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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Dec 21. 2019

인생을 '초기화' 해볼까?

<인생 리셋 프로젝트>


‘인생 리셋’을 꿈꾸곤 한다. 꽤 오래된 바람이다.


이를테면 마흔 살, 혹은 마흔다섯 살 정도부터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보는 거다. 서울 말고, 이 직업 말고, 이 회사 말고, 이 이름도 말고. 가족을 제외하고 나와 관계 맺어온 모든 이들 역시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완벽히 초기화된 삶을 처음부터 시작해보는 것. 가족은 서약도 있고 일종의 채무관계 같은 책임감도 있으니 초기값이다.


인생 리셋을 꿈꾸는 까닭은 여러가지다.


먼저 개과천선의 심리가 있다. 나는 기질이 사납고 불순해 못된 짓을 몰래몰래 많이 하며 살아왔다. 순정한 을 스스로 더럽힌 느낌이지만, 그에 비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은 또 너무 많다. 본래의 나를 잘 감추고 살아온 덕분일 거다. 게다가 나는 사회적 혜택까지 꽤 누리며 자라왔다. 남자였고, 강남 살았고, 경상도 집안에, 괜찮은 학벌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자라면서 공정과 정의를 학습할수록 죄책감이 든다. 나 같은 사람이 호사를 누리며 사는 건 불공정하다는 걸 깨달아 가면서도, 타파의 대상이 ‘나'이기에 그냥저냥 합리화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얼룩진 인생을 백지화하고 초기화된 새 삶으로의 탈출을 꿈꾼다. 이런 나쁜 나에게 속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더 이상 속이지 않는 삶. 생의 두 번째 도화지는 더럽히지 않는 삶. 정의를 배울수록 죄책감 대신 만족감을 느끼는 삶 말이다.


또 다른 이유로, '과하게 연결된 사회'에 염증을 느낀 탓도 있다. 사실 이게 가장 크다. 예전에는 사회적 관계에 얽히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그런데 늙어간다는 조급함 탓인지 지금은 나에게 뭐라도 제공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1초도 뺏기기 싫다. 영감을 제공해주면 가장 좋고, 편안함, 사랑, 지식, 업무 방식, 하물며 옛 추억이나 재미라도 제공해주는 사람과만 시간을 보내고 싶다. 쉽게 말해 책이나 영화나 음악 같은 사람. 그런데 사회생활이란 그렇지 않다. 한 모임 안에도 그런 사람과 아닌 사람이 섞여 있으니 칼로 자르듯 나누기도 어렵다. 게다가 대개는 이해관계를 위한 의도적인 관계맺음이 다반사다. 그래서 다 떠나버린 뒤 인간관계를 초기화 하고 싶을 때가 많다. 아까운 사람도 버려야 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사실 지난해부터 업무 외의 단체카톡방을 끊은 걸로 소소하게 실천하고 있긴 하다.


마지막으로, 외로움을 동경한다. 미친 소리 같지만 진심이다. 37년간 딱히 외롭지 않게 살아왔다. 가족, 연인, 친구들이 도와주었을 것이다. 가지지 못한 것만 바라보며 사는 게 인간인지라, 나 역시 외로움만이 인간에게 선물하는 재능과 감수성을 몹시 질투하며 살아왔다. 그걸 얻기까지 그들이 견디었을 무자비한 시간들을 조금이라도 흉내내 보고 싶었다. (혹시 그런 분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부끄러울 뿐이다.) 그동안 제법 행복하게 살아왔기에, 이러다가 초기화될 삶이 지독하게 외롭게 끝나더라도 눈 감는 순간에는 균형잡힌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선택한 거니까.


그래서 이런 이유로, 나는 해낼 수 있을까? 인생 리셋을.


자신이 없다. 99%는 실현 불가능한 얘기 같다. 그러니까 이런 꿈이라도 꾼다는 걸 과시하려고 여기 글로나 적고 있겠지. 하지만 100% 불가능은 아니다. 아직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상상의 시기가 계속 미뤄지거나 당겨지고 있을 뿐. 마흔에서 마흔 다섯으로, 최근에는 반백년의 새 시작인 쉰 살로 조금씩 늦춰볼까 하다가, ‘이러다 말겠다'는 두려움에 다시 마흔두세 살쯤으로 확 당겨지는 식이다.


