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거나 써도 된다기에 휑한 상상력을 이리저리 비틀다가 그냥 나에게로 되돌아왔다. 종종 사막 같았던 시절, 내 목을 축여주던 생명수는 무엇이었을까? 답을 모르고 있는 것도 퍽 신기해서 최선을 다해 그 시절을 더듬었다.그 결론을 여기에도 옮겨둔다.
1. 누구나 삶이 건조해질 때가 있다.
태양 같은 것이 나를 말려 죽이려 한다는 기분이 들 때마다 나는 음악을 들었다. 의심할 바 없이 음악은 무너지는 하루의 오아시스 아니었을까. 인생이 재밌을 때는 어디 숨어 있다가, 재미 없어지면 내 곁에 스윽 다가왔다. 메마른 시절을 적셔준 고마운 노래들이 참 많다. 누군가 세상에 퍼뜨려주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한 노래들.
더 구체적으로 돌이켜봤다. 살면서 가장 아팠던 몇몇 순간, 난 무슨 노래를 들었더라? 의외로 잘 떠오르지 않다가, 그 아픈 기억들의 정점을 만지다가, 신기한 사실을 깨달았다. 난 그 순간 노래를 듣고 있지 않았었다. 노래는 아픔의 가장 뾰족한 자리에 걸쳐 있지 않았다. 가장 아플 때는 노래 따위 떠오르지도 않더라. 오히려 그 절정이 조금 지나서야 귀에 스며들듯 찾아왔다. 진통제가 아닌 안정제였던 셈이다.
그럼 가장 아팠던 순간에는 뭘 했지? 의외였다. 나는 기도를 하며 진통을 견뎌냈던 것 같다. 초딩 때 짝사랑이 성당 다녀서 얼떨결에 따라갔다가 처음 만난, 그러니까 첫 만남부터 불순했던 그 하느님에게. 고딩 이후 십몇 년간 성당에 찾아뵙지도 않고 개인적으로도 잊어버리고 살며 심지어는 존재조차 의심하고 있는 그 하느님에게.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종알종알 말을 건넸다. 좀 살려달라고. 구원해달라고. 뭔지 모르겠지만 죄송하다고. 평범한 세상에는 없다가 생이 황폐해지면 나타나는 신이야말로, 내겐 오아시스 같았다.
신은 관대하다. 자신을 잘 믿지도 않는 내게 늘 답을 내려주셨다. 니가 알아서 하라고. 천천히 걸으면서 잘 생각해보라고. 그래서 나는 그 말을 따랐다. 알아서 잘 생각해보기 위해, 삶이 사막 같아지려 하면 곧장 짐을 꾸리고 여행을 떠났다. 걷다 보면 걷다 보면 늘 거기에 답이 있었다. 주로 ‘그래 니가 잘못했어’라고 길은 대답해줬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삶이 잘 풀릴 때는 다 내 잘난 덕인 줄 알다가 뭐가 좀 안 풀리면 늘 남 탓을 하며 살았다. 모든 아픔이 내가 겪어야 할 정당한 대가라고 믿었을 때, 척박하고 건조한 세상은 마법처럼 푸르러졌다. 그러고 보면 신이 오아시스가 아니라, 신이 알려준 ‘여행’ 길이 내게 오아시스였던 셈이다.
그래서 주로 혼자 떠나는 여행이 좋았다. 걷고 또 걸으며 반성과 성찰의 성수를 들이부었다. 나의 여행은 대개 단순하고 반복적이었다. 그렇게 걷는 일로 시작하면, 어김없이 읽는 일로 끝났다. 한없이 걷다 보면 더 깊은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여행만 다녀오면 읽을 책 목록이 쌓여갔고 활자도 더 크게 보였다. 여행에서 책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은 결국 세상을 탐닉하는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여행이라는 습관이 몸에 밴 뒤로 자연스레 초딩 때 이후 끊겼던 독서 습관이 소환됐다. 여행에서 만난 표면적인 풍경보다 더 깊고 넓은 세상에서 유영하며 나는 2% 부족했던 갈증을 마저 해소했다. 나의 궁극적인 오아시스는 결국 여행에서 시작해 독서로귀결했다.
책은 내가 품는 세상의 시차를 조금씩 넓혀주었다. 나는 활자의 관문을 열고 종종 미래에 다녀오기도 했지만, 이따금씩은 먼 지난날의 과오를 더듬어야만 했다. 살다 보니 뒤늦게 잘못이라는 걸 깨달은 것들이 참 많다. 책은 '그때 너가 잘못했어. 앞으로는 이렇게 살아봐'라고 끊임없이 지적해댔다. 그걸 마주할 때마다 괴로웠지만, 그런 나빴던 나를 나라도 보듬지 않으면 저 멀리 내팽개쳐진 과거가 어떤 식으로 부활해 현재를 괴롭힐지 모를 일이었다.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야만 나를, 주변 사람들을, 이 세계를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배우는 것이 더 많아질수록 내 안에서 용서와 사랑의 품도 조금씩 넓어졌다. 소설의 기쁨을 알려준 살만 루슈디와, 내겐 완벽한 소설가인 로맹 가리의 가르침도 이와 같았다. 부조리한 세상은 외면하지 말되 사랑을 멈추지 말라고. 나는 읽을수록 더 풍부하게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됐다. 회사생활 같은 현실에서 사랑이 줄어들수록 그래서 난 더 떠났고, 읽었으며, 사랑의 점성을 늘려갔다.
음악으로 견디던 삶이 결국 나를 못 살게 굴 때마다 신을 찾았고, 신은 여행을 권하셨고, 여행은 읽는 세상으로 날 인도했고, 읽을수록 난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진짜 오아시스는 사랑일까? 신이 없어도, 여행을 못 다녀도, 이 세상 모든 책이 불에 타도 나는 어찌어찌 살겠지만, 사랑이 없다면 나는 사막 같은 세상에서 태양 같은 빛에도 쉽게 말라죽어버릴 테니까. 사실 이쯤 되니 확신이 안 선다. 사랑은 덩치가 너무 커서 정답으로 품에 쏙 들어오지가 않는다. 어쩌면 오아시스는 따로 있고 사랑은 그저 무의미한 삶을 연장시키는 신기루일지도.
2. 요즘은 확실한 게 하나 있다.
요즘 삶에서 나의 작은 오아시스가 되어주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로부터 건네받는 새로운 세계가, 겨울철 같은 회사생활로 한껏 건조해진 월급쟁이의 목을 축인다. 내 안의 물이 다 마를 때까지 나 또한 최선을 다해 샘솟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것들을 보며 다짐한다.
3. 궁금해졌다. 내 주변 사람들의 세계는 사막 같을까?
나와 매일 얼굴을 맞대는 사무실 동료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너, 엊그제 취재하며 우연히 만났고 다신 볼 일 없을 것 같은 그분의 세상도 저마다 건조할까? 서로를 조금씩이라도 적셔주는 삶이어얄 텐데. 나도 그런 사람이어얄 텐데. 가장 궁금한 사람 한둘이라도 골라서 무턱대고 물어봐야겠다. 지금 당신의 오아시스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