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 인과관계
인테리어업을 하는 홍씨는 K 은행 지점에서 수표 계좌를 개설하고 수표 용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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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씨는 가구를 사면서 가구업자에게 수표 1억원짜리를 발행하였다. 가구업자는 목재상에게 목재를 구입하면서 물건대금으로 그 수표를 지급하였다.
목재상은 근처의 K 은행 지점에 가서 수표를 제시하고 수표의 액면금인 1억원을 지급해달라고 하였다.
은행의 담당직원은 발령받은 지 얼마 안되는 신참이었다. 수표의 경우 지급제시기간이 10일인데, 10일이 되는 마감일이 어제인 일요일이었으므로 마감일이 지났다면서 수표대금 지급을 거부하였다. 당시 홍씨의 수표계좌에는 몇 억원의 돈이 있었으므로 홍씨의 자금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목재상은 은행이 지급을 거부하자 수표의 양도인 겸 배서인인 가구업자를 찾아갔다. 가구업자는 수표대금 1억원을 목재상에게 주고, 그 수표를 회수하였다.
그리고는 수표 발행인인 홍씨를 찾아가서 자기가 목재상에게 물어 준 1억원을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 홍씨는 부도가 났다. 홍씨는 그 1억원을 줄 능력이 없다고 하였다.
가구업자는 변호사를 찾아갔다. 변호사는 은행직원이 엉터리라고 하였다. 제시기간 경과 후라도 수표발행인인 홍씨의 지급위탁취소가 없는 한 은행은 그 수표금액을 지급할 수 있었고, 또한, 10일째가 되는 날이 일요일이면 그 다음날인 월요일로 제시기간이 연장되므로 은행직원은 발행기간 계산도 잘못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가구업자는 그 변호사를 선임하여 K 은행을 상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하였다.
은행직원이 제시기간 의미와 계산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목재상이 수표를 들고 은행을 찾아갔을 때는 수표발행인 홍씨의 계좌에 돈이 충분히 있었으므로 목재상은 수표금액 1억원을 지급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가구업자가 목재상에게 돈을 물어 줄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은행직원이 잘못하여 가구업자가 목재상에게 1억원을 물어줬으므로 은행직원은 그 금액을 책임져야 하고, 그 은행직원을 고용한 은행은 1억원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을 져야한다는 취지였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은행직원이 제시기간을 명백히 잘못 계산하였으므로, 또한 그 계산 잘못으로 인하여 가구업자는 1억원의 손해를 입게된 것이 분명하므로 은행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은행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부분적으로라도 은행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K은행은 내게 사건을 맡겼다.
나는 이 사건에서 과연 그 사고를 낸 은행직원은 가구업자에게 수표대금 1억원을 통째로 물어줘야 할 만큼 잘못한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해봤다.
은행직원은 물론 잘못했다. 그런데 그 잘못은 과연 가구업자가 입은 손해액 전부를 부담할만큼 잘못한 것인가? 그럴 경우에 만일 그 수표가 1억원짜리가 아니라 100억원짜리였다면 100억원도 물어줘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은행직원이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은행직원의 역할이라는 것이 원래는 수표가 제시되면 수표 발행인의 계좌에 돈이 있는지 확인한 후 돈이 있으면 수표를 들고 온 사람에게 지급하고, 돈이 없으면 지급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이처럼 수표에 대한 아무런 실질적인 지급의무가 없고 단지 금전출납원에 불과한 은행직원이 수표금액에 전부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정의의 관점에서 봤을 때 부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구업자는 과연 억울한가? 얼핏 보면 그렇다. 그렇지만 한 번 깊이 생각해보자. 가구업자는 홍씨에게 물건대금으로 수표를 받을 때부터 이미 부도의 risk를 감수해야 한다. 수표부도의 risk를 감수해야 할 사람은 가구업자이지, 은행이 아니다.
이 사건의 경우에 은행직원의 실수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홍씨는 그 전에 이미 부도가 났을 수도 있다. 그 전에 부도가 났느냐, 은행직원의 실수 이후에 부도가 났느냐는 것은 은행직원의 실수와는 무관한, 전혀 우연한 사정일 뿐이다.
법률이론상 손해배상책임이 성립하기 위한 요건은 세가지이다. 가해자에게 고의 또는 과실이 있어야 하고, 피해자에게 손해가 발생하여야 하며, 가해자의 고의, 과실과 피해자의 손해발생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가해자인 은행직원에게 잘못(과실)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첫째 요건은 충족이 된다. 피해자인 가구업자가 1억원의 손해를 입은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둘째 요건도 충족이 된다. 이 두가지 점에서는 손해배상책임이 성립한다.
