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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Feb 02. 2019

같이 저녁 먹는 사이

<베트남 달랏>The Lakehouse 2편



밥 먹는 일이 특별할 수 있을까. 


음식 맛이 예외적으로 뛰어나거나, 쉽게 만나지 못하는 사람 - 예컨대 유명인이나 사모하는 사람- 과의 단 한 번의 식사라면 그럴 지도 모르겠다. 그 외에는 딱히 밥 먹었을 때의 기억은 좀처럼 각인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 무척 감사하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쓰는 글에 이렇게 불쑥 저녁식사 얘기를 꺼낼 수 있어서. 이날 저녁을 포함해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세 차례 식사는, 사람을 궁금해 하고 싶었던 이번 여행의 궁극과 닿아 있었으니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레이크하우스’에서의 첫 저녁식사. 차린 음식들은 가짓수가 꽤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단출해보였다. 이른바 ‘메인 디쉬’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음식들은 작고 큰 것 없이 일정한 크기의 그릇에 담겨 있었다. 커다란 접시에 주 요리가 나오고 주변에 작은 밑반찬 그릇들이 깔리는 정식을 나도 모르게 상상했던 것 같다. 음식들의 공평한 배치가 처음엔 어색했지만 갈수록 편안했다. 그릇의 크기 말고도, 음식들은 요리한 이의 의도와 무관하게 일정한 교집합을 공유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간이 세지 않았고, 그릇마다 정교하게 장식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질서하게 쌓여 있지도 않았다. 플레이팅을 지나치게 신경쓰지는 않은 듯한 그 무심한 정갈함이 좋았다. 메뉴들도 한 음식에 시선이 쏠리거나 배제될 것 없이 존재감이 비슷했다. 그 날의 메뉴는 콩으로 만든 가짜 고기(fake meat)를 채소와 볶은 요리, 베트남식 녹두전, 데친 야채와 두붓국이었다. 한 자리에 있던 두 명의 채식주의자를 고려한 구성이었다.


이곳에서의 저녁식사 자리는 단순했다. 주인장이 차린 음식을 여행자와 자원봉사자들이 한 식탁에 모여 수다를 나누며 먹는 시간이었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직접 요리해서 차려도 무방했다.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도 나누어 맡았다. 정갈한 음식들도 맛이 좋았지만, 모두 각자의 얘기를 준비된 도시락처럼 꺼내어 나누고 속으로 꼭꼭 씹어 소화하던 기억들이 더 맛있게 남아 있다. 이날 식사 자리에서는 마침 돈을 내고 숙박을 하는 여행자가 나뿐이었다. 세 명은 자원봉사를 하며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두 명은 주인장과 스태프였다. 다른 여행자들도 머물고 있었지만 그 날은 밖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듯 했다. 오늘 하루 저녁으로만 치면 내 숙박비와 식삿값이 나머지 다섯 명을 먹여 살리는 셈이었다. 거창하게 표현했지만 이곳의 저녁식삿값은 한 끼에 우리 돈 이천오백 원이었다. 내가 푼돈으로 ‘먹여 살린(실제로 그렇게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다르지만 신기하게 같은 구석이 있었다. 


자원봉사자 중 가장 활달하고 그나마 말이 많았던 친구는 가비였다. 독일 라이프치히 인근 마을에서 온 여성이었는데 벌써 9개월 째 여행 중이란다. 숙소에 머무는 사흘간 가장 이야기를 많이 나눴던 가비는 호기심과 재능이 넘쳐서 몸 바깥으로 흐르고, 그걸 굳이 주워담지 않고 흐르는 대로 놔두는 삶을 살고 있었다. 대학에서 영화학을 전공했는데, 졸업 논문이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 보이’와 헐리우드의 리메이크판을 비교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그는 한국 영화에 미쳐 있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의 웬만한 걸작들은 다 본 듯 했다. 논문의 결론도 할리우드의 리메이크판을 호되게 비판하는 내용이란다. 어떤 장르의 영화든 액션물로 바꿔버리고 스타일보다 스토리에 집착하는 헐리우드의 성향(혹은 미국인의 영화감성)이 원작의 섬세함과 철학을 훼손했다, 말하자면 이런 주장이었다. 이 대목에서 가비는 유난히 말이 빨라지고 어조가 높아졌다. 


