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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Feb 24. 2019

가난을 벗겨내는 잔인한 공식

'왜 베트남인가' 취재를 마치며

내 어머니를 죽인 사람에게 내 자식의 미래를 맡길 수 있을까?


베트남의 실용주의를 체감하고 있는 일주일입니다.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로드맨> 뉴스 제작을 위해 다낭과 하노이를 찾았어요. ‘도이머이’로 불리는 베트남의 개혁개방 모델이 북한의 미래가 될 수 있을지, 현장에서 답을 찾자는 목적이었답니다. 일주일간 하루 대여섯 시간 잠들어 있을 때를 빼곤 눈과 발과 머릿속에서 베트남이란 나라가 떠난 적이 없어요. ‘베트남 모델’과 북한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서였지만, 더 잔상이 남은 건 가난을 벗어난 나라들의 씁쓸한 교집합에 대해서였습니다.


뉴스데스크 <로드맨> 제작 중. 다낭 드래곤브리지 앞 거리에서.


먼저 찾은 다낭. 

베트남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이곳은 40여 년 만에 동남아 대표 관광도시가 되었습니다. 미군의 거점으로 15만 명의 기형아를 낳은 고엽제의 보관 창고였던 다낭 공항은 이제 연 300만 명의 외국인이 찾는 국제공항이 되었죠. 지금도 구석구석에 전쟁의 잔인한 상흔들이 남아있지만, 산에 숨어든 그들에게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던 미국인과 한국인들은 이제 도심 거리거리에 돈을 폭탄 대신 퍼붓고 있습니다. 다낭은 최근 관광뿐 아니라 APEC 정상회의도 유치하고 미군 항공모함도 기항을 허용하며 국제적인 위상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전쟁 당시 그들을 지원하던 소련은 몰락했고, 중국은 적보다 더 불편한 사이가 됐지요. 관광도시 다낭에서 체감한 정치 역학의 기묘한 변화입니다.


'젊은이들의 성지' 하노이 맥주거리.


다음 찾은 하노이. 

시내 중심에서 한 시간만 달리면 박닌이라는 도시에 이릅니다.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의 공장이 밀집한 공업단지지요. 외국 가면 없던 애국심도 생긴다고 했던가요? 이 중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입니다. 취재한 공장에서만 3만 7천 명의 베트남 노동자가 일하고 있고, 베트남 수출의 20%를 책임지고 있어요. 외국 자본을 적극 끌어들인 베트남식 경제 정책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죠. 다국적 기업들을 불러들여 연평균 6%의 눈부신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지만, 동시에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나라 경제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시한폭탄도 떠안고 있는 셈이에요. 기술력도 자본도 부족했던 베트남이었기에 이런 위험한 도박에 베팅하는 게 유일한 길이었을 터입니다.


시멘트로 덮인 대규모 공장지대를 벗어나 차로 30여 분만 더 달리면 반전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농부가 괭이질을 하고 소가 밭을 가는, 엽서에 나오던 베트남의 목가적인 얼굴이 드러나죠. 이 시골마을 깊숙한 어딘가로 비포장길을 물어물어 들어가 자그마한 추모공원을 찾아냈습니다. 베트남전쟁 당시 참전했다가 숨진 북한군인 14명을 기리는 공원이에요. 묘지들에 잡풀이 무성하고 거칠게 관리됐더라니, 알고 보니 마을 관리인이 정부의 지원도 받지 않고 무보수로 공원을 돌보고 있다고 합니다. 전쟁 때 도와주다 숨진 이들을 우리라도 돌봐야 할 것 같아서 그러고 있다고, 관리인은 눈물지으며 우리와 인터뷰했습니다. 삼성전자 공장에서 불과 30km도 되지 않는 마을에서 마주한 광경이지요.


전쟁의 아픔이 묻힌 땅 위에, 전쟁에서 맞서 싸운 나라의 자본이 꽃피고 있는 셈입니다. 


그 돌연변이 씨앗이 지금의 베트남을 먹여 살리고 있는 건 되돌릴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현실이겠죠.


박장성 시골마을의 북한군 추모 비석들.


아마 베트남은 전쟁의 승자였기 때문에 적개심이 상대적으로 쉽게 사그라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불과 40여 년 만에 벌어진 이런 변화에 대해, 베트남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그 진심을 취재하기란 불가능했습니다. 여전히 통제된 사회주의 국가에서 속내를 말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던 탓이지요. 이렇게 개인들에겐 말할 자유조차 제한된 사회였지만, 적어도 겉보기에 큰 불만이 응축되고 있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자유란 어느 정도까지는 포기할 수 있는 권리인 걸까요. 그렇다면 자유란 날 때부터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주어진 천부의 가치가 아니었다는 건가요.


베트남 인구 1억. 평균 연령은 31살도 채 안 됩니다.


어쨌든 안중근 의사의 명언과는 달리 역사를 잠시 잊은 민족에게 밝은 미래가 찾아왔습니다. 지표로 보면 일단 그래요. GDP는 30년 사이 14배가 늘었고, 세계 최하위 수준이었던 경제규모는 어느새 47위까지 올라섰어요. 2차 대전 이후 이렇게 가난을 탈출한 나라들은 극소수입니다. 일본, 대만, 싱가포르, 그리고 우리나라 정도지요. 베트남과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분명해요. 일당 독재가 수십 년간 지속됐고, 전쟁까지 치렀던 적들과 손잡은 걸 넘어 그들의 자본과 기술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 독재로 망한 나라가 훨씬 많으니 전자는 일반화가 어렵겠지만, 반대로 독재하지 않고 잘 살게 된 나라는 2차 대전 이후 없는 셈입니다. 또 내 가족을 죽인 적에게 손 내밀지 않고 부유해진 나라도 여태까지는 없는 것이죠. 그것도 재빨리, 전쟁의 상흔이 아물기 전에 더 서둘러 손 내민 순서대로 잘 살게 됐어요. 일본은 미국에게, 우리는 일본에게, 베트남은 우리에게. 후손에게 물려주기 싫은 부국강병의 법칙이지만, 다른 답을 구하기 힘든 등식이기도 합니다.


물론 지표로 나타난 발전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들이 도사리고 있을 터입니다. 그 이면까지는 다루지도 고민하지도 못한 채 취재를 마쳤습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베트남식 실용주의가 압축된 풍경만을 카메라에 담은 채 곧 귀국길에 오릅니다. 사람을 많이 죽였을수록 강대국이 된 세상. 내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려면, 내 부모를 죽인 강대국들에게도 손 내밀 어야 했던 걸까요? 그게 현실이며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역학의 일방통행로인가요? 그렇다면 국제 질서에서 정의와 정담함은 무엇이며, 어떤 결과를 가져다준다고 내 자식에게 가르쳐야 할까요?



씁쓸한 글을 쓰며 마신 베트남 코코넛커피는 어쨌든 달콤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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