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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Nov 02. 2018

요즘 나는 철 모르는 소확행에 빠져 있다

'퀸보이'였던 아저씨의 <보헤미안 랩소디>


(2018년 10월29일 글.)


#합주실 복도


열여섯 살, 그러니까 중딩의 마지막 여름이었다.


줄줄 땀을 쏟으며 합주실 건물 앞에 다다랐다. 더위를 타는 체질에 무거운 전자기타까지 메고 있던 탓이다. 그래도 버스값 아끼려면 서너 정거장 거리는 고민도 없이 걸어다니던 시절이었다. 월수금 매주 세 차례, 매번 똑같이 땀을 쏟으며 이곳에 ‘출첵’했다. 물론 땀보다 열정을 더 쏟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뮤직 이즈 마이 라이프. 아무도 나를 억압하지 않았지만 나는 짓눌려 있었다. 날 가둔 사람이 없는데 혼자 음악을 해방구 삼아 살던 때였다. 이름까지 저항으로 똘똘 뭉친 밴드 '어게인스트'의 기타리스트. 지독히도 사춘기를 겪던 나의 가장 근사한 옷이자 정체성이었다. 합주 연습이 게임보다 연애보다 좋았다. 헤드폰을 끼고 전자기타를 멘 모습이 내가 봐도 얼마나 폼 나던지. 건물 유리문으로 비치는 내 모습을 잠시 감상한 뒤 문을 열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다. 4층에 천국이 있다. 귀를 파고드는 드럼 소리에 심장이 울린다.


2층쯤 올라갔을 때 걸음을 멈춘다. 헤드폰을 빼고 가방에서 CD플레이어를 꺼낸다. 뚜껑을 열고 듣고 있던 퀸의 앨범을 뺀다. 메탈리카나 머틀리크루, 슬레이어 따위의 CD로 바꿔 끼워넣는다. 뚜껑을 덮는다. CD플레이어 재생 버튼을 누른 뒤 헤드폰을 끼고 다시 계단을 오른다.


반복되는 루틴이었다. 합주실 건물 2층과 3층 사이의 복도는 듣고 있던 CD를 교체하는 나만의 작업실이었다. 합주실에는 형들이 있다. 내가 졸졸 따르던, 나보다 기타를 여섯 배쯤 잘 치고 열여섯 배쯤은 멋있는 형들. 밴드 이름도 우리보다 쿨한 '성동구치소'의 멤버들(우리 합주실은 성동구치소와 멀지 않았다). 그들에게 인정받으려면 더 강렬한 음악을 듣는 후배여야 했다. 헤비메탈, 데쓰메탈, 하드코어 펑크. 스피커를 찢고 나올 듯한 파괴적인 기타 리프만이 우리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자극적인 모든 것에 취하던 나이였다. 합주실 문을 열었다. 형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형석이 왔니?

네, 안녕하세요.

뭐 들어?

슬레이어요.

오, 제대론데?

감사합니다.


귀에서 헤드폰을 뺐다. 쿵쾅 소리가 먼 데까지 새어나왔다. 헤드폰으로 듣는 음악이 적어도 1m 밖까지는 울려퍼져야 ‘좀 들을 줄 아는’ 리스너였다.


#퀸보이


고백컨대 나는 그런 음악들에 질려 있었다.


음악을 사랑했지만 미친 속주나 파열음 따위는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극단의 강함과 빠름이 ‘쿨내’의 기준이었던 세계에 몸담고 있었을 뿐이다. 데스메탈과 익숙해지기 위해 반복적으로 귀를 열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소리들을 내 심장까지 데려오는 데에는 실패했다. 중딩의 마지막 여름, 내가 한창 빠져 있던 뮤지션은 따로 있었다. 7080세대 록그룹 ‘퀸’이었다. 초딩 때 서태지, 이전 해까지 커트 코베인이 지배했던 내 정신세계의 새로운 주인이었다. 나는 퀸의 보컬인 프레디 머큐리와 플라토닉한 사랑에 빠져 있다고 믿었다. 그의 고향이 영국? 나중에 꼭 갈 거다. 그가 동성애자라고? 그럼 동성애자 앞으로 인정하지 뭐. 그가 에이즈로 죽었다고? 그럼 에이즈환자에도 관심을 가져볼까. 이런 식이었다. 그는 나에게 노래를 떠먹여줬지만, 나는 그의 인생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퀸은 내가 존경해마지않던 합주실 형들에겐 달갑지 않은 밴드였다. 맥 없는 사랑노래나 불러대는, 메탈정신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음악을 대중 따위에게나 들려주는 약해빠진 록밴드일 뿐이었다. 아끼는 동생이 그런 가짜 음악을 듣고 있다는 걸 알면 화를 내거나 무시의 눈초리를 보냈을 게 빤하다. 내가 나만의 작업실,  2층과 3층 사이의 복도에서 매번 CD 교체 작업을 벌였던 이유다. 나는 퀸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때론 보여주기 싫을 때가 있으니까. 세상이 그를 원하지 않는다면. 집에서, 거리에서, 나 혼자 있을 때 충분히 사랑해주면 되지 뭐.