영화학과를 졸업한 뒤 가비는 몇 달간 회사에 취직했다가 그만 두고 여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인도의 영적 공동체인 오로빌 마을에서도 머물렀다. 게스트로 석 달간 지내다가, 정식으로 주민이 되려는 선택의 순간 거주를 포기하고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표면화되지 않은 공동체의 이런저런 갈등에 지쳤고, 기후와 환경 조건이 오래 살 만한 곳은 아니라고 느꼈단다. 어쨌든 그 이후 여러 나라를 돌다가 이곳 숙소를 발견했다. SNS를 통해 숙소 주인장의 철학을 전해들었고, 따로 연락해 돕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베트남 달랏에 ‘자연친화적인 히피들의 안식처’를 만드는 작업에 이끌렸던 거다. ‘레이크하우스’와의 인연의 시작이다. 가비의 공식(?) 직책은 자원봉사자다. 이곳에서 두 달 째 숙식을 제공 받는 대가로 방 청소와 정원 관리를 해주고, 개업한 지 1년 밖에 안 된 숙소에 정체성과 아름다움을 입히고 있다. 



가비는 대화를 즐겁게 이끄는 데도 탁월했지만, 예술적인 재능이 더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인도의 명상 음악을 즐겨 들어서 1층 공용 공간에는 대개 그가 틀어놓은 오묘하고 차분한 음악이 들릴 듯 말 듯하게 흘렀다(물론 누군가 끄고 싶으면 그랬다. 미안해 하지도, 서운해 하지도 않는 분위기였다). 그림을 취미로 그리는데, 그가 그려내는 그림은 정교하거나 복잡하진 않지만 보는 사람을 집중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마침 내가 머물 때도 숙소 본관 건물에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의 스타일대로 제3세계의 어떤 오래된 문양 같은 그림이었다. 투정까지 유쾌하게 담아내는 그와의 대화도 좋았지만, 한가하고 맑은 오후 철제 사다리에 올라 건물 외벽에 옥색 빛깔을 입히던 그의 오른손가락 근육들과, 집중하느라 살짝 찌푸린 눈매와, 미간에 미세하게 고인 땀이 나는 더 좋았다.


가비의 다음 여행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태국에 들르기 위해 입국비자 관련 무언가를 알아본다는 것도 같았고, 여의치 않으면 일단 독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도 같았다. 사실 빠른 속도로 내뱉는 그의 영어를 정확히 다 알아듣기엔 내 영어실력이 미숙했다. 그런 면에서 가비와 함께 한 달 넘게 이 숙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에이든은 고마운 사람이었다. 큰 키에 마른 체형, 조막만하고 하얀 얼굴에 크고 동그란 푸른색 눈과 날선 코. 얼핏 보기만 하면 전형적인 서양인 남성이었다. 



그러나 에이든은 알면 알수록 남다른 구석이 느껴지는 자원봉사자였다. 호주에서 온 그는, 내가 머문 3일 내내 일관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일단 감정기복이 크지 않은 사람 같아 보였다. 그 표정은 뭐랄까, 무구하다는 말이 가장 적절할 듯하다. 속에 뭔가 감추거나 앞뒤가 다르다는 의심을 전혀 할 수 없는 얼굴 말이다. 공격성이 배제된 인상, 잡식동물인 인간을 굳이 육식과 초식으로 분리하면 육식동물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 초식 혈통인 것만 같은 인상. 한결 같은 그 표정으로 3일간 묵묵히 실내 화분에 물을 주고, 바닥 빗자루질을 하고, 식사시간마다 내 어설픈 영어에 귀기울여주었다. 내가 말을 더듬을수록 그의 눈빛은 더 포근해졌다. 마치 눈빛으로  ‘네가 말을 마칠 때까지 충분히 기다릴 테니 조급해 하지 마’라고 차분하게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게 대화를 건넬 때마다 유난히 말을 천천히 했다. 아마 내가 이번 여행에서 귀보다 입을 많이 연 유일한 상대일 거다. 


