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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Nov 26. 2018

옛 습관을 불렀다

베트남 달랏 / 나를 만나달랏



여행의 습관이 변했다.


나이를 먹어서일까. 일상을 과식해서일까. 언제부턴가 체한 사람처럼 소화하기 힘든 무언가를 속에 잔뜩 담아두고 꺼내지 못하는 여행자가 되어버렸다. 예컨대 여행하면서 말이 사라졌다. 발은 여전히 부지런한데 뭐랄까, 입이 게을러져 낯선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지 않기 시작했다. 대화가 에너지를 충전하는 게 아니라 소비하는 일이라 여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저 남의 삶이 덜 궁금해진 탓일 수도 있다. 게다가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을 알아가는 일은 비효율적이다.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는 데 비해 내게 도움 될 확률이 너무 낮다. 어차피 다른 땅을 밟고 사는 사람들 아닌가. 폭넓게 보면 새로운 대화로 삶을 확장하거나 다질 가능성도 있지만, 나는 이미 바쁜 삶에 길들여졌다. 조급함은 시야를 좁힌다. 바쁜 사람은 가능성이 아닌 확실성에 움직인다. "대화로 새로운 영감을 얻을 가능성이 있어"라는 명제는 그래서 더 이상 내게 매력적이지 못하다.


이렇듯 사람을 향한 호기심은 뭉툭해진 데 비해 마음 속 고민은 갈수록 뾰족해지다 보니, 대부분의 질문이 타인 아닌 나에게로 수렴했다. 여행길에서 새로움에 허기를 느끼기보다 숙제처럼 쌓아둔 내면의 문제들을 정리하는 편이 나았다. 그게 효율적이니까. 그러다 보니 여행의 빈틈을 채워주었던 낯선 길벗들과의 시시하고 사랑스러운 추억거리는 메마르기 시작했다. 대신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두텁게 쌓였다. 내게 여행은 남이 아닌 나를 만나는 과정이 되어버렸다.

세상 모든 이치가 그렇지만 여행 습관이 달라지면서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있다. 서툰 길에서 나를 반성하고 깎아내리는 데 집중할 수록 일상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의 내면에 세밀하게 다가갈 수 있었지만, 그러는 사이 처음 만난 이의 이야기를 달여 담던 어린 귀는 녹이 슬고 말았다. 무거워진 입 속으로 간간이 차오르는 호기심을 삼킬 땐 제 몸 가누지 못하는 노인 마냥 무기력을 느꼈다. 인생은 한창 여름인데 여행은 저녁 같았다.


습관은 내가 자라나는 증거다. 손톱처럼 잘라내기도 힘들다. 바뀐 습관으로 몇 차례 여행을 하고 난 뒤였고, 나는 이번에는 다르게 여행해보기로 했다. 습관적이지 않은 여행, 옛 습관을 소환하는 여행 말이다. 뚜렷한 이유는 없지만 달라진 내가 좀 지겨웠고, 예전의 나로 돌아가보고 싶었다. 내면을 성찰하기보다 누군가에게 귀를 여는 일. 처음 본 풍경보다 처음 본 사람에게 집중하기. 그런 여행이 첫사랑처럼 문득 그리워졌다. 나는 큰 줄기를 그린 뒤 간단한 계획을 세웠다.


베트남 달랏으로 가는 비행기표부터 끊었다. 해발 1,500m에 있어 사계절이 변덕을 부리지 않는 도시. 영원한 봄의 도시. 우기가 한창이었지만 상관 없었다. 2018년 서울의 지루한 더위보다야 나을 것 같았고, 어차피 풍경이 아닌 사람에 천착하기로 했으니까. 숙소는 저녁을 함께 차려 먹는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도시 외곽 한적한 호수가에 있는 자연 친화형 숙소였다. 달랏대학교에 한국어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무턱대고 해당 학과 교수님을 찾아 이메일을 보냈다. 글을 쓰고 싶은데 베트남 한국어학과 학생들을 소개해달라고 부탁드렸다. 드릴 건 없고 학생분들 식사를 잘 대접하고 좋은 글로 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구글 검색으로 달랏에 사는 사람들에 관한 텍스트를 틈틈이 챙겨 읽었다. 떠나는 날 마음가짐도 좀 달랐던 것 같다. 누구든 궁금해하자. 말을 걸고, 관찰하자. 호기심 근육이 울퉁불퉁했던 예전의 몸으로 잠시 돌아가보자. 다짐을 글로 풀자면 이런 식이었다. 의미심장하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러운 생체의 리듬이, 바뀐 여행 습관을 한 번쯤 거스를 때라고 일러주는 것 같았다. 다만 이렇게 ‘준비를 해가는’ 여행은 꽤 오랜만이었다.


나는 떠났고, 옛 습관을 소환한 여행은 시작되었다. 닷새를 머물렀고, 넘치지 않을 만큼 정다운 기운으로 여행의 마침표를 찍었다. 닷새간 맡은 사람냄새는 여기 차차 묻혀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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