세번째 요건인 인과관계를 따져보자. 인과관계라는 것은 B라는 결과는 A라는 원인에 기해서 발생하였다는 뜻이다. 내가 다리가 부러진 것(결과)은 그 교통사고(원인)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때로는 쉽지 않고 매우 복잡하다. 여러가지 원인이 결합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무엇을 원인으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 법학에서 학설 다툼이 많다.
원인을 가장 넓게 인정하는 학설은 조건설이다. “그러한 사실이 없었다면 그러한 결과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인과관계를 파악한다. 조건설에 의할 때는 “은행직원이 제시기간 계산을 잘못하지 않았다면 가구업자가 1억원을 손해 볼 일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되므로 은행직원의 잘못과 가구업자의 손해에 대해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
그러나 조건설에는 문제가 있다. 인과관계를 무한하게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살인자의 엄마가 그를 낳지 않았으면 지금과 같은 살인 사건이 없었을 것이므로 모든 살인 사건의 경우에 살인자의 엄마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게 된다. 이는 명백히 부당하지 않은가.
판례에서는, 인과관계에 관한 여러가지 이론 중에서 이른바 “상당 인과관계설”을 채택하고 있다. 이것은, “A라는 행위가 있으면 통상적으로 B라는 결과가 생기더라”라고 인정되는 것에 한해서만 인과관계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박씨가 출근하기 위하여 사무실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김씨 운전 차량에게 부딪혀서 가볍게 팔이 다쳤다. 박씨는 그 팔을 치료하기 하기 위하여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고, 사무실 근처에 있는 가까운 병원으로 가기 위해서 다른 쪽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이 번에는 천씨의 운전 차량에 부딪혀서 중상을 입었다.
박씨는 중상을 입은 것에 대하여 천씨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천씨 운전 차량은 보험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고, 천씨는 돈이 없는 사람이다. 반면에 김씨 운전차량은 보험도 가입되어 있고, 김씨는 재력이 풍부한 사람이다.
이 때 박씨는 김씨에게 중상을 입은 것에 대한 책임(치료비, 일실수익, 위자료)을 물을 수는 없을까? 그 이론은 이렇다. 김씨가 박씨를 치지 않았으면 박씨는 예정대로 사무실로 바로 출근하였을 것이므로 병원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즉 병원을 가기 위해서 행선지를 바꾸는 바람에 천씨에게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박씨가 천씨에게 교통사고를 당하여 중상을 입게 한 원인제공자는 김씨가 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조건설에 의하면 김씨는 박씨의 중상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된다. 김씨가 교통사고를 일으키지 않았으면 박씨는 중상을 입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당 인과관계설에 의하면 김씨에게 책임이 없다. 왜냐하면, “교통사고를 당하면 원래 가려던 목적지를 바꾸어서 가다가 또 다시 교통사고를 당한다는 것”은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래의 사건으로 돌아가자. 은행직원이 제시기간을 잘못 계산하였고, 그 바람에 목재상이 가구업자를 찾아가고, 가구업자가 홍씨를 찾아갔는데 15일이 경과했다. 그 15일 사이에 홍씨의 수표 계좌는 부도가 났다. 그렇다면 15일 전에는 멀쩡하게 돈이 있던 사람이 15일 정도 후에는 부도가 나는 경우는 통상적인 경우일까, 아닐까?
나는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가구업자가 지독하게 운이 나빴을 뿐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15일 후에도 그 수표 발행인인 홍씨의 재산상태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이 경우에 은행직원이, 홍씨가 머지않아 부도가 날 것이라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거나 알 수 있었다면 물론 은행직원이 책임을 져야 한다. 다만 은행직원이 그렇게 특별한 사정을 사전에 알고 있었거나 알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한 입증책임은 가구업자에게 있게 된다.
이러한 논리로 나는 그 사건 소송에 응하였다. 제1심의 판사는, 무능한 것인지, 아니면, 원고인 가구업자가 딱하고 은행이 괘씸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내 논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내 논리는 궤변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돈 많은 은행이 6천만원 정도 가구업자에게 물어주고, 가구업자는 4천만원의 손실을 감당하라고 합의를 종용하였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하였다. 판결로 가면 내 법률 논리를 판사가 따를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담당판사는 몇 번에 걸쳐 나를 설득하던 중, 인사 발령이 나서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새로 부임해 온 판사가 그 사건을 맡게 되었다. 새로 부임해 온 판사는 유능하나 인정이 별로 없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바로 심리를 종결하고 판결선고를 하였다.
K은행의 승소였다. 판결문의 내용은 나의 주장대로 은행직원의 과실과 가구업자의 손해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구업자는 항소하였으나 항소심에서도 같은 이유로 항소기각 되었고, 대법원에 상고하였지만 상고도 기각되어 이 사건은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