에이든은 구성원 중에 밥 먹는 속도가 가장 느렸다. 게다가 보기완 다르게 대식가여서 끼니 때마다 밥을 두세그릇씩 먹었다. 그래서 매번 그가 수저를 내려놓는 순간 우리의 식사시간이 끝났다(규칙은 없었지만 먼저 일어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꼿꼿이 앉은 자세로 한 숟갈 한 숟갈 신중하게 밥을 넘기는 모습은, 마치 개울가에 고고하게 내려앉아 작은 먹잇감을 오물오물 씹고 있는 새하얀 학 한 마리를 연상시켰다. 서양인 치고 젓가락질도 꽤 익숙했다. 그러다 누군가 얘기를 꺼내면 주저없이 수저를 내려놓고 누구보다 집중해서 들었다. 자세가 바르고, 음식을 천천히 삼키고, 남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사람. 식사시간을 함께 한 것만으로도 난 그를 깊이 신뢰하게 되었다.


주인장과 스태프인 두 베트남인도 매번 끼니를 함께 했다. 그들은 어느 하나 과한 게 없는 이 숙소 특유의 분위기를 묘한 아우라로 이끌고 있었다. ‘밤에 파티를 여는 게스트하우스가 아니’라는 말 외에는 별다른 주의사항이 벽에 붙어있지 않았지만, 구성원들은 알아서 배려하고 이해하며 시공간을 공유했다. 아마도 두 사람의 조심스러운 걸음걸이, 차분한 말투, 편안한 대접이 숙소에 머무는 이들의 행동거지에 스며든 듯 했다. 


주인장인 ‘유엔’은 과거 명상센터였던 숲 속의 집들을 임대해 이 숙소를 만들었다. 혼자 리모델링과 페인트칠을 하다 힘에 부치자, 스태프를 모으고 SNS로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고 한다. 지금 나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 그는 한국을 특히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숙소의 정체성과도 닿아 있었다. 우리나라 영화 ‘시월애’를 보고 호숫가에 집들을 지어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숙소 이름도 ‘레이크하우스’라고 지었단다(‘레이크 하우스’는 시월애의 헐리우드 리메이크판 영화 제목이다). 이 게스트하우스에 살면서 영화처럼 엇갈린 시간에서 누군가에게 편지가 오길 기다리고 있는 걸까.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다만 ‘올드보이’를 졸업 논문으로 써낸 독일인과 ‘시월애’를 보고 집을 지은 베트남인이 나와 한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다는 건 꽤 신기했다. 두 작품 모두 우리 영화였고, 헐리우드에서 리메이크를 했으며, 내가 몹시 좋아하는 영화들이었다. 



유엔의 친구이자 숙소 스태프인 ‘한’은 요리 담당이었다. 나보다 나이는 어려보였지만, 엄마 밥을 먹고 자랐던 내게 그녀는 3일간 엄마였다. 한 역시 1년 전까지만 해도 요리는커녕 나처럼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만 먹으며 살았단다. 1년 전 유엔의 요청으로 숙소 일을 도와주기로 하면서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러나 한이 만든 음식에는 1년 만에 습득한 솜씨라고는 믿기지 않는 기품이 배어 있었다. 나는 요리가 사람을 닮는다고 믿는다. 입맛의 취향을 배제하면, 의심이 많거나 성격이 급한 사람은 자극적으로 맛을 낼 확률이 높다. 맛이 없을까봐 걱정되거나 빨리 맛을 우러내려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그렇다. 양념이나 소스를 있는 대로 들이붓는 편이다. 맵고 짜면 적어도 맛없지는 않으니까. 반대로 여백이 많고 느긋한 사람이 만든 음식은 삼삼하고 싱거운 경우가 많다. 본능적으로 모든 종류의 자극을 기피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처음엔 맛이 없는 듯 하더라도 오래 질리지 않을 맛을 찾는 걸 수도 있다. 과학적인 주장은 아니지만 경험상 그랬다. 


그런 면에서 한이 만든 음식들은 내가 숙소에 머물면서 관찰했던 그의 기품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마치 그를 쏙 빼닮은 어린 자식 같았다. 어느 하나 간이 세지 않고 ‘과한 맛’이 없었다. 특정한 음식 재료가 부각되는 일 없이 모든 재료의 맛과 향이 균형을 이뤘다. 그렇다고 삼삼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기술을 부린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의 성격과 철학과 습관이 맛에 배어나오는 듯 했다. 그래서 맛있었냐고? 음식점에서 먹는 요리와는 분명 달랐다. 그러나 집에서 이런 음식들이 나오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맛이었다. 맛으로 기억나진 않지만 그 음식이 놓인 식탁의 분위기는 기억나게 하는 맛. 주인공이 되지는 못해도 훌륭한 조연으로 연소하는 맛 말이다. 한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대화의 중심에 서지는 않아도 늘 대화자리에 함께 있었으면 좋겠는 사람. 각인되기 보다는 스며드는 사람.


