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그러니까 사춘기가 막 시작될 무렵 만난 김영석 선생님에 관한 글이다. 이곳 브런치에 일기처럼 올렸던 글은 나의 첫 산문집 <고작 이 정도의 어른>에도 실리게 되었다.
책이 출간되자마자 김영석 선생님을 찾아뵙기로 결심한 건 온당한 수순이었다. 28년 전 선생님은 반항기 많던 꼬마의 반성문에서 글이라는 재능을 건져내 주셨다. 학급신문을 만들어보라고 권했고, 전국에 배달되는 소년신문 기자로 추천해주셨다. 지금껏 내가 언론인으로 밥을 벌어먹는 것은 어찌 보면 선생님께서 뿌려준 삶의 씨앗이 발아한 결과일 게다. 학창 시절 만난 처음이자 마지막 ‘때리지 않는’ 선생님이었고, 우유팩 하나 씻는 일만으로도 반의 주역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 분이었고, 텃밭에 상추를 심고 등산을 다니는 기쁨을 일깨워준 스승이었다. 졸업을 하고 중학생이 되어서도 스승의 날마다 찾아갔지만 늘 수많은 제자들에 둘러싸여 있으셨기에 대화를 나누기 어려웠다. 어른이 되어서는 연락 한 번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
어릴 적 기억은 각인되기에 다행이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선생님 댁 전화번호만이 유일한 연결고리였는데 어른이 되어서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10년 전 여름, 서른한 살이 되어서야 기억 속 번호를 더듬어 눌러봤다. 사모님께서 전화를 받으셨다. 아직 그 집에 살고 계신다고. 긴 세월 이사 한 번 가지 않으신 것도, 20년 가까이 눌러본 적 없는 전화번호를 내가 잊지 않은 것도 전부 운명처럼 느껴졌다. 선생님은 봄부터 가을까지는 서울 집이 아닌 강원도 홍천에서 밭을 일구며 산다고 하셨다. 사모님께서 알려주신 휴대전화 번호를 누르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석이구나. 반갑다.
홍천으로 한 번 놀러 오렴.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네.
네, 선생님. 꼭 찾아뵐게요.
그렇게 약속드리고 10년이 덧없이 흘렀다. 마흔한 살이 되어서야 다시 전화를 드렸다.
선생님. 용균이랑 민기랑 함께 찾아뵐게요. 애들 기억나세요?
그럼. 기억하고 말고.
반장 하던 애.
키 큰 애.
우리 셋은 6학년 때 삼총사였다. 반장이던 용균이는 지금 학교 선생님이 됐다. 김영석 선생님을 만난 이후로 바뀌지 않은 꿈이 되었고 이루어냈다. ‘키 큰 애’ 민기는 아직도 키가 제일 크다. 지금은 기억 속 어린 민기를 복사해놓은 듯한 여섯 살 아들내미를 키우며 산다. 두 녀석이 춘천까지 기차 타고 와서 내 차로 갈아타고 같이 홍천에 내려가기로 했다. 아침 열한 시 남춘천역. 저 멀리에서 머리 희끗한 아저씨 두 녀석이 걸어오고 있었다. 민기는 지난해에도 춘천에서 만났고, 용균이는 이십여 년만에 만났지만 이틀 전에 본 듯 알아봤다.
선생님이 살고 계신다는 팔봉산 자락의 농막까지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닿는 데 짧게는 10년, 길게는 28년이 걸렸다. 내비게이션에 찍힌 주소대로 향하니 어느덧 좁은 산길에 이르렀다. 13년 된 고물차가 힘겨운 엔진 소리를 한숨처럼 몇 번 내뱉고 나서야 오르막 중턱에 섬처럼 덩그러니 있는 농막이 눈에 들어왔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녹슨 다리 건너, 수풀에 둘러싸인 컨테이너 집이었다. 거기에서 선생님이 웃고 계셨다.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선생님은 왜소해지지 않으셨고 피부도 매끈했다. 손에 든 농기구를 잠시 내려놓고 우리 이름을 하나씩 불러주며 악수를 청하셨다. 그러고는 들어가는 길목에서 일구고 있던 식물들을 하나씩 소개해주셨다.
바로 앞에 있는 이 나무는 말이지,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씨를 받아온 거야. 너네 맨날 놀던 데. 잘 커서 벌써 이만큼 자랐지.
저 마로니에 나무는 혜화동 마로니에공원에서 씨앗을 가져왔단다.
이 느티나무도 올림픽 공원에서 요만한 거 받아와서 키운 거야. 아주 잘 자라고 있지.
밤나무도 손가락 만한 거 200원짜리 데려와서 이만큼 키웠다네.
