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생활
돈이 많은 사람이나 기업은 모아서 또는 쪼개서 돈을 쓰지 않아도 된다. 필요하다고 느끼면 사면 된다. 꼭 필요한 것인지, 다른 대안은 없는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돈이 부족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유한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경제학은 바로 그 자원배분에 관한 학문이다.
시간은 인간 모두에게 아주 공평하게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이 주어진다. 살아 있는 동안에만 쓸 수 있으므로 나이가 들수록 그 자원의 바닥이 보이기 시작한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Who moved my cheese?)'는 치즈가 점점 없어지는 것을 대비하는 여러가지 자세에 대한 우화다. 내 치즈를 누가 훔쳐갔다고 생각하는 캐릭터도 있고, 추가 공급이 없고 소비만 하면 당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캐릭터도 있다.
아무리 음모론에 빠진 자라도 자기 시간을 다른 사람이 훔쳐갔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죽을 운명이므로 시간이 줄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바보도 없을 것이다.
자원배분이란 결국 우선 순위를 정하는 일이다.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살 수 없으니까 정말 꼭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정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고 싶은 것이 많고 그 모든 것에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순위를 매기는 일은 과감하게 포기하는 결단을 내리는 일로 귀결된다.
배낭을 메고 자전거로 장거리 여행을 떠날 때 배낭의 무게를 줄이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무엇을 배낭에 넣느냐는 고민은 무엇을 포기하느냐의 고민이 된다. 비올 때도 대비해야 할 것 같다는 식으로 생각이 가는 순간 배낭은 산처럼 부풀어 오르게 된다.
탐구생활을 노후생활의 목표로 삼았다. 탐구생활에 필요한 자원은 시간이다.
노인의 시간은 세월이 갈수록 급격히 줄어들게 되므로 그나마 남아 있는 시간을 잘 써야 한다.
아무 생각없이 고정지출이 되고 있는 돈을 줄여야 하듯이 단지 습관 때문에 소비되고 있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그리고 탐구의 대상을 과감히 줄여야 한다.
과거를 생각해보면 후회되는 일이 있다. 나이에 따른 제한 때문에 지금은 할 수 없는 일 같은 것이다. 예를들어 내가 2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자전거를 보다 더 열심히 탔을 것이다. 자전거로 세계를 여행했을 것이고, 국내에서도 그란폰도 대회에 많이 참가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후에도 10년 전을 되돌아보면서 그 때라도 이렇게 했더라면 하는 후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회가 어떤 내용이 될지 상상을 해본다. 그 후회할 일을 생각해보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이 나온다.
얼마 전부터 탁구 레슨을 받고 있다. 우연한 일치이지만 내가 가는 탁구장에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선수출신들도 있다. 구체적으로 나이를 알고 놀랐다. 나보다 10살 많은 노인도 멀쩡하게 탁구시합을 하고 있었다.
격렬한 운동을 하고 싶은데 지금 내 나이로서는 탁구가 거의 유일한 종목이다. 지금 시작해도 앞으로 10년은 즐길 수 있다는 것을 탁구장의 노인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매주 일요일마다 친구들과 마작을 하고 있다. 작년 11월부터 시작하였는데 내일은 45회째가 된다. 마작을 하기로 한 일도 너무 잘 한 결정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친한 친구들이 모여서 담소를 나누면서 복잡한 룰을 적용하는 마작게임에 6시간 동안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는 일이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마작은 깊이 들어가야 진정한 재미를 알게 되는 게임이다. 요즘 멤버들이 점점 그 경지에 들어가고 있다. 마작은 매력적인 탐구대상이다.
골프도 탐구 대상에 들어가 있다. 아내, 아이들과 골프여행을 할 일이 앞으로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실내연습장 시설이 좋아서 연습을 하는 것이 재미있다. 지난 주부터 작은 아이의 소개로 일주일에 한 번씩 레슨을 받기로 했다. 그 레슨 프로는 1인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었다. 트랙맨이라는 장비를 갖추고 그것으로 분석하면서 레슨을 한다.
쇼펜하우어는 나쁜 책을 읽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좋은 책을 읽을 시간을 빼앗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말했다. 요즘의 나쁜 책은 OTT이다. 나는 아직 OTT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듯하다.
살아 있는 동안 즐거운 삶을 사는 것이 내 인생목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거의 실천했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검사 시절에도 이른바 출세를 위해서 권력에 아부하거나 굴종한 적이 없고, 변호사를 하면서 돈을 위해서 아등바등하거나 치사하게 군 적도 없다. 즐거운 삶이 목표이고 돈은 수단이라는 생각에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기 때문이다.
노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탐구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슨 강박적으로 생활하면서 업적을 남기겠다는 것이 아니다.
즐거운 삶은 정신적으로 충만할 때만 가능하다. 게으른 삶은, 감각적 쾌락의 삶은 정신적 만족을 주지 못한다.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에 느껴지는 허무함은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다만 탐구생활이 녹녹치는 않다. 녹녹한 일은 재미도 없다. 어차피 사는 일이 복잡하고 어렵고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