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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 변호사 Jan 10. 2024

라비크와 깔바도스

개선문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읽어보셨습니까? 


나는 대학교 다닐 때(또는 졸업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읽어보았습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라비크"란 이름의 의사이지요. 독일에서 탈출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생활(사실은 불법체류)을 하던 신분인 것으로 기억됩니다.


라비크는, 매일 저녁마다 술을 마십니다. 그런데 마시는 술이 늘 같습니다. 술 이름은 "깔바도스"이지요. 


당시 라비크가, 아니 라비크가 사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게 보이던지. 아마 도망자의 신분으로 살면서도 인정과 의리를 보여주는 닥터 킴볼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그 소설을 읽으면서 라비크가 마시던 깔바도스가 너무너무 마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깔바도스를 구할 방도가 당시의 상황에서는 없었습니다.  


그 후로 한 참이 지나 처음으로 미국에 가게되었을 때 미국에 살던 사촌동생을 앞세우고 liquor store에 갔습니다. 


주류상점 주인에게 열심히 외쳤지요. 깔바도스를 사고싶다고요. 주류상점 주인은 그런 술을 처음 들어본다는 등 고개만 갸웃거리며 양어깨를 움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유럽에 갈 일이 자주 있었고, 미국에 갈 일은 더 자주 있었으나 깔바도스에 대하여는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쯤에 후배의 집에 놀러갔다가 그 후배가 마침 프랑스를 다녀왔다는 소리를 듣고 갑자기 깔바도스가 생각이 나 그 후배에게 깔바도스 이야기를 하였지요. 


그랬더니 그 후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형, 이게 깔바도스야" 하면서 술을 보관하는 장에서 깔바도스를 꺼내오지 않겠습니까. 


몹시 감격스러워 "응, 그렇구나"하면서 군침을 삼키고 있는데, 아, 글쎄 이 친구가 그 병만 보여주고 도로 술장에 갖다놓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분개하였습니다. 도대체 그렇게 비인간적일 수가 있느냐고. 내가 깔바도스에 관한 이야기를 그렇게 구구절절히 하였는데도 어떻게 그 술을 한 번 마셔보라는 소리도 하지 않고 도로 갖다 놓을 수 있는 것인지. 


나는 그 후배를 그 이후로 탐탁치 않게 여겨 만나지 않고 있습니다. 집사람도 그 날 나와 같이 그 후배 집에 갔는데 나의 그런 성격을 매우 괴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 후로 다시 깔바도스는 나에게 잊혀져 간 옛사랑처럼 기억 저 편으로 사라졌습니다. 


몇 달 전 은행에 대출을 받으러 갔다가 그 은행 지점장님과 점심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 지점장님은 매우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는데 (클래식 대가이자 화가이기도 합니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것이 인연이 되어 한 때 파리 지점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깔바도스를 아느냐고 물어보았지요. 그 지점장님은 바로 "개선문", "라비크"라는 이름을 연상하시더군요. 


깔바도스를 너무 먹어 보고 싶다고 하였더니 자기에게 한 병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넌지시 경고(?)하였습니다. 과거에 나의 후배가 깔바도스를 내게 구경만 시켜주고 마시게 하지는 않았다가 절교를 당한 적이 있다구요. 


지점장님은 파안대소를 하면서 자기와 그 후배를 같이 보지 말라고 하면서 깔바도스를 가지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더군요. 


자기 고객 중 한 분이 연세가 70이 다 되어가는 분인데 매우 점잖아 보여 점심을 한 번 모셨답니다. 뜻밖에도 그 고객은 프랑스의 골동품을 사모으는 등 취미가 독특하였고, 자신이 프랑스 지점에 근무하였다고 하자 프랑스 여행을 다녀 오면서 깔바도스를 한 병 사서 자신에게 선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제안을 하였습니다. 제가 근사한 프랑스 식당에서 저녁을 한 번 모실테니 그 깔바도스를 같이 마시자구요.


불행하게도 그 지점장님이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또 그 노신사 분도 딸을 만나러 미국에 가 계시는 바람에 깔바도스 회동은 무기 연기되고 말았지요. 


저번 주에 본점 인사부 차장으로 와 계신 그 분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이젠 몸도 다 나았고, 그 노신사분(이회장님)도 귀국하셨으니 깔바도스를 마실 때가 된 것 같다고. 


그 때부터 일주일 후로 날을 잡았습니다. 


예약한 식당으로 가면서 깔바도스에 대하여 생각하였습니다.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비크는 망명객의 신분으로 가난한 사람이었으므로 깔바도스는 고급 술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이회장님이 선물을 할 정도이면 제법 고급 술일 것 같기도 해서요. 


식당에 자리잡고 앉아 그 술을 드디어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20여년 동안 그리던 술 아니겠습니까. 


이회장님의 설명에 의하면, 자신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깔바도스는 꼬냑 계통의 술(즉 브랜디)이고 꼬냑은 포도가 재료인데 반하여 깔바도스는 사과가 재료랍니다. 


꼬냑의 종류가 여러 개 있듯이 깔바도스도 그 종류가 천차만별이라서 비싼 술도 있지만 가격이 저렴한 것도 있답니다. 


라비크는 그 중 어떤 술을 마셨을까요. 비록 망명객의 신분이었지만 술에서만은 호사를 누렸을까요. 아니면 깔바도스면 족하였기 때문에 선술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싸구려 깔바도스를 마셨을까요. 


깔바도스를 마시기 위해서 꼬냑 잔을 주문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금빛나는 그 술을 조금씩 모두의 잔에 골고루 따랐습니다. 


향을 맡아보았더니, 그리고 살짝 맛을 보았더니 꼬냑 맛이 나더군요. 


사실 저는 음식이나 술맛을 잘 몰라 맥주 같은 경우 거의 20년을 매일 마셔대면서도 카스 맥주와 라거 맥주 맛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꼬냑 맛과 깔바도스의 맛을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 맛이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20년 묵은 소원 또는 한이 풀리는 순간인데. 


눈을 감고 그 맛을 음미하면서 라비크를 생각하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소설을 읽은지 너무 오래되어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고, 단지 고독을 즐기던, 그러면서도 인간미가 넘치던 라비크의 멋만 희미하게 생각나더군요. 


처음 뵙는 이회장님은, 참으로 겸손하고 재미있으신 분이었습니다. 아버지 연세쯤 되는 그 분과의 식사시간이 전혀 지루하거나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 날 저녁식사는 즐거웠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려고 합니다. 


**********

22년 전인 2001-12-26에 고등학교 동문 사이트에 쓴 글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지점장님은 몇 년 전에 은퇴하셨고, 지금도 나와 교분이 이어지고 있다.


이회장님은 그 날 만난 것을 계기로 1년에 서, 너번씩 계속 만났었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멘토 역할을 해주시던 분이었다.  작년에 돌아가셨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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