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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Sep 12. 2019

당신의 오아시스는 무엇인가요?

건조한 삶을 구해준 것들



0.
'오아시스'라는 주제로 글을 써야 할 일이 생겼다. 


아무거나 써도 된다기에 휑한 상상력을 이리저리 비틀다가 그냥 나에게로 되돌아왔다. 종종 사막 같았던 시절, 내 목을 축여주던 생명수는 무엇이었을까? 답을 모르고 있는 것도 퍽 신기해서 최선을 다해 그 시절을 더듬었다. 그 결론을 여기에도 옮겨둔다.

1.
누구나 삶이 건조해질 때가 있다. 


태양 같은 것이 나를 말려 죽이려 한다는 기분이 들 때마다 나는 음악을 들었다. 의심할 바 없이 음악은 무너지는 하루의 오아시스 아니었을까. 인생이 재밌을 때는 어디 숨어 있다가, 재미 없어지면 내 곁에 스윽 다가왔다. 메마른 시절을 적셔준 고마운 노래들이 참 많다. 누군가 세상에 퍼뜨려주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한 노래들.

더 구체적으로 돌이켜봤다. 살면서 가장 아팠던 몇몇 순간, 난 무슨 노래를 들었더라? 의외로 잘 떠오르지 않다가, 그 아픈 기억들의 정점을 만지다가, 신기한 사실을 깨달았다. 난 그 순간 노래를 듣고 있지 않았었다. 노래는 아픔의 가장 뾰족한 자리에 걸쳐 있지 않았다. 가장 아플 때는 노래 따위 떠오르지도 않더라. 오히려 그 절정이 조금 지나서야 귀에 스며들듯 찾아왔다. 진통제가 아닌 안정제였던 셈이다.

그럼 가장 아팠던 순간에는 뭘 했지? 의외였다. 나는 기도를 하며 진통을 견뎌냈던 것 같다. 초딩 때 짝사랑이 성당 다녀서 얼떨결에 따라갔다가 처음 만난, 그러니까 첫 만남부터 불순했던 그 하느님에게. 고딩 이후 십몇 년간 성당에 찾아뵙지도 않고 개인적으로도 잊어버리고 살며 심지어는 존재조차 의심하고 있는 그 하느님에게.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종알종알 말을 건넸다. 좀 살려달라고. 구원해달라고. 뭔지 모르겠지만 죄송하다고. 평범한 세상에는 없다가 생이 황폐해지면 나타나는 신이야말로, 내겐 오아시스 같았다.

신은 관대하다. 자신을 잘 믿지도 않는 내게 늘 답을 내려주셨다. 니가 알아서 하라고. 천천히 걸으면서 잘 생각해보라고. 그래서 나는 그 말을 따랐다. 알아서 잘 생각해보기 위해, 삶이 사막 같아지려 하면 곧장 짐을 꾸리고 여행을 떠났다. 걷다 보면 걷다 보면 늘 거기에 답이 있었다. 주로 ‘그래 니가 잘못했어’라고 길은 대답해줬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삶이 잘 풀릴 때는 다 내 잘난 덕인 줄 알다가 뭐가 좀 안 풀리면 늘 남 탓을 하며 살았다. 모든 아픔이 내가 겪어야 할 정당한 대가라고 믿었을 때, 척박하고 건조한 세상은 마법처럼 푸르러졌다. 그러고 보면 신이 오아시스가 아니라, 신이 알려준 ‘여행’ 길이 내게 오아시스였던 셈이다.

그래서 주로 혼자 떠나는 여행이 좋았다. 걷고 또 걸으며 반성과 성찰의 성수를 들이부었다. 나의 여행은 대개 단순하고 반복적이었다. 그렇게 걷는 일로 시작하면, 어김없이 읽는 일로 끝났다. 한없이 걷다 보면 더 깊은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여행만 다녀오면 읽을 책 목록이 쌓여갔고 활자도 더 크게 보였다. 여행에서 책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은 결국 세상을 탐닉하는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여행이라는 습관이 몸에 밴 뒤로 자연스레 초딩 때 이후 끊겼던 독서 습관이 소환됐다. 여행에서 만난 표면적인 풍경보다 더 깊고 넓은 세상에서 유영하며 나는 2% 부족했던 갈증을 마저 해소했다. 나의 궁극적인 오아시스는 결국 여행에서 시작해 독서로 귀결했다.

책은 내가 품는 세상의 시차를 조금씩 넓혀주었다. 나는 활자의 관문을 열고 종종 미래에 다녀오기도 했지만, 이따금씩은 먼 지난날의 과오를 더듬어야만 했다. 살다 보니 뒤늦게 잘못이라는 걸 깨달은 것들이 참 많다. 책은 '그때 너가 잘못했어. 앞으로는 이렇게 살아봐'라고 끊임없이 지적해댔다. 그걸 마주할 때마다 괴로웠지만, 그런 나빴던 나를 나라도 보듬지 않으면 저 멀리 내팽개쳐진 과거가 어떤 식으로 부활해 현재를 괴롭힐지 모를 일이었다.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야만 나를, 주변 사람들을, 이 세계를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배우는 것이 더 많아질수록 내 안에서 용서와 사랑의 품도 조금씩 넓어졌다. 소설의 기쁨을 알려준 살만 루슈디와, 내겐 완벽한 소설가인 로맹 가리의 가르침도 이와 같았다. 부조리한 세상은 외면하지 말되 사랑을 멈추지 말라고. 나는 읽을수록 더 풍부하게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됐다. 회사생활 같은 현실에서 사랑이 줄어들수록 그래서 난 더 떠났고, 읽었으며, 사랑의 점성을 늘려갔다.

음악으로 견디던 삶이 결국 나를 못 살게 굴 때마다 신을 찾았고, 신은 여행을 권하셨고, 여행은 읽는 세상으로 날 인도했고, 읽을수록 난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진짜 오아시스는 사랑일까? 신이 없어도, 여행을 못 다녀도, 이 세상 모든 책이 불에 타도 나는 어찌어찌 살겠지만, 사랑이 없다면 나는 사막 같은 세상에서 태양 같은 빛에도 쉽게 말라죽어버릴 테니까. 사실 이쯤 되니 확신이 안 선다. 사랑은 덩치가 너무 커서 정답으로 품에 쏙 들어오지가 않는다. 어쩌면 오아시스는 따로 있고 사랑은 그저 무의미한 삶을 연장시키는 신기루일지도.

2.
요즘은 확실한 게 하나 있다. 


요즘 삶에서 나의 작은 오아시스가 되어주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로부터 건네받는 새로운 세계가, 겨울철 같은 회사생활로 한껏 건조해진 월급쟁이의 목을 축인다. 내 안의 물이 다 마를 때까지 나 또한 최선을 다해 샘솟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것들을 보며 다짐한다.

3.
궁금해졌다. 내 주변 사람들의 세계는 사막 같을까? 


나와 매일 얼굴을 맞대는 사무실 동료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너, 엊그제 취재하며 우연히 만났고 다신 볼 일 없을 것 같은 그분의 세상도 저마다 건조할까? 서로를 조금씩이라도 적셔주는 삶이어얄 텐데. 나도 그런 사람이어얄 텐데. 가장 궁금한 사람 한둘이라도 골라서 무턱대고 물어봐야겠다. 지금 당신의 오아시스는 무엇인가요?



사하라 사막 인근 마을의 소년. 너의 오아시스는 뭐니?(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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