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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Jun 28. 2020

라임맛 샹그리아 같던 우리의 밤

<설렘은 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맴도네>

※ 이 오래 묵은 여행기의 일부는 허구이며, 그 허구는 나머지 진실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자정이 가까울 무렵, 시끌벅적했던 거실에 단 둘이 남았다. 


이 도시에서 가장 작을지도 모를 J 게스트하우스. 응접실에 있던 가구라곤 TV를 애처롭게 떠받치던 야윈 수납장과 키 낮은 책장, 잿빛 포목에 덮인 전열기, 그리고 그와 그녀 사이에 놓여있던 은빛 식탁뿐이었다. 작은 소리도 메아리치던 휑한 공간에서 두 사람은 한 쌍의 낡은 철제의자에 마주 보고 앉았다. 그의 양팔꿈치는 식탁에 걸쳐 있었다. 활처럼 굽은 등과 두 어깨는 그녀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에 비해 그녀는 두 손을 식탁 아래로 감춘 채,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았다. 서로에게 다가가기로 마음먹은 각자의 거리였을 것이다.


식탁 위에는 샹그리아 두 잔이 놓여 있었다. 여기서만 40년을 살았다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이 자랑스레 말하며 한 잔씩 따라주고 갔던 터였다.      


“우리 집에선 이걸 마셔야 해요. 이곳 말라가의 와인과 오렌지로 직접 만들었지요.”     


주인장이 떠나고 두 사람은 잔을 부딪혔다. 각자의 유리잔에 갇힌 붉은 물결이 한 차례 넘칠 듯 출렁이다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모로코계 스패니시인 그녀와 한국인인 그는 처음 만난 지 고작, 누군가에겐 벌써, 이틀째였다. 두 사람은 비슷하게 영어가 서툴렀다. 그렇다고 그 사실이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오늘 하루, 다른 숙박객들을 따돌리고 단 둘이 온종일 도시의 그림자들을 - 그녀는 뒷골목을 그렇게 표현했다 - 밟으러 다녔을 때도 그랬듯이. 다만 영어를 뇌에서 조립해 입으로 옮기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다 보니 대화의 틈새에 침묵이 자주 끼어들었을 뿐이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두 사람은 자세를 조금씩 고쳐 앉곤 했다. 그럴 때마다 노쇠한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으며 위태로운 마찰음을 냈다. 둘만 있기엔 널찍했던 공간의 빈틈 의자 삐걱이는 소리가 주기적으로 메워주고 있었다.      


삐걱.

그녀가 살짝 허벅지를 비틀었구나.

삐걱.

그의 엉덩이 근육도 꿈틀거린다.      

삐걱. 삐걱.

가느다란 쇳소리가 낮은 공기를 타고 오간다. 식탁 위로 말이 수북이 쌓이는 사이 그는 식탁 아래에서 주고받는 미세한 진동감지했다.      


그녀는 그가 살면서 만난 몇 안 되는 공감의 초능력자였다. 가볍게 날리던 그의 말들을 공중에 내버려 두지 않고 죄다 주워 담았다. 서툰 영어의 행간마저도 영리하게 낚아채 호수 같은 눈망울로 빨아들이는 듯했다. 그만의 착각이었을까. 아무래도 좋았다. 속아도 그만이지. 그녀가 그의 언어를 키며 고개를 주억거릴 때마다 그의 심장도 동시에 덜컹거렸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같은 리듬에 흔들거리고 있던 셈이다. 한 사람은 현실 속에서. 다른 한 사람은 비현실 속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철제의자는 자석처럼 식탁 쪽으로 옮겨 붙었다. 발 밑이 조금씩 가까운 그녀. 쭉 뻗으면 그녀에게 가 닿을 것만 같던 무릎이 주기적으로 찌릿, 찌릿거렸다. 그럴 때마다 그는 괄약근을 조이거나 발가락에 세게 힘을 주었다.  