농막 주변을 무성하게 둘러싼 수십여 종 나무들은 모두 작은 묘목이나 씨앗을 하나씩 받아와 키운 것들이라고 하셨다. 나무뿐이 아니었다. 밭 한가운데 비닐하우스에서는 상추, 고추, 깻잎, 옥수수가 자라고 있었다. 곳곳에 매달린 목재 벌통에서는 수천 마리의 벌들이 꿀을 빚고 있었다. 땅에는 들꽃이 피었고 새들은 가까이에서 지저귀었다. 농막 안에는 간이침대와 책걸상과 책들이 놓여 있고 벽에는 ‘평습산방’이란 글귀가 걸려 있었다. 평화롭게 익히는 산속의 방. 교직을 그만두고 십사 년 전부터 일구기 시작하셨다는 칠백 평 텃밭은 어느덧 울창한 숲이 되었다.
작고 귀중한 세계의 조물주가 되어 계셨구나.
우리를 키웠듯 생명 키우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구나.
선생님은 이곳에서 농사뿐 아니라 시조를 짓고 수묵화를 그리며 살고 계신다고 했다. 불현듯 올해 읽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떠올렸다. 자연과 가장 가까이 살던 그를 좇아 미국의 월든 호숫가에 꼭 가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듯했다. 월든은 멀리 있지 않았다.
농막 옆 오두막에 앉아 있으니 선생님께서 벌꿀차를 내어주셨다.
아까 본 벌들이 지난해 내내 모은 꿀로 만든 거야.
와… 맛있는데요! 이거 상품으로 팔지는 않으세요?
아니야. 벌들이 제 겨울 나겠다고 모으는 꿀인데 내가 빼앗아가서 미안하지. 그래서 어느 정도 남겨두고 조금만 빼서 가족이랑 몇몇 지인한테만 나눠주고 있어.
벌과 새가 날아드는 오두막에 두런두런 앉아 우리는 그간 어떻게 살았는지 얘기를 나누었다. 선생님은 우리를 맡은 이후로 두 차례 학교를 더 옮긴 뒤 평교사로 퇴직하셨다고 했다. 처음엔 교감이나 교장 욕심도 있었는데 어린 우리와 함께 작은 텃밭을 일구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씀하셨다. 기억한다. 학교 앞 공터에서 선생님과 반 아이들이 함께 상추를 심어 따 먹곤 했다. 우리 생이 뒤흔들렸던 그해 선생님 생의 행로도 뒤바뀐 셈이다.
이야기 소재는 자꾸만 28년 전으로 거슬러 올랐다. 그린스카우트가 되어 쓰레기 주우러 다니던 이야기. 방학 때 남한산성 갔던 이야기. 자전거 타고 선생님 댁 찾아가서 짜장면 얻어먹은 이야기… 옛이야기가 여물 때쯤 슬그머니 책을 꺼냈다. 부끄럽지만 제가 쓴 책이에요. 여기 선생님 이야기도 있어요. 선생님은 쑥스러운 듯 눈도 마주치지 않고 책을 받으셨다.
고맙네. 사실 이렇게 농사지으며 살다 보니 지금은 옛날에 선생 했던 게 부끄러워.
왜요?
가르칠 자격도 없으면서 뭘 가르쳤나 싶어서.
어느새 점심이었다. 근처 식당에서 막국수를 비벼 먹고 있는데 선생님 휴대전화가 울렸다. 벌 나왔대, 얘들아. 얼른 가보자. 마침 벌들의 이삿날이었던 게다. 벌통에서 빠져나온 여왕벌의 이동경로를 서둘러 쫓아야 했다. 부랴부랴 선생님의 숲으로 돌아와 보니 이미 벌떼가 높다란 고목에 다닥다닥 들러붙어 여왕벌을 에워싸고 있었다. 선생님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 능숙한 솜씨로 벌떼를 손바닥 만한 원목 판때기에 옮겨 붙였다. 얼굴에 망을 두른 채 벌이 싫어한다는 쑥 줄기를 훠이훠이 휘두르며 벌을 모는 동안 우리는 멀찌감치에서 벌벌 떨며 바라만 봤다. 이십여 분 남짓 지났을까. 사다리에서 내려온 선생님 손아귀에는 어림잡아 수천 마리의 벌들이 붙어 있었다. 벌들아 고맙다, 쏘지 않고 잘 모여줘서. 어디 도망 안 가 줘서. 제자들 와서 너네가 더 말을 잘 들어주나 보는구나. 얘네들이 이제는 주인을 알아보는 것 같어.
선생님이 웃으셨다.
돌아갈 시간. 다음 해에 더 많은 제자와 함께 찾아뵙기로 약속하고 차를 돌렸다.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선생님은 헤어진 자리에 서 계셨다. 긴 시간을 감아 현재로 돌아왔지만 그날 하루는 내내 미몽에 반쯤 잠겨 있었다. 28년 전 사춘기 소년의 생을 바꾸어놓았던 선생님은 여든이 넘어서도 마흔한 살 먹은 제자의 삶을 뒤흔들어놓았다. 선생님께 짧은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길어진 하루의 문을 닫았다.
선생님, 저는 오늘이 인생의 특별한 날이 된 기분입니다. 나이 더 들면 선생님처럼 살고 싶다는 새로운 꿈이 생겼어요.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