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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May 07. 2023

작은 완성의 경험


 제목은 ‘두 친구’였다. 열 살 주제에 나는 본격적으로 장편소설 쓰기를 결행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일기를 써 왔는데 어른들한테 칭찬을 꽤 받았고, 몇몇 소설을 읽어본 뒤 ‘나도 쓸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일었던 덕분이다.


 줄거리는 대략 이랬다. 부자 친구와 가난한 친구가 있었는데 부자 친구가 사업이 망하던 시점에 가난한 친구가 복권에 당첨되어 상황이 뒤바뀐다. 친하게 지내던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갈등이 생긴다. 그러다 복권에 당첨된 친구는 흥청망청 돈을 쓰며 몰락하고 사업이 망한 친구는 재기에 성공해 다시 부자가 된다. 상황이 극적으로 뒤바뀔 때 일어날 수 있는 관계의 묘한 변화에 관해 쓰고 싶었던 것 같은데 결국 결말은 짓지 못했다. 서론 몇 장 힘겹게 쓰다가 포기했기 때문이다. 고작 열 살. 장편소설을 쓰기엔 필력도 지구력도 집중력도 부족했을 나이였다. 무엇보다 친구들이랑 노는 게 글쓰기보다 훨씬 재밌었다. 창작의 부끄러움은 또 알아서 누구에게도 일절 얘기하지 않았기에 내가 포기한다고 뭐라고 하거나 한 번 끝까지 해보라며 기운을 북돋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나의 첫 소설은 아무도 모르게 접혔다.


 그 미완의 작품은 마흔 살이 될 때까지 내가 ‘써 보기라도 한’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이 되었다. 그 후로 대학생이 되어서도 쭉 일기를 썼고 졸업 후 기자가 되어 10년 넘게 기사를 썼고 휴직하고 지방 소도시에 머물며 두 권의 산문집까지 냈지만 소설만큼은 결코 다시 써본 적이 없다. 유독 소설을 쓰려고 결심할 때마다 마음 어딘가 단단히 박힌 두려움이 꿈틀거리는 욕망을 급제동했다. 어릴 적 ‘포기의 경험’이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부풀어가는 마음을 톡 찔러 터뜨려버리는 기분이었다. 고작 초딩 시절의 그 경험은 성장 과정에서 다른 도전하는 마음까지 오염시켰다. 중학생 때는 뮤지션이 되겠다고 기타를 배우고 가출까지 감행했지만 자작곡 하나 완성하지 못한 채 스스로 만든 밴드를 해체했다. 대학생 때는 영화감독이 되어보겠다며 시나리오를 쓰고 영상을 제작하려다 금세 관두었다. 포기의 이유는 매번 비슷했다. ‘완성해봤자’일 것 같아서. 그리고 친구들이랑 노는 게 더 재밌어서. 그렇게 몇 차례 비슷한 시작과 포기의 굴레를 헛돌다 30년이 흘렀다.


 몇 달 전이었다. 아홉 살 아들내미가 희귀한 귓병을 얻었다. 병원에 가보니 소아 이석증이라며 2주가량은 꼼짝 말고 집에 있으라는 진단을 받았다. 학교 안 가서 오히려 신난 아들 녀석은 게임에 열중하기 바빴다. 그러다 일주일 가량 지나니 게임하기도 지쳤는지 더러는 책도 보고 끄적끄적 일기도 쓰기 시작하더라. 뭔가에 열중하는 아이의 작은 등허리를 바라보다가 불현듯 내가 열 살 적 쓴 그 소설이 떠올랐다. ‘두 친구.’ 만약 그때, 내가 지금 이 녀석과 비슷한 병을 얻어 몇 주간 친구와 놀지도 못하고 집에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쩔 수 없이 그 소설만 써야 하는 환경에서 미흡하나마 끝을 맺어 봤더라면 말이다. 아마 일단 자랑스러운 마음에 엄마나 아빠에게 내보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도 스스로를 소설가라고 자각하지 않았을까? 완성의 짜릿함을 느꼈을 테니 초등학교 졸업하기 전에 다음 소설을 써보기 시작했겠지? 그랬다면 중학생 때 기타를 배울 때도 자작곡을 완성하고, 대학생 때는 영화 한 편을 찍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상상이 거기까지 뻗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완성의 경험’을 맛본 까닭이다. 예닐곱 해 전부터 길을 걸을 때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나 샤워를 할 때 어렴풋이 공상하던 삶이 있었다. 지방 소도시에 나만의 서재를 차리고, 나와 결이 닮은 사람들을 초대해 공간을 공유하는 삶. 월급쟁이였기에 헛된 망상에 가까웠지만 공상은 시나브로 구체화됐고, 어느덧 나는 휴직을 알아보고 있었고, 좋아하던 도시 춘천에 폐가를 덜컥 사들였고, 공유서재로 고쳐 스무 달간 그곳에서 비현실적인 일상을 보내다 현실로 돌아왔다. 공상이 현실이 된 이 행복감, 마흔 살이 넘어 처음 느껴 본 이 소설을 갓 쓰기 시작하던 열 살 때 처음 감각해 봤더라면 어땠을까. 여물지 못했던 삶은 어느 방향으로든 더 역동했겠지. 나는 지금보다 더 스스로 꿈꾸던 바에 가까이 가 있었겠지.


 ‘시작이 반’이라는 은 누구에게나 유효한 격언일 테지만 결국 절반의 숙제를 남겨둘 뿐이다. 나머지 반은 그 시작을 어떻게든 매듭지으려는 행동으로만 채울 수 있다는 진리를, 뒤늦게 겪은 작은 완성의 경험을 통해 깨닫는다. 혹여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더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끝마쳐 본 것만으로도 이미 무언가를 이뤄낸 셈이니까. 그리고 끝에 다다랐을 때에만 보이는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것도 이제는 아니까.


 이렇게 처음 완성을 경험해 본 공유서재에서 처음 시작한 일은 다름 아닌 소설쓰기였다. 문 닫기 몇 달 전부터 매달 단편 하나씩 써 봤는데 결과는 늘 못마땅했다. 몸집만 컸지 여전히 필력도 창의력도 부족해서 타인에게 보여주기는커녕 나 스스로에게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약속만은 꼭 지켰다. 시작한 글은 끝을 맺었다. 도중에 내용이 산으로 가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어도 일단 다 쓰기는 하고 휴지통에 버렸다. ‘적어도 완성은 했다’는 안도감은 그렇게 매번 어디론가 굴절하려는 나를 다시 바로 세워주었다. 가끔 도중에 관두고 싶을 적에는 30년 전의 소년이 타임머신을 타고 와서 나를 채찍질하는 기분도 들었다. ‘지금 네가 쓰고 있는 그걸 매듭짓지 못하면 너의 운명은 반복될 거야’라면서.




나의 첫 완성의 경험, 첫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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