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명절
7년 전 일이다. 어머니가 집안을 뒤흔들 선언을 했다. 결혼식을 앞둔 예비 며느리에게 "머지않아 제사를 없애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종가였던 우리집은 두 번의 명절을 포함해 1년 중 일곱 차례 제사를 지내왔다. 전통이 견고한 집안이었던 만큼 어머니의 선언은 구성원들이 발칵 뒤집힐 법한 '대형 사건'이었다.
시간을 되돌려 보면, 서른 해가 넘도록 우리 집안의 명절은 데자뷰처럼 되풀이됐다. 엄마와 숙모들과 누나와 사촌 여동생들이 제조업 공장처럼 부엌에서 음식을 생산해내면 아빠와 삼촌들과 나와 사촌 남동생들이 받아먹었다. 그 음식들은 제사상에도 진열되었고 대화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누가 편을 나눈 것도 아닌데 남성과 여성은 밥상도 따로 차려서 먹었다. 다 먹고 나면 남성들은 TV 앞에 앉았고 여성들은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런 체계에 대해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고, 덕분에 서른 명 가까운 대가족이 한 데 모여도 늘 별다른 잡음 없이 화기애애했던 것 같다.
남성인 나는 그런 명절의 기억이 나쁠 리 없었다. 특히 7남매의 맏이인 아버지는 한결같이 모이는 동생들 가족을 바라보며 티 나게 흐뭇해하셨다. 명절 때마다 아버지 얼굴에 번지던 고유한 표정을 나는 알고 있다. 젊은 시절, 장남의 책임감을 등에 업고 혈혈단신 서울로 올라와 터를 잡으신 아버지. 여섯 동생들을 차례로 집으로 불러들여 공부시키고, 취직시키고, 결혼시키며 장남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해냈던 아버지에게 온가족이 한 데 모인 풍경이란 평생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자 훈장이었을 것이다. 그 행복을 뺏기 싫어서라도 우리의 명절은 계속 되어야 했다.
종가의 며느리였던 어머니에게도 명절은 가장 큰 연례행사였다. 채솟국, 고깃국, 콩나물국. 국 종류만 세 개를 끓여야 했고, 가자미와 조기 등 서너 종류의 생선을 쪘다. 전도 대여섯 종류 부쳤다. 그 뿐이겠는가. 소고기를 구워 간장에 절이고 어른 얼굴만한 닭고기와 그보다 큰 문어를 삶고 조율이시(대추, 밤, 배, 감)를 정갈하게 깎았다. 이 모든 음식을 서른 명이 넉넉히 먹을 양만큼 생산해내야 했다. 명절 전날 저녁 숙모들이 오셔서 도와주긴 했지만, 엄마의 명절공장은 이미 사나흘 전부터 외롭게 가동되고 있었다. 종가의 며느리로서 임무를 수행한 뒤 엄마에게 돌아오는 훈장이란, 친척들이 이틀을 머물다 가며 건네는 ‘고생하셨다'는 말 한 마디 정도였다.
명절 내내 환한 얼굴로 친척들을 반긴 엄마의 고통은 그들이 떠난 뒤에 찾아왔다.
수십 년째, 엄마는 명절을 쇤 직후 어김없이 며칠씩 앓았다. 그런 엄마에게 고생했다며 어깨를 주물러드리는 정도가 내가 건넨 최대의 호의였다. 앓는 일이 되풀이되면 원인을 찾아 치료하면 됐는데. 그 원인은 불 보듯 뻔한데. 우리 가족은 그걸 외면했다. 그저 엄마에게 예정된 병이 찾아오면 의미 없는 위로만 건네는 과정을 수학 공식처럼 반복했다. 신기한 사실은 친척들이 떠나기 전까지는 어머니가 절대 앓지 않았다는 거다. 아마도 책임감 때문에 앓는 일조차 미뤄뒀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와서야 엄마의 고생이, 그리고 좁은 부엌에서 오직 여성들만 복작복작 모여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풍경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부엌일을 나누겠다며 일어나면 소파에 누워있던 다른 남성들이 죄인이 될 터였다. 대가족의 질서에 균열을 내는 일은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고백컨대 용기보다 의지가 더 부족했다. 소파에 누워 얘기만 나누면 되는 ‘편한 명절'을 스스로 포기하기가 너무 귀찮았다. 그렇게 악습은 나를 포함한 다음 세대로 전염되고 있었다.
그 전염병에 백신을 뿌린 건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10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 어머니는 집안의 대모가 됐다. 그 후로 가끔 설거지를 삼촌들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그 빈도는 명절을 쇨수록 잦아졌고, 점차 설거지에서 집안 정리, 청소까지 남자들이 해야 할 영역이 늘어났다. 어머니의 지시에 삼촌들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나를 비롯한 모두가 어머니의 고생을 빤히 보면서 수십 년을 모른 체했던 공범자들이었기에, 아무도 다른 소리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7년 전, 결국 어머니는 당신이 일흔 살이 되는 해까지만 제사를 도맡아 지낸 뒤 이 지긋지긋한 전통을 끊겠다고 공언하셨다. 새식구가 될 며느리에게도 더 이상 제사 음식을 배울 필요 없다고, 명절 때 놀러오면 왔지 음식 만들러 오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엄마에게 명절은 평생의 신경통이었을 것이다. 할머니에게 구박받던 기억, 남자들의 무관심, 매번 아플 걸 알면서도 온몸을 구부려 전을 부쳐야 했던 희생정신까지 다음 세대 여성들에게 대물림하고 싶진 않은 듯 했다.
어머니의 결심에 집안이 들썩할 법 했지만 누구도 반기를 들지 못했다. 앞서 아버지가 장남으로서 여섯 동생을 공부시키고 취직시키고 결혼시켰다고 했지만, 정작 그 임무를 실행한 건 어머니였을 것이다. 20년 가까이 여섯 시동생을 차례로 집에 불러들여 밥해 먹이고 옷과 이불을 빨아주던 건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였으니까. 당연하게도 어머니는 삼촌들에게 형수보다는 ‘제2의 엄마’ 같았을 테니, 그 누구도 어머니를 말릴 생각도 자격도 없을 것이었다.
올해로 엄마 나이 예순여덟. 이제 2년 뒤면 100년은 족히 이어왔을 제사 문화가 우리 집안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덕분에 종가의 7대 종손인 나의 임무도 180도 바뀌었다. 제사를 이어받아야 할 의무에서 해방되는 대신, 제사 없는 명절을 어떻게 잘 보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됐다. 일단 모두 모여야 하는 문화부터 고치고 싶다. 함께 있는 풍경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이 누군가의 순종으로 빚어지는 시대와는 이별할 때다. 친척들이 다 모일 때만 아버지 얼굴에 번지던 고유한 미소는 더 이상 보기 힘들지라도 어쩔 수 없다. 어머니의 병과 맞바꾸던 미소라면 포기하는 편이 나을테니까.
종손으로서, 아니 엄마의 아들로서 내가 기획해야 할 새로운 명절의 풍경은 단명하다. 누군가 일할 때 동시에 누군가는 소파에서 TV를 보는 기이한 불균형 따위는 옛이야기로 박제될 명절. 모두가 만족하지는 못하더라도 누구도 불행하지 않은 명절 말이다.
엄마 나이 일흔까지, 이제 2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