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임죄의 구성요건
오성전자는 연매출액 5천억 정도 되는 회사다. 1년전쯤 유명한 공학박사 이명재를 CTO로 영입했다. 압도적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었다.
최근에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오성전자는 10여개의 협력사(납품업체)가 있는데 이명재가 협력사들에게 오성전자에게 납품하는 제품에는 모두 대도기공의 부품을 쓰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협력사 입장에서는 슈퍼 갑인 오성전자의 CTO의 말을 감히 거역할 수가 없어서 모두 군말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대도기공은 이명재 처남 명의의 회사였다.
오성전자의 황회장은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대도기공의 부품은 우수한 품질의 부품이며 동종의 부품에 비하여 비싼 가격으로 협력사에게 판매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오성전자에게 아무런 손해도 끼친 것도 없다는 것이 이명재의 항변이었다. 또한 대도기공은 처남 회사이지 자기 회사가 아니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했다.
황회장은 내게 찾아와서 이명재를 회사에서 내보내고 싶다고 했다. 배임죄가 안되느냐는 것이었다.
배임이 되려면 회사에 재산상 손해가 발생하여야 한다. 손해발생 가능성만 있어도 된다. 실제 손해가 발생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은행지점장이 부실한 담보로 대출을 해줬다. 대출금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전액 회수되었다. 이렇게 은행에 실손해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해도 부실담보로 대출해 주는 순간 대출금 회수가 안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배임죄는 성립한다.
재산상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거나 손해발생 가능성도 없었으면 배임죄는 성립하지 않는다. 내가 어느 회사의 간부인데 처남이 운영하는 가구점에서 5억원 어치의 사무실용 가구를 왕창 구매하여도 그 가구가 널리 알려져 있는 브랜드이고 가격도 다른 가구 대리점에서 구매한 것보다 비싸지 않다면 배임죄가 되지 않는다.
대도기공은 법인이 아니라 개인 사업체였고 사업자 등록 명의는 이명재의 처남 앞으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명재의 사업체인 것 같았다.
그 증거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명재가 사업자였다가 상호를 바꾸면서 처남이 사업자가 되었다. 이명재가 오성전자에 들어가기 직전에 사업자 명의가 바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처남이 해당 부품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할 점은 협력사들이 대도기공으로부터 부품을 구매하여 납품하면 오성전자에게 손해가 되는 일인지 여부였다.
협력사들이 대도기공으로부터 부품을 구매하기 전에는 다른 회사에서 부품을 구매하였다. 대도기공의 부품으로 교체하면서 오성전자에 대한 납품단가가 높아졌다면 오성전자가 재산상손해를 입은 것이 되므로 배임죄가 성립된다.
위 가구점의 예에서 내 처남의 가구가 다른 가구점의 같은 종류의 가구보다도 비싸다면 처남의 가구점에서 가구를 구입하라고 지시한 나는 배임이 된다. 더 싼 값으로 가구를 구매할 수 있었는데 비싸게 구매함으로써 회사에 재산상 손해를 입힌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도기공의 부품으로 교체했어도 납품단가는 올라가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조원가는 올라갔어도 오성전자가 구매하는 물량이 워낙 많아서 협력사들은 제조원가가 조금 올라갔다고 하여 납품단가에 그것을 반영하지 않았다.
왜 대도기공의 부품을 쓰면 제조원가가 높아지는 걸까? 대도기공의 부품이 고급 소재를 쓰기 때문이다. 그 동안 협력사들은 알루미늄을 소재로 한 부품을 썼는데 대도기공 부품은 카본을 썼다.
대도기공 외에도 해당 부품을 카본으로 만드는 회사들이 있다. 그 회사들과 대도기공 부품의 가격을 비교하면 대도기공의 부품은 오히려 싼 편이었다.
그러면 사실 문제가 없는 것 아닌가. 문제가 없는데도 이명재를 억지로 범죄자로 몰면 안된다.
한 번 더 생각해보자. 대도기공의 부품은 널리 알려진 브랜드인가? 그리고 대도기공은 오성전자의 협력사 외에 다른 업체들에게도 해당 부품을 판매하고 있는가?
만일 대도기공의 부품이 시장에서 널리 알려진 것이 아니고, 따라서 기능에 대한 검증도 확실히 되지도 않은 것이고, 다른 업체들에게는 팔리지 않는 부품이라면?
나는 그 점을 조사했다. 역시 예상대로 대도기공의 부품은 시장에서 통용되는 브랜드는 아니었고 당연히 거의 팔리지도 않던 부품이었다.
