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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Nov 26. 2018

베트남인들이 말하는 남쪽나라 북쪽나라

베트남 달랏 / 나를 만나달랏


해발 1,500m, 인구 40만 명의 도시에 한국어를 전공하는 대학생이 700명이나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달랏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다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이다. 최근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에 많이 진출하며 한국어 학습 열풍이 불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 적은 있다. 그래도 제조업 공장 하나 보이지 않는 고산지대 소도시에 굳이 한국어학과 학생들이 이렇게 많다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달랏대학교 학생들인데, 알고 보니 학생 수로는 베트남 전역에 있는 한국어학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이 학생들과 말을 나눠보고 싶어졌다. 한국어를 왜 배우는지, 한국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묻고 싶었던 게 아니다. 다만 한국말을 잘 하는, 그래서 가장 수월하게 소통할 수 있는 베트남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야 그들의 이야기를 내가 가장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그저 그들에게 베트남 사람들과 달랏이라는 도시, 그리고 그들 자신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물론 한국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빠질 수야 없겠지만, 그런 건 더 궁금한 무언가를 듣기 위한 마중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무작정 캠퍼스에 찾아가볼까 싶었지만 방학기간이었다. 마침 달랏대학교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파견한 우리나라 교수님이 계셨다. 이메일을 보내 인사드리고, 학생들을 잠시만 만나게 해줄 수 있는지 여쭈었다. 여행책을 쓰려 한다고, 그들의 이야기를 한 페이지라도 담고 싶다고 부탁드렸다. 교수님께서는 흔쾌히 응해주셨다. 졸업을 갓 했거나 앞둔 친구들 중에 나와 만나길 원하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겠다고 했고, 곧이어 두 사람을 소개시켜주셨다. 아무것도 드릴 게 없었는데 내 뜬금 없는 요청에 응답해주시고 애써주신 김진호 교수님께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린다.


시내에서 머문 첫 번째 저녁이었다. 스쿠터를 타고 약속된 식당에 이르니, 두 사람이 한쪽 구석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한 눈에 봐도 교수님이 소개시켜준 분들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 식당에서 마주보고 앉아있지 않은 일행은 그들뿐이었으니까. 두 사람의 이름은 희빈과 응우엔이었다. 희빈 씨는 원래 베트남 이름과 가장 발음이 비슷한 한국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갓 졸업을 하고 달랏에 있는 한국 원예업 회사에서 통역을 맡았는데, 직장에서도 ‘희빈’이라고 부른단다. 이름뿐 아니라 생김새며 발음이며 한국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알고 보니 1년간 한국에서 어학연수를 받기도 했단다. 옆에 앉아있던 응우엔 씨는 아직 졸업을 하지는 않았지만 방학을 맞아 인턴십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다. 역시 한국 회사였다. 곧 사회에 발을 내디딜 사람이라곤 믿기 어려울 만큼 앳된 외모의 학생이었다. 각자 저녁을 해결하고 온 뒤여서 우리는 커피 석 잔을 앞에 두고 담소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 요청으로 마련된 자리인 만큼 그들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으면 하는 의무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들 역시 내게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 할지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다. 서로의 시간에 대한 책임의식이 테이블에 무겁게 내려 앉았다. 그 무게가 견디기 힘들어 처음 20여 분 가량은 내내 그들에게 죄송한 마음, 괜히 억지로 이런 자리까지 만들었다는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다. 애써 웃으며 ‘편하게 얘기하자’고 거듭 말했지만, 그 말은 우리가 불편한 공기를 나눠 마시고 있다는 걸 일깨워줄 뿐이었다. 그래도 선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는 늘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풀어지기 마련이다. 어느새 나는 무거운 책임감에서 해방되었고, 비로소 두 귀를 활짝 열었다. 그들의 표정과 입술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그 후로 우리의 대화는 세 시간 가까이 끊이지 않았다.