사실 우리집엔 퀸 앨범이 열 장도 넘게 있었다. 용돈을 모으거나 때로는 엄마 지갑에서 돈을 훔쳐 사 모은 애장품들이었다. 나는 그 CD들을, 선생님 눈을 피해 서랍에서 불량식품을 꺼내 먹는 학생 마냥 남몰래 꼭꼭 씹어 삼켰다. 몰래 먹는 불량식품이라 맛이 더 좋았을까. 그들의 라이브 실황 비디오도 청계천 복제품 상가에서 큰 돈 주고 구했다. 물론 부모님에게도 형들에게도 들키지 말아야 했다. 엄마가 외출할 때마다 그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면서 땀 같은 눈물을 줄줄 쏟았던 것 같다. 그들처럼 되고 싶어서. 그들처럼 되지 못할 것 같아서.


내가 퀸에서 벗어난 건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였다. 역시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는 법이다. 뜨거웠던 고딩의 첫 여름에는 다른 싱싱하고 핫한 밴드들, 라디오헤드와 스매싱펌킨즈의 노래들에 푹 절여져 있었다. 해가 지나도 여전히 더위를 잘 탔지만, 땀보다 깊이 흡수되는 건 역시 음악이었다. 다만 내가 빨려든 음악의 생산자가 좀 젊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해 늦가을부터는 이화여고 연합동아리 학생과 첫사랑에 빠졌다. 사랑을 사람과 하기 시작하니 음악은 멀어졌다. 음악은 단지 그 아이에게 잘 보이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록스타의 꿈을 접은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퀸보이의 귀환


20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평범한 대학생이 되었고, 순순히 군대를 다녀와서, 남들 다 하는 결혼을 하고, 보통의 월급쟁이이자 5살 아이의 아빠로 살고 있다. 삶은 어릴 적 기대와 달리 격동하지 않았다. 지독했던 사춘기가 그나마 화석처럼 존재를 고증하고 있다면 그건 내가 저항의식을 요구하는 직업을 가졌다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아무튼 학창시절 꿈꿨던 ‘록스러운’ 인생과는 거리가 먼 일상인 것만은 분명하다.


역사적인 무더위라던 2018년 여름이 지나고 벌써 늦가을이 다가온다. 요즘 나는 철 모르는 소확행에 빠져 있다. 21년 전, 그러니까 열여섯 살 중딩의 마지막 여름이 내게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는 까닭이다. 죽었던 프레디 머큐리가 되살아왔다. 그의 밴드 퀸이 잠들었던 나를 덮치려 한다. 그들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보헤미랩소디>가 개봉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불과 열흘 전.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다 네이버 광고를 보고 말았다. 그 순간부터 나는 성탄을 앞둔 어린아이와 같았다. 거의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튜브로 퀸의 옛 공연들을 돌려봤다. 땀보다 음악에 대한 열정을 더 쏟던 어린 날이 눈 앞에서 밤새 재생됐다. 불 꺼진 좁은 안방을 얼마나 빙빙 돌았는지 다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 날 밤 이후 지금까지 나는 시간 여행자가 되어 있다. 매일 출퇴근길 퀸의 노래들을 돌려 듣는다. 직장인이 된 이후 잊고 살았던 곡들이다. 물론 이제는 건물 복도에서 음원을 몰래 바꿔 재생한 뒤 사무실로 들어서지 않아도 된다. 헤비메탈 류의 음악은 21년 전 겨울, 합주실을 떠나며 재생목록에서 완전히 삭제됐다. 최근 성동구치소가 이전하고 그 부지에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뉴스를 봤다. 존경하던 형들은 어디서 잘 살고 계실까. 여전히 퀸을 무시하시려나. 그래도 좋은 형들이었는데. 영화 개봉일인 31일 저녁 영화표도 끊어놨다. 몇 년 만에 가는 영화관이다. 게다가 살다가 처음 아이맥스 극장엘 가게 생겼다. 머리 위에도 스크린이 있을 정도라는데 무식하게 앞자리를 예매했다. 단지 영화보다 콘서트 보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난 프레디의 라이브 무대를 볼 기회를 태생적으로 박탈당한 불행아다. 그는 내가 그를 알기 5년 전 죽어버렸으니까. 런던 여행을 갔을 때 앞뒤 잴 것 없이 <위 윌 록 유> 뮤지컬(퀸의 노래로 만든 뮤지컬)을 관람한 것도 ‘퀸 라이브’에 대한 태생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생각만큼 대리만족이 되진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번에 조금이라도 더 채워졌으면.


무엇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설레는 느낌이 좋다. D-DAY를 하루씩 지워내는 맛이 이토록 달콤하다니. 내일이면 정확히 이틀 남았다. 나의 열여섯 살이 다가온다. 열여섯.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였던, 그 너머의 세상은 전해들은 적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끝이라는 게 없이 모든 게 시작으로만 가득했던, 그게 행복인줄도 몰랐으면서 용케도 행복했던 나이. 세상 모든 저항을 농축했던 밴드 '어게인스트'의 자랑스런 기타리스트로서, 오로지 직진이었던 그 때의 발걸음으로 경쾌하게 퀸을 만나러 가야겠다. 너희를 사랑한다고 합주실 형들한테 말 못해서 미안했다고, 이듬해에 라디오헤드*스매싱펌킨즈랑 바람나서 미안했다고 전해줘야지. 지나고 보니 역시 너였다고, 너가 최고였다고도 꼭 말해줘야지.


이틀만 참으면 된다.

아이 윌 록 유.

유 윌 록 미.

11월 1일부턴 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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