려놓고 멍하니 앉아 있거나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세상에 나만 남는 시간, 인위적인 모든 것들이 완벽히 제거되는 찰나의 시작이다. 거기서 닿지 않는 어떤 것들과 교감하고, 오염된 마음을 정화하는 기분에 취해 있으면 어느새 시간이 물결처럼 흐른다.


클릭하면 천국이 열립니다 둥둥 (춘천 의암호, 2022년 봄)

  그렇게 노를 젓지 않고 물 위에 혼자 둥둥 떠 있다 보면 어김없이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는 줄만 알았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면 한참 멀리 와 있기 때문이다. 나만 눈치재지 못하는 사이 물살이 나를 다른 먼 곳으로 데려다 놓는 거다. 머무르면서 동시에 흘러가는, 착각과 자각의 접점이다. 때로는 그런 현상이 공포를 데려오기도 했다. 포카라 페와 호수에서 뱃놀이를 할 때도 잠깐 눈을 붙인 사이 소낙비가 내려 얼른 눈 떠 보니 배가 지나치게 하류로 떠밀려 내려와 있었다. 배를 빌린 원점을 향해 있는 힘껏 노를 저어봤지만 비바람에 물살이 어찌나 세게 일던지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계속 그 자리에 머물기에도 힘에 부쳤다. 결국 물살을 거스르기를 포기하고 근처 뭍에 비상착륙을 했다. 다행히 아담한 동네라 서로 다 아는 사이인지, 인근 상인이 내가 배를 빌렸던 곳에 연락을 해주어서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뭐든 세차게 밀려오는 시기에는 맞서기보다 잠시 물러나 있는 게 낫겠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쌉싸름한 깨달음을 삼켰다.


 노를 젓거나 둥둥 떠 있는 감각만으로도 이렇듯 충분히 위안이 되지만, 무엇보다 뱃놀이가 아름답게 각인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불편한 사람과 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취미, 이를테면 기타 주나 영화감상, 축구와 농구 등은 가끔씩 원치 않아도 해야 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뒤섞여해야 할 때가 있다. 술을 마실 때도 그렇다. 독서와 글쓰기 같은 취미는 타인이 굳이 필요치 않다. 이에 비해 배를 탈 때는 내 마음껏 상대를 고를 수 있다. 여전히 혼자 타는 시간이 가장 완벽하게 평온하긴 하지만 가끔은 ‘이 정도 편한 사이라면 같이 배를 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생긴다. 세상에 단 둘이 남겨져도 어색하지 않을 사이, 비좁은 공간을 공유해도 기꺼운 사람일 것이다. 그런 이에게는 종종 카누나 카약을 타러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건네왔다. 그 제안은 곧 ‘당신과는 단 둘이 있어도 괜찮다’는 친근한 고백이자, 내 작은 공간의 절반을 내어주고 싶다는 수줍은 호의였다. 그러니 오로지 좋은 기억만 남을 수밖에. 반대로 여태껏 누군가에 의해 억지로 뱃나루에 이끌려 갈 일은 없었다. 적어도 내겐 아직 오염되지 않은, 숨겨둔 외딴섬 같은 취미인 셈이다.


몽골 홉스굴(2019년 여름)

 이런 다감한 까닭으로 뱃놀이는 나의 30대 시절의 군데군데를 비현실 같은 현실로 채색해주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배에 관한 취향도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카약보다 카누에 더 이끌리게 된 것이다. 카약은 배 폭이 좁아 양쪽으로 노를 저을 수 있다. 그래서 패들도 노의 양쪽 끝에 달려 있다. 이에 반해 카누는 배 폭이 비교적 넓어 한쪽으로만 노를 저어 나가야 한다. 카약은 앉는 자리가 고정되어 있는 반면, 카누는 돛단배처럼 균형만 맞춘다면 어디든 앉을 수 있다. 그래서 배를 처음 탈 때는 카약이 더 쉽고 흥미로웠다. 배에 밀착해서 앉으니 안정감이 컸고 한 번에 양쪽으로 노를 저을 수 있으니 빠르고 편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 반면 카누는 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더 애써야 했고 노를 한쪽으로만 젓다 보니 전진하려면 지그재그로 움직여야 해서 효율성도 떨어졌다. 그러나 타면 탈수록 카누의 이런 불안과 비효율에 조금씩 더 이끌리기 시작했다. 그게  삶의 모양을 닮은 것 같아서 말이다. 어디 단숨에 직진하는 삶이 있었을까. 늘 이리저리 헤매고 좌충우돌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지. 그리고 자칫하면 내가 몸담은 세상이 뒤집힐 수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도 늘 안고 살아왔으니.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카약은 둘이서 같은 방향을 바라봐야만 하지만 카누는 원한다면 서로 마주 볼 수 있다.




 회사를 스무 달 동안 휴직하기로 결심하고 머물 도시를 결정해야 했을 때에도 뱃놀이는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렇게 고른 춘천에서 지금은 1년 넘게 머물면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의암호를 찾고 있다. 차를 타고 몇 분만 달리면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멋진 풍경이 펼쳐지는 호반의 도시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도시에 온 뒤로 오히려 혼자 배를 탄 적은 드물다. 처음엔 오리배도 무서워서 벌벌 떨던 어린 아들녀석이 어느새 제법 노를 저을 줄 아는 훌륭한 카누 단짝이 되었기 때문이다. 8년 전 코타키나발루에서 혼자 카약킹을 하던 때 어느 유럽에서 온 아빠와 어린 아들이 나란히 앉아 노 젓는 모습을 한참 바라본 적이 있다. 그 부러운 풍경을 명화 보듯 감상하며 혼자 상상하던 미래가 지금 나의 현실이 된 셈이다.


코타키나발루 바다에서 만난 어느 아빠와 아들(2014년 겨울)

 물론 여전히 가끔은 혼자 배 타던 시간이 그립긴 하다. 그래도 아홉 살 아들녀석이 카누 위에서 물살에 반짝이는 윤슬의 아름다움을 두 눈에 담고, 몸을 맡길 때와 나아가야 할 때를 구분하는 법을 조금씩 알아 나간다면, 고립된 내 세상의 절반을 매번 기꺼이 내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나만의 사랑스러운 취미가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시나브로 전이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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