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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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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 변호사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일기는 펜으로 공책에 썼다. 당연히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각종 소셜 미디어를 통하여 자기의 '의도적인' 일상을 '의도를 가지고' 공개하는 시대가 됐다.


자기만 보는 일기장에 쓰는 일기는 정직하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100% 정직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사실이나 기억을 왜곡해서 적을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후에 적어도 가족들은 자기의 일기를 볼 수밖에 없을 것 아닌가.

유서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정직하다고 간주되고 있다. 죽는 마당에 솔직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생각이다. 자기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또는 자기의 조작된 명예를 위해서 얼마든지 거짓말로 유서를 작성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죽으면 모든 것이 미화되는 나라에서는.


소셜 미디어에 쓰는 글이나 올리는 사진은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을 전제로 하므로 솔직할 수가 없다. 엄청난 비밀을 고백하는 것조차도 목적이 있다. 요즘처럼 자기가 무식하다는 것을 인간적인 매력으로 치장하고 자기의 불행한 가정사를 공개해서 돈벌이의 수단으로 쓰는 시절에는 더욱 그렇다.


나는 학창시절에 공부를 못했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공부도 타고난 적성이기 때문이다. 공부는 잘했지만 재미 없는 사람, 공부는 잘했지만 돈을 못버는 사람보다는 공부는 못했지만 재미있는 사람, 공부는 못했지만 돈을 잘 버는 사람을 비교하면 누가 더 좋은 신랑감이겠는가. 당연히 후자다. 그렇지만 공부를 못한 것하고 교양이 있는 것하고는 별개의 문제다.


공개를 전제로 쓰는 글은 솔직하지 못하지만 장점도 있다. 최소한이나마 정성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정성을 기울이면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운동일지 처럼 자기의 실천 내용을 공개적으로 기록하면 추진력을 얻게 되는 효과가 있다. 달리기를 하기로 결심을 했다면 같이 달리기를 할 사람을 모아야 한다. 혼자서 하는 것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실천 가능성이 높다. 같이 할 친구를 못 구했다면 블로그에 운동일지를 쓰면 그런 효과를 일부나마 얻을 수 있다. 누군가 단 한사람이라도 그 운동일지를 본다고 생각하면 운동일지를 매일 꽝으로 채우기는 부끄럽기 때문이다.


솔직한 일기는 자기 반성에도 도움이 되고 - 노인이 될수록 반성이 무의미해지기는 한다. 곧 폐업할 공장에서 생산성을 체크해봤자 어디에 쓰겠는가. - 기록은 기억보다 강하므로 때로는 실제적으로 아주 유용하게 쓰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글로 쓰면 생각이 정리가 된다. 이것이 사실 일기의 가장 큰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여러 개의 글쓰기의 플랫폼을 가지고 있지만 블로그가 가장 좋은 일기장이 된다. 페이스북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들이 독자가 되므로 일기를 쓰기가 부담스럽다. 열심히 '좋아요'를 눌러 주는 사람에게는 부담감조차 느낀다. 나도 그들의 글을 찾아 다니면서 '좋아요'를 눌러줘야 예절 바른 사람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부담이다.


내 블로그에 쓰는 글에 공감을 클릭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장사 목적이다. 내 블로그에 방문해줬으니 자기 블로그도 들어오라는 뜻이다. 나는 시간을 내어 그런 공감 표시를 일일이 삭제한다. 자기의 사이트에 와달라는 댓글도 역시 정성을 들여서 삭제한다. 삭제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그것은 깨끗한 내 방에 누가 버리고 간 휴지를 치우지 않는 것과 같다.


브런치 스토리에 매우 긴 글을 썼는데 그 글을 포스팅하자마다 몇 초도 안돼서 좋아요를 클릭하는 사람도 있다. 블로그와 달리 브런치 스토리는 좋아요를 표시한 사람은 공개적이기 때문에 (브런치 스토리에서 이른바 '작가'라고 이름 붙여준 사람들이다) 블로그에서처럼 차마 삭제하지는 못하지만 내 마음 속에서 한심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은 동일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내 블로그는 나의 충실한 일기장이 될 수 있다. 블로그 주인장에게 공개되는 조회수를 보면 내 블로그에 들어오는 사람의 숫자는 지극히 적은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비공개와 공개의 장점을 모두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공개 폴더를 설정할 수 있으므로 정말 타인에게 공개하기 싫은 내용은 비공개 폴더에 글을 저장하면 된다. 그렇게 블로그에 쓰는 일기의 장점을 잘 알고 있는데 날이 갈수록 만사가 귀찮아진다.


흑백요리사를 보기 위해서 넷플릭스에 다시 가입하였다. 오래간만에 넷플릭스에 들어가니까 흑백요리사 말고도 볼 거리가 많았다. 지난 일주일간 넷플릭스의 콘텐츠를 섭렵했다. 그리고 다시 볼 게 없어졌다. 결국 동일한 내용이다.


흑백요리사는 아주 재미있게 봤다. 요리의 세계가 그렇게 무궁무진한 줄 몰랐다. 나는 먹는 것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 그런 내가 흑백요리사를 보고 갑자기 요리에 관심이 생겨 비싼 레스토랑을 찾는다면 평생 책 한 권 읽지 않던 사람이 한강 작가의 책을 읽겠다고 설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흑백요리사 프로그램은 내게 여러가지로 큰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그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을 실천에 옮긴 사람들을 우선 아주 높이 평가한다. 거액의 투자를 받았어야 할 것이고 사람들을 섭외했어야 할 것이고 그 셋트를 만들었어야 할 것이고 카메라에 담았어야 할 것이고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필림을 편집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공을 들여서 정말 멋진 작품을 만들어 냈다. 요리사들의 내공도 대단하지만 그 제작팀이 나는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돈을 벌려면 저렇게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어서 벌어야 한다. 그게 business의 정도다.


그런데 나는 일기조차 쓰기 귀찮아하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있으니 다소 한심하게 느껴진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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