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당시 ‘뉴타운'이었던 송파에서 초*중학교를 나왔던 나는 고등학교를 강남 한복판으로 배정받았다. 입학하고 보니 같은 학년 친구들 중 대략 3분의 1은 청담동*압구정동에 살았고 3분의 1은 대치동, 나머지가 나처럼 송파*잠실에 살았다. 교육청의 학교 배정 정책이 바뀌면서 몇 년 전부터 송파 지역 학생들이 입학하기 시작한 터였다. 애교심이 강했던 몇몇 선생님들은 ‘송파 애들이 와서 학교 물 흐렸다'며 공공연하게 혀를 끌끌 찼다. 당시 잠실은 지금과 달라 닭장 같은 저층 주공아파트들로 가득했고, 거기서 온 ‘비강남' 아이들이 대체로 성적도 떨어지고 사고도 자주 쳤기에 한 말씀이었다. 지금 같으면 뉴스에 나올 법한 문제발언이지만, 뭐 그땐 선생이 주먹으로 학생 얼굴을 후려치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었으니.
아무튼 반갑지 않은 손님격으로 강남에 입성하게 된 나는 학교 생활을 주로 관찰자 시점에서 보냈다. 3년간 지켜본 학교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열등감'이었다. 얼핏 보기엔 남 부러울 것 없이 사는 그들에겐 암묵적 계급이 있어 보였다. 특히 청담*압구정 아이들을 부러워하며 사는 대치동 아이들이 많다는 게 신기했다. 알고 보니 대치동 친구들의 부모는 대개 자수성가한 사업가, 의사나 검사 같은 전문직, 대기업 맞벌이 부부, 그리고 자식 교육을 위해 빚내서 전세로 입성한 주민들이었다. 반면 청담*압구정 친구들의 집은 ‘본 투 비 부자' 그 자체인 경우가 많았다. 대치동 친구들이 대개 ‘우리 아빠는~’ 하며 묻지도 않은 자랑을 하는 반면 청담*압구정 친구들은 아빠가 뭘 하는지 그런 거 잘 모른다는 듯한 태도였다.
대치동 아이들 중에는 ‘우리가 못 살아서’, ‘우리집에 돈이 없어서'라는 말을 달고 다니는 친구들이 꽤 많았다. 아마도 눈에 보이는 비교 대상이 청담*압구정동 친구들뿐이었기 때문이리라. 간혹 내가 못 참고 ‘너는 지난주에 스키도 다녀오고 해외 리조트도 다녀왔다면서 그런 말을 하냐'고 따지면 ‘그거 다 빚내서 하는 거야. 넌 알지도 못하고!’라며 반박을 당했다. 나는 ‘빚내는 거 따위 꿈도 못 꾸는 사람도 많아'라고 맞받아치고 싶었지만 나 역시 적당히 괜찮게 살면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변호한다는 게 우스워 보일 것 같아 관두고는 했다.
대치동 아이들의 신기한 열등감은 대개 교육열로 발화됐다. ‘우리는 청담*압구정보다 못 살지만 공부로는 지지 않으리라' 혹은 ‘공부로 저들과 인생을 역전시켜보리라'는 의지가 흘러넘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전교 10위권은 늘 대치동 친구들 차지였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학원이 밀집한 동네가 대치동이란 사실도 이 같은 열의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실은 그 부모들의 교육열이겠지. 반면 청담*압구정 아이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공부에 크게 매달리지 않았다. 성급한 집단화는 늘 경계해야겠지만 여전히 내게 남겨진 그들에 대한 인상은 ‘여유가 넘친다, 낙천적이다, 순하고 넉넉하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호강이 인성이란 옛말도 그래서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갓 고딩인데다 부모님이 돈에 대한 개념을 전혀 주입시키지 않았던 내게는 퍽 신기한 현상이었다.
< 대치동 친구들이 확실히 공부를 더 잘한다. 부모의 직업도 더 멋지다. 심지어 학생 숫자도 조금 더 많다. 그런데 그들은 청담동*압구정동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산다. >
그러니까 우리 학교를 감싸돌던 열등감의 기원은 오로지 ‘돈'이었던 거다. 그 생리를 뒤늦게 파악했을 즈음에는 이미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휴거, 빌거 따위의 말이 난무하는 지금 시대에는 당연하게 비춰질까? 적어도 나는 돈으로 계급이 나눠지는 걸 아이들까지 체감해야 하는 시대에 살지 않았다. 내가 다닌 초*중학교에서는 부모의 직업도, 집의 형태도, 크기도 서로 개의치 않고 살아왔으니까. 공부 1등, 싸움짱, 운동 잘하는 애를 다들 부러워했지 ‘부모가 돈 많은 애’는 누군지도 모르고 학교를 다녀왔으니까. 1등의 기준도, 열등감의 부류로 다양했으니까.