가장 흥미롭게 들은 건 베트남의 남북 갈등에 관한 이야기였다. 달랏은 남부지방인데, 그들은 둘 다 이곳에서 1,400km 이상 떨어진 북부 지방 출신이었다. 희빈은 수도 하노이 인근 마을에서 열 살까지 살다가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달랏으로 건너왔다. 응우엔은 하노이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뒤 대학 진학을 위해 이곳에 와서 자취 생활을 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50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남과 북의 갈등이 남아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두 지역의 이질감이 전쟁보다 더 깊은 역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뿌리 깊은 이질감이 외세에 의해 견고해지고, 정치화되고,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북부 지방은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의 땅이다. 그렇다 보니 북쪽 사람들이 대부분 정치 권력을 쥐고 있고, 정통 공산주의자들도 많다고 한다. 지리적으로도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두 사람은 그래서 자신들이 살던 북부는 사회 분위기가 보수적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자식교육이 엄격하고, 딸들은 대개 통금시간이 있으며, 애국 의식도 강하다는 거다. 반면 바다에 인접한 남부지방은 예부터 프랑스 식민 시대와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외세가 침략할 때 늘 바다를 통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 속도도 빠르고, 비교적 개방적인 분위기라고 한다.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한 전력 때문에 남베트남 사람들은 여전히 권력과 영향력의 중심에서 배제되어 있단다. 희빈에 따르면 ‘남쪽 사람들’이 TV 드라마나 뉴스에 나오기 시작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다. 2011년에야 남부지방 출신 여성이 베트남 국영방송인 BTV의 뉴스 앵커로 최초 발탁돼 큰 화제를 일으켰다고 한다. 남부지방 출신 남자 앵커는 더 늦어서 2016년이 되어서야 처음 등장했다. 2010년 이전에는 남부지방 배우가 드라마에 출연하면 북부지방 말투로 더빙해서 방송이 될 정도였다고, 희빈은 말했다.


두 지방은 말투와 발음도 다르다. 남쪽 사람들은 북쪽에서 온 사람들이 촌스럽고 고루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말투도 북쪽 억양이 너무 세서 싸우는 것 같다고 느낀단다. 반면 북쪽 사람들은 남부지방을 이른바 ‘근본 없는 곳’이라 생각하며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식민지배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남쪽 지방 사람들과는 자식 결혼도 시키지 않는 북쪽 어른들도 아직 많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물론 우리나라처럼 젊은 세대에 들어서는 그런 차별과 갈등이 많이 사라졌단다. 전쟁을 겪지 않는 세대, 통신과 교통의 발달로 서로 교류하는 세대가 성장하면서 민족을 화학적으로 융화하고 있는 셈이다.



베트남이 최근 경제적으로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이러한 지역갈등은 세대갈등으로도 번지는 것 같았다. 세대마다 겪는 세상이 판이하게 달라진 탓이다. 마치 1980~90년대 변혁의 시기에 우리 사회가 마주했던 복잡한 함수의 갈등들을 쏙 빼닮은 듯 했다. 올해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희빈은 그러한 사회의 변화상을 온몸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급변하는 사회에 대한 전망과 세계관이 세대마다 극명하게 엇갈리는데, 그 간극이 희빈의 가정에도 침투한 것이다. 보수적인 북부지방 출신인데다 군인인 아빠는 회사에 들어간 딸 희빈이 못내 못마땅했다. 애써 공부시켜놨더니 선생님이나 공무원은 안 하고 미래가 불투명한 직장을 선택했다는 거다. 희빈에 따르면 베트남에서는 직업의 귀천이 심하며, 굳이 암묵적이지도 않다. 군인인 아빠보다 식료품 가게를 하는 엄마가 두 배 넘게 돈을 벌지만, 여전히 직업적 우월감은 아빠의 몫이다. 엄마 역시 “나 같이 무시당하지 말고 선생님을 하라”고 희빈을 부추긴단다. 베트남에서 선생님의 첫 월급은 420만 동 정도, 대기업에 입사하면 그 두 배가 훨씬 넘는 최소 1000만 동부터 시작한다는 게 희빈의 설명이다. 몇 년 사이 그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회사원이 된 딸을 못내 안타까워 한다는 거다. 아무래도 사회주의 문화권이다보니 어른들일수록 자본에 대한 거부감이 클 수도 있고,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의미를 더 크게 부여할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희빈은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남부지방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전공으로 외국어를 택했다. 선생님이 되고 싶지 않고, 회사에 들어가는 게 더 전망이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경제 발전으로 월세며 고깃값이며 모든 물가가 다 올라가는 동안에도 선생님 월급은 그대로라고 한다. 부모에게 고귀한 직업이 젊은 희빈에게는 고루한 직업으로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던 건 데자뷰를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그에게, 한국의 가정에서도 지난 수십 년간 비슷한 갈등이 빈번했다고 웃으며 일러주었다.