이들 말고도 호주에서 온 자원봉사자 앨리스, 다른 숙박객 몇 명과 떠나기 전까지 세 번의 식사를 함께 했다. 식사자리가 아니면 우리는 서로를 관심 밖에 두었다. 누군가는 소파에 파묻혀 졸고, 누군가는 노트북으로 타자를 두드리고, 누군가는 책을 읽거나 털실로 옷을 짜고 있었다. 스쿠터를 타고 시내에 다녀오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가끔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단지 대화일 뿐이었다. 친밀감을 형성하려 하거나 ‘아이스 브레이킹’을 목적으로 하는 대화는 이 공간 어디에도 없었다. 저마다의 삶을 살다가, 식사 시간만 되면 식탁에 모여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꺼내어 먹었다. 몸집도, 나라도, 취미도, 어딜 봐도 같은 구석이 없는 사람들끼리 빚어내는 오묘한 화음이 식사자리에 울려퍼졌다. 서로 방해하지 않는 풍경들이 부조화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이런 일상이, 어쩌면 내가 찾는 여행의 궁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한국으로 돌아가서 맞이할, 나를 둘러싼 일상도 꼭 이들과 닮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들과 함께 사흘을 보내며 내가 가장 많이 떠올린 단어는 역설적으로 ‘가족’ 또는 ‘식구’같은 말들이었다. 결혼하기 전까지 나는 여섯 식구와 어린 15년을 보냈고, 다시 네 식구와 나머지 5년을 보냈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는 주로 친구나 선배와 자취생활을 했다. 우리 가족은 대화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같이 살 때는 저녁 식사만큼은 늘 함께 하려 애썼다. 저녁은 가정주부였던 엄마의 고된 의무이자 자부심이었다. 엄마의 요리 솜씨도 저녁 식탁으로 식구들을 불러모으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레이크하우스의 유일한 원칙인 ‘함께 저녁먹기’를 사흘간 실천하며, 나는 가족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톺아보았다. 대화는 친구들과 더 많이 나눴고, 사랑의 밀어는 연인과 훨씬 자주 속삭였던 것 같다. 가족은 좋게 표현하면 최후의 보루지만 달리 말하면 늘 뒷전이자 후순위 선택지였다. 무심하게 말해 그저 한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는 사이였다. 많은 이들이 나와 같기에 ‘가족’과 ‘식구’가 같은 말처럼 쓰이는 게 아닐까. 끼니를 같이 나누는 사이. 식구. 이 말들에는 무심함도, 허무도, 정겨움도, 포기할 수 없는 안정감과 애틋함도 담겨 있다. 


레이크하우스에서 보낸 사흘간, 나는 이 사람들과 서로 관여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다 함께 저녁을 차려 먹기를 반복했다. 그래서일까. 짧은 시간 나는 이들에게서 속 깊은 가족애를 느꼈다. 사흘뿐이었지만 그들은 내게 식구였고, 가족과 마찬가지였던 거다. 다만 서로 깊이 두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식구였을 뿐이다. 그 책임감이 배제된 다정함이 좋았다. 그저 우리가 ‘같이 저녁먹는 사이’라는 게, 그게 가족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단면일 수도 있다는 게 포근하게만 느껴졌다. 


떠나는 날, 혹시 한국에 여행오면 연락하라며 전화번호와 SNS주소를 공유했다. 그러나 내가 그들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다. 현실에서 잘 이루어지지 않는 사건이니까. 기대는 실망을 부르는 법이다. 그저 그들은 내 생에서 ‘사흘간의 가족’으로 남을 확률이 높다.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느 쪽으로 가능성이 열리든, 그것만으로 충분하며 충분해야만 한다고 느꼈다. 만에 하나 그들이 진짜 한국에 나타난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아니라도 괜찮다. 문득 어느날 혼자서 저녁을 먹다가 스쳐간 가족애의 훈풍이 먼 남쪽에서 불어오면, 2018년 여름의 달랏과 레이크하우스의 저녁식탁과 그들의 정다운 무관심을 소환하며 미소지으면 그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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