가장 노골적인 건 손이었다. 식탁 위의 두 손, 그러니까 그녀가 빤히 보고 있을 그의 손이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나부댔다. 특히 손목이 품위를 완벽히 잃었다. 와인잔의 길고 가느다란 목을 아마 수백 번쯤은 들었다 놨을 것이다. 입가에도 쉴 새 없이 잔을 가져다댔지만 술잔 속 샹그리아는 신기하리만큼 줄어들지 않았다. 남은 음료의 양은 그에게, 끝없고 싶던 이 밤의 끝을 알려줄 모래시계였을 것이기에.      


둘의 대화는 밤을 닮아 깊어졌고 그럴수록 그의 시야는 최면처럼 좁아졌다. 그는 집중하는 게, 취한 게, 홀린 게 틀림없었다. 고작 샹그리아 몇 모금 홀짝였을 뿐인데.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될 건 뭐야. 안 될 게 뭐긴, 뭐지. 안 되는 게 맞지. 맞는 게 뭐야. 맞는 게 맞는 거지…… 젠장. 망설이는 사이 그녀의 샹그리아 잔은 다 비어버렸고, 두 사람을 둘러싼 수많은 가능성의 문은 닫혔고, 그녀를 알기 전 세상으로 그는 돌아왔다.     


10년이 흘렀다.


그는 그날 밤 그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정확히 되감지 못한다. 흥분은 기억을 지우기 마련이니까. 진심보다는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수사를 말의 여백에 덕지덕지 덧붙였다는 것 정도만 선명하게 기억한다. 달아올랐던 감각에 비해 마지막이 쓸 데 없이 건조했다는 것도. ‘밤이 너무 늦었네요’라는 그녀 말에 더 이상 내놓을 대답이 없던 순간은 쉬 잊히지 않는다. 그 외에 식탁 위로 수북이 쌓였던 온갖 말들의 성찬은 대개 시간이 집어삼켰다. 오감을 한껏 곤두세운 밤 치고는 망각이 빨랐던 셈이다.


그나마 10년을 버텨 지금까지 그에게 희미하게나마 잔존하는 감각은 오직 냄새뿐이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샹그리아가 코 끝을 간지럽히던 그 냄새. 역시 후각은 쉽게 둔감해지지만 가장 느리게 잊히는 감각임이 분명하다.   


그날 주인장이 직접 만든 샹그리아는 둘의 대화 소재로 연소하기도 했다. 그의 기억으로는 먼저 그녀가 물었던 것 같다.  


샹그리아 마셔봤어요?

터키 여행 때. 그때도 스페인 친구가 만들어줬어요.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요?

아니오. 당신은 만들 줄 아나요?

쉬워요. 와인. 오렌지주스. 넣고 싶은 과일들.

끝인가요?

하루 정도 놔두면 더 맛있어요.     


‘이를테면 숙성이 되는 셈이군요’라고 말을 되받고 싶었지만 그는 영어로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했던 것 같다. ‘언젠가 나한테도 만들어줘요’라고도 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형식적으로 받아들이든 진심으로 받아들이든 다 별로겠다는 생각에 관두었던 것 같다. 다 집어치우고 말 끝마다, 말 중간마다 웃는 그녀를 살피느라 순간적으로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던 것도 같다. 어쨌든 그 정도에서 샹그리아와 관련한 대화는 매듭지어졌을 것이다. 우리에겐 숙성될 시간이 부족했다.    


단 한 잔이었을 뿐인데도 그가 여전히 그 냄새를 잊지 못하는 건, 그래, 그날 샹그리아에 유독 라임이 많이 들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과도 오렌지도 들어 있던 것 같았지만 라임 향이 다른 과일의 존재를 지울 만큼 강했다. 그는 조그맣고 동그란 이 연둣빛 과일이 뭐냐고, 그때만 해도 친숙하지 않던 생김새였기에, 그녀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물론 그녀는 친절히 대답해줬고.


"라임이요. 그런데 보통의 샹그리아보다 유난히 많이 들어간 것 같네요."   