졸업한 뒤, 나는 20년 가까이 고교시절 친구들과 자주 만나고 있다. 술을 가장 진하게 마시는 사이이기도 하고, 늘 변함없이 좋은 친구들이다. 그러나 20년 가까이 만나면서도 우리 사이엔 대화의 식탁에 올리지 말아야 할 메뉴가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다. 정치적 진보와 보수, 빈부격차, 그 외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들은 우린 결코 입에 담지 않는다. 그게 친구냐 싶겠지만, 그래서 친구여왔기도 하다.
한 번은 예외적으로 ‘부자 증세' 논란이 대화 주제가 된 적이 있긴 했다. 예상대로 나를 제외한 대부분은 ‘공산주의냐’며 반대했는데, 예상외로 우리 중에 가장 부잣집이라고 평가받는 한 친구가 내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닌가. 신기하다 싶어 얘길 들어봤더니 그 친구는 열을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내 주변에 100억, 200억 있는 집안 애들도 다 나랑 - 그러니까 몇십 억 ‘밖에’ 없는 나랑 - 세금 비슷하게 내는 거 같더라고. 부유세 당장 올려야 돼!”
한참 어른이 된 그 친구의 흥분 섞인 목소리에는, 학창시절 대치동 아이들의 뜻 모를 열등감이 자라지도 못한 채 서려 있었다.
다시 고교 시절. 졸업식에 교복도 입고 가지 않았던 나는 학교 문을 나서며 굳건히 다짐했다. 나중에 내 아이는 결코 강남에 있는 학교를 보내지 않겠다고. 검사 아들도 건물주 아들을 질투하며 살고, 전교 1등도 반에서 10등 하는 한량을 부러워하며 사는, 돈에 대한 열등감이 차라리 포기로 귀결되고 말 것이지 도리어 교육으로 발화되며 오히려 더 큰 사회적 화를 재생산하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단조롭고 숨 막히는 생태계에 내 아이를 몰아넣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한 지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나는 서울 강북에 살고 있고, 강남 집값은 내가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올라버렸다. 그러나 후회 없이 ‘강남살이'의 현실판을 체험해봤기에 배 아프거나 부러운 마음은 조금도 없다. 어차피 가서 살 생각이 없는 곳이라 내겐 미국 부동산 값이 올랐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이 진보 언론인이라는 정체성까지 입게 됐다. 사회의 진보를 외치려면, 그런 생각을 공유하는 시민들과 함께 섞여 살고 아이도 그런 학교에서 자라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다만 더 두려워지고 있기는 하다. 강남을 탈출하듯 떠났지만, 나를 감싸고 있는 온 사회가 내가 살던 그 시절의 강남을 빠르게 닮아가는 것 같아서 말이다. 열등감이 오로지 돈으로 수렴하는 풍토가 강남을 넘어 다른 지역의 학교와 사회 전체로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고 있는 것만 같다. 부잣집 구경이 TV 예능의 단골 메뉴가 되고, 예술의 영역인 음악마저 돈 자랑으로 채색된 지 오래다. 자연히 어느 학교에서든 학생들의 화두가 돈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 가족의 설 땅은 점점 좁아지는 기분이다.
돈 없이는 못 살지만, 돈 없이 못 사는 아이로 키우고 싶지는 않다. 강남에서 3년간 내가 체득한 가치 중에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건 눈곱만큼도 없다. 일단 내년부터는 휴직을 하고 춘천에서 2년 가까이 살 계획인데, 거기서 학교에 다닐 아이의 배움이 기대된다. 나는 돈 많은 사람보다, 자연 풍경을 감칠맛나고 정다운 언어들로 표현해내는 작가들에게 더 큰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무슨 도로 위 자동차 종류마냥 술술 짚어내는 덕후 학자들을 더 질투하며 살아왔다. 아무리 노력해봐도 내가 닿지 못할 정서에 가 있는 사람들. 그래서 아이에겐 그런 종류의 열등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다.
이런 생각이 덧없는 이상주의로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궁핍해 본 적 없는 자의 배부른 낭만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그냥 배부른 인생보단 좀 덜 배불러도 감수성을 안고 사는 인생이 낫지 않을까. 나도 내 아이도 말이다. 그리고 말해두건대, 나는 지극히 현실주의자다. 사회적 올바름과 함께, 내 아이가 어른이 될 미래 사회의 경쟁력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해왔다는 말이다. 결국 답이 같았을 뿐. ‘강남은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