그는 문득, 그렇다면 어떤 길이 옳다고 생각하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모르는 길을 제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모르겠다고, 알아서 선택하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잠시 고민한 뒤, 그녀보다 십수 년을 더 살아왔다는 초라한 자격으로 이렇게 답했다. 당신의 부모님은 경험이 많지만, 그 경험은 부모님이 살던 과거에 갇혀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 세대는 지금 베트남 사회에 들이닥친 신세계를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세계는 일방통행로였던 길이 갑자기 사거리로 변한 것과 같다. 어른들은 일방통행로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조언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좌회전이든 우회전이든 처음 내딛는 길은 언제나 불안하기 마련이니까. 그렇다고 어른의 경험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다. 종종 시대를 넘어서는 진리를 일깨워주기도 하며, 그것은 삶의 길잡이별이 된다. 결국 어른들의 충고에서 불변의 진리와, 그렇지 않은 걸 구별해내는 게 당신과 우리 젊은이들의 몫인 것 같다고, 그에게 천천히 말했다. 어렵지만 그 선택을 즐기는 건 젊음의 특권이라고. 그가 내 대답에 만족했는지 아닌지, 나는 결코 표정으로 읽어내지 못했다.


응우엔 역시 희빈의 길을 따라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떤 일을 하고 싶냐는 물음에 그는 ‘어떤 일이든 하노이에서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의 고향 말이다. 한국어를 배우며 유학의 꿈도 꿔봤지만, 그에게는 가족이 더 중요했다고 한다. 응우엔의 엄마는 그의 학비를 대기 위해 가족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응우엔은 가족이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걸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세 명의 동생에게 자신처럼 공부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도 어서 하노이로 돌아가 가족을 돌보며 일해야 한다는 거다.

“그럼 달랏은 다시 올 일이 없겠네요?”

나의 물음에 그는 별 미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노이와 달랏은 1,400km나 떨어져 있다. 다시 오기 힘든 곳이라는 걸 그는 직감하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달랏의 사계절 시원한 날씨와 건기의 하늘이 무척 그리울 것 같다”며 웃어보였다.

“옆에 있는 희빈 언니와도 다시 볼 수 없겠네요?”

둘이 대학 때부터 친한 사이라는 얘길 들은 김에, 나는 농담삼아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예상 외로 그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희빈 언니는 정말 좋은 언니지만 아마 보기 힘들 것 같아요. 어차피 우리 학과 친구들은 전부 헤어질 거예요.”

그는 미소를 잃지 않고 또박또박 한국말로 말했다. 눈망울은 반짝였지만 담담한 표정이었다. “슬픈 운명이네요.” 나도 씁쓸하게 덧붙였다. 그의 묘한 미소를 응시하면서, 문득 그도 나처럼 여행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닷새간, 그녀는 3년간 이 도시에 머물 뿐이다. 아무리 여기가 아름답더라도 정착할 수 없는 운명임을 우리는 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다만 머문 시간으로 보나 돌아가야 할 이유로 보나 그의 여행이 훨씬 부러웠던 건 사실이다.



나는 두 사람에게 각각 한국어로 된 시집을 선물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먼 데서 온 낯선 여행객에게 아무 조건도 없이 귀한 시간을 내어 준 데 대한 소박한 감사의 표시이자, 한국어를 배우는 이들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의 결정체였다.


“졸업해도 한국어를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지금처럼 통역 일을 계속 한다면 잊을 일이 없겠지만요. 그저 당신들이 한국어를 잊지 말아야, 먼 훗날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도 지금처럼 편하게 얘기할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는 각자의 스쿠터를 타고 제 갈 길로 헤어졌다. 벌써 밤 10시였다. 비는 지겹도록 내리고 있었다. 비닐 우비를 세차게 때려대는 빗방울보다 더 원망스러웠던 건 시간이었다. 밤이 늦어 레스토랑이 문을 닫지 않았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더 길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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