이 원대한 계획에는 두 가지 변수가 있다. 먼저 '그래서 뭘 할 건데?'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아직 구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게 많아서 무언가를 선택하기가 도리어 버겁다. 늦깎이 나이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거나, 마을을 기획하는 사람이거나, 글 써서 돈 버는 사람이고도 싶다. 이것 말고도 좀 더 있지만 결국에는 이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초기화된 인생에서도 선택받지 못한, 포기된 나머지 '하고싶음'들은 영원히 현실의 영역 밖으로 증발해버릴 것이다. 그게 못내 아깝다.


또 하나의 변수는, 이게 더 큰 골칫거리인데, 내 삶에 찰싹 들러붙은 게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저히 떼어내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뭐 그런. 예컨대 빚을 왕창 내어가며 서울에 겨우 장만한 집도 그렇고, 기자질 하며 쌓은 노하우들도 그렇고, 특히 사람이 그렇다. 초기화된 새 삶에서도 꼭 함께 하고 싶은 인간들이 자꾸만 늘어난다. 이를 어쩌지 싶으면서도 그 사람들만은 꼭 나를 붙잡아주었으면 하고 상상한다.


첫 번째 변수야 내가 선택하면 될 일이고, 두 번째 변수는 결국 적당한 수준에서 상상 속의 타협을 봐야 했다. 그래서 명단을 작성하기로 했다. 새롭게 바뀔 내 연락처와 주소를 몰래 건네고 갈 사람들의 명단. 노아의 방주처럼 새로운 세계로의 항해를 함께 하진 않더라도 언제든 나의 새 삶으로 찾아와주면 반갑게 맞이할 사람들 말이다. 어느날 밤 문득 찾아와, 초기화된 삶을 과거와 연결해주고 돌아갈 사람들.


한 2년 전쯤, 그러니까 2018년 1월의 어느날. 회사에서 큰 사고를 치고 방구석에서 숨어 지내면서 그 사람들의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죄책감에서 탈출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 그랬을 수도 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할 비밀노트지만 나름대로 엄격한 기준을 두었다. 먼저 나와 관계를 맺은 지 최소 만 3년이 지나야 한다. ‘나를 얼마나 좋아해주느냐’는 관계 없다. 일방적일지라도 내가 몹시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in. 결정적인 조언이 필요한 순간 나를 구원해줄 스승 같은 사람도 in. 내가 유형무형의 빚을 져서 몰래 떠나면 사기죄가 성립하는 사람도 in. 거기에 별 이유도 없는데 도저히 안 적고는 못 견디겠는 사람까지 in.


‘나의 방주' 최초 목록에는 그렇게 00명이 적혔다. 전화번호 연락처를 밤새 내려가며 추린 목록이다. 그리고 2년 가까이 흘렀다. 그 사이 몇 명이 더 적혀 지금은 목록이 더 두툼해졌다. 그들은 내가 버림 받더라도 도저히 먼저 버릴 수는 없을 만큼 매력적이며, 나를 동시에 알고 있는 어느 누구에게도 내 근황을 전하지 않을 만큼 무거운 사람들이다. 떠나더라도 언젠가 단 하루라도 그들과 함께하는 밤을 다시 맞이하고 싶다. 그러지 않고는 내가 너무 힘들 것 같다.


상상은 여기까지. 또 현실로 돌아온다.


물론 지금 이대로 살 확률이 여전히 99%다. 그러나 여전히 지금의 생이 무겁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탈출의 그날을 그린다. 시공간이 리셋되고, 블랙홀 너머의 세계에서 발가벗고 시작하는 새 삶. 울고픈 사람 뺨 때려줄 동기라도 있으면 ‘이 때다’를 외치며 떠나기를 꿈꾼다. 시간이 흐를수록 실현 불가능성이 99%에서 100%로 수렴해간다는 걸 알기에 조급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방해꾼들' 역할을 하는 그 두 가지 변수들이 시나브로 뚱뚱해지는 게 가장 큰 일이다. 현실에 엉켜 살아갈수록 '하고 싶은 일' 목록도, '나의 방주' 명단도 자꾸 비대해져만 간다. 결국엔 그들을 핑계 삼아 내 발목을 스스로 붙잡을 것만 같다. '에이씨, 너무 많아. 다 포기하고 그냥 이 사람들이랑 이 일 하면서 살자' 이러고 말 것 같아서. 그 무엇에든 이제, 그만 좀 정 줘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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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뭔가 ‘이 글을 읽고 당신만의 방주 명단을 작성해보세요’...를 덧붙여야 할 것만 같다. 창의력마저 주입하던 중등교육의 잔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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