대화가 오가는 내내 샹그리아의 진한 라임향은 둘 사이의 간극을 시큼달달하게 메워주었다. 마치 코로 듣는 배경음악처럼. 그가 들뜬 손목을 나부대며 잔을 계속 빙빙 돌리니 향이 잔 밖으로 더 퍼졌을 것이다. 음료가 거의 바닥을 보인 뒤로는 그는 반으로 잘린 라임을 스터로 꾹꾹 눌러서 즙처럼 짜냈다. 한 방울이라도 마실 게 더 남아 모래시계가 멈추지 않기를 바라면서. 라임은 대화 소재로, 향기로, 즙으로 긴긴밤 번갈아가며 그의 편을 들어준 셈이다.     


그날 이후 그는 라임이 들어간 음료를 수 년째 즐기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라임향을 맡을 때마다 조건반사처럼 말라가의 깊었던 밤을 재생한다. 집에서 직접 샹그리아를 만들어 마시기도 하는데 늘 레시피보다 라임을 한두 개씩 더 넣은 뒤 하루쯤 숙성해둔다. 그녀의 몫. 아니 그녀를 만났던 밤의 몫. 아니 그녀에게 지워지고 외톨이가 되었을 가엾은 기억의 몫으로.   


다시 10년 전의 홀린 밤, 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헤어졌다.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녀는 기차역으로 향했고 그는 남았다. 사실 그에게는 부자연스러울 기회가 있었다. 날 위해 너의 다음 여행지를 변경해줄 수 있니?     


..라고 전날 밤 서로에게 조심스레 물었고, 둘 중 누구도 계획을 바꾸지 않기로 했다. 물론 그가 바꿀 수도 있었다. 그는 그러지 않았다.    


동행을 포기한 두 사람은 현관 앞에서 마주 보고 웃었다. 서로 더 씩씩하려 애썼을 것이다 - 적어도 그는 그랬다. 잠시나마 그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려던 그녀의 뒷걸음질이 아득했다. 기억에 오래 남을 순간임을 그는 직감했다. 이윽고 그녀가 등을 돌렸고 둘은 각자의 세계로 분리되었다. ‘so long’을 외치던 그의 힘찬 손바닥이 돌아선 그녀의 등 뒤로 힘없이 툭, 떨어졌다. 설렘은, 그는 생각했다, 중력 같아.      


아마도 두 사람의 동행을 포기하게 만든 건 여행일정이 아닌 서로의 현실감각이었을 것이다. 쉽게 들뜨는 마음을 매번 저 바닥에서 중력처럼 붙잡아 끄는 그 단단하고 빌어먹을 감각. 땅을 향해 떨어진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는 그렇게 생각을 매듭지었다. 달려가 그녀를 안을 수도 있었다. 어젯밤을 지샐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저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좀 더 적극적일 수도 있었다. 무엇이든 그럴 수도 있었고 그의 손바닥엔 지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녀의 온기도 감촉도. 기억을 묶어둘 미천한 선물조차도. 그는 악수조차 건네지 못한, 떠난 뒤에야 몹시 간지러워진 그의 손바닥이 싫었다. 어젯밤 어쩌지도 못하고 식탁 밑에서 꿈틀대기나 하던 그의 허벅지 근육들이 싫었다. 그냥 존재 자체가 원망스러웠을 수도 있다.     


홀로 게스트하우스에 남은 밤.


새로운 숙박객들이 들어왔고 거실은 개비된 설렘들로 다시 밤늦도록 시끌벅적해졌다. 주인장은 공식처럼 샹그리아를 내어놓았다. 생각해보니 어제 말고 그저께도 그랬었지. 그에게 생애 단 한 잔이었던 샹그리아는 이 게스트하우스의 시그니처 음료, 그러니까 이곳을 들르는 모두가 마시는 보편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그날 밤도 주인장은 그에게 한 잔 권했다.      


“우리 집에선 이걸 마셔야 해요. 이곳 말라가의 와인과 오렌지로 직접 만들…...”     


그는 웃으며, "오늘은 괜찮아요"라고 말을 끊었던 것 같다.      


여기저기 잔 부딪히는 소리가 거실을 메웠다. 각자의 유리잔에 갇힌 붉은 물결이 한 차례 넘칠 듯 출렁이다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결론은 무엇도 넘치지 않았단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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