협력사들을 상대로 조사해보니 그들도 입이 많이 나와 있었다.
기존에 그들이 같은 종류의 부품을 납품받을 때 부품 납품업체에게 부당한 이득(리베이트 등)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명재의 등장으로 졸지에 기존 부품업체들과의 거래가 끊겼으므로 그것에 대한 불만으로 대도기공 부품에 대해서 나쁘게 평가할 수도 있었다.
법률가는 사람의 말을 덥석 믿으면 안된다. 사람은 여러가지 이유로 거짓말을 한다. 과장도 거짓말이고, 유리한 해석도 거짓말이다. 항상 클라이언트와 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 반대편 말을 확인하지 않을 때는 법정에서 호되게 되치기 당할 수 있다.
나는 협력사들의 말을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여러가지 각도로 대도기공의 부품에 대하여 탐문하고 연구하였다. 대도기공의 부품은 가격은 쌌으나 인지도가 낮았다. 판매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성능에 대한 검증도 완전히 되지는 않았다.
누차 말하지만 배임죄는 재산죄이다. 재산에 피해가 발생하여야만 배임죄가 성립한다. 대도기공 부품의 품질에 설령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배임죄의 구성요건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대도기공 부품은 카본 소재 부품치고는 싼 편이라는 점은 부동의 사실이니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이리저리 조사해보다가 이명재가 오성전자에 입사한 후 이명재가 기획한 신상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신상품은 협성전자에서 모두 납품하고 있었다. 신상품 납품업체로 협성전자가 선정된 것도 이명재의 영향력이 컸던 것으로 확인됐다. 신상품에 대도기공 부품의 들어간 것은 물론이다.
신상품이 론칭된 지는 불과 한 달 밖에 안되지만 물량이 워낙 많아서 오성전자가 협성전자로부터 신상품을 매입할 때 지출한 금액은 10억원이 넘었다.
기존 상품의 경우에는 이명재의 압력으로 대도기공 부품으로 중간에 교체하였고 대도기공 부품이 기존 부품보다 가격이 비쌌으므로 협력사들의 제조원가는 상승했다. 그러나 오성전자에 대한 납품단가에는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성전자는 재산상손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대로다.
협성전자가 납품하는 것은 이명재가 온 이후에 생산되는 신상품이었다. 만일 협성전자가 이명재의 압력이 없었다면 대도기공 부품을 썼을까? 즉 비싼 카본 부품을 쓰지 않고 일반적으로 흔히 쓰는 알루미늄 부품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오성전자에게 신상품의 견적을 낼 때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 그 차이가 오성전자가 입은 재산상 손해가 될 것이다.
협성전자를 집중공략했다. 협성전자는 자백을 했다. 그 신상품은 고급형이 아니라서 굳이 카본 부품을 쓸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카본 부품을 쓰지 않고 알루미늄 부품을 사용할 경우에는 8억원 정도면 신상품을 납품할 수 있다고 했다.
협성전자가 알루미늄 소재로 된 부품을 써서 신상품을 제조하여 오성전자에게 납품하였으면 납품대금이 8억원이었을텐데 대도기공 부품을 썼기 때문에 납품대금이 10억원이 되었다. 오성전자는 그 차액인 2억원을 손해보게 된 것이었다.
나는 여러가지 상황을 전제로 한 질문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오성전자에게 그 질문서를 공문으로 만들어서 협성전자에게 보내라고 했다. 협성전자로부터도 공문으로 답변을 받으라고 했다. 나중에 협성전자 관계자들이 말을 바꿀 수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거의 열흘이라는 시간을 꼬박 썼다. 부품을 이해하는 것만 해도 시간을 많이 썼다. 처음에는 암호 같은 용어들이 나중에는 저절로 입에 배게 되어서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됐다. 사건이 종결되면 금방 모두 잊게 될 것이지만…
이제 기본적인 준비는 끝났다. 이명재를 만나서 직접 신문을 해야 하고 자백을 받아야 한다.
오성전자의 황회장은 배임으로 이명재를 고소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런 식으로 하면 기업활동에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황회장이 바라는 것은 이명재가 조용히 물러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회사를 나가서 회사에 대한 음해 작업 같은 것을 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다.
지난 1년 동안 이명재를 데리고 있어보니 이 친구나 워낙 사나운 성격이고 일종의 소시오패스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신과 의사인 지인이 보내 준 소시오패스의 전형적인 특징이라는 문건도 내게 보여줬다. 그 특징과 이명재의 성격이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담판을 지을 때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가 잃을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두려움에 떤다. 그 결과 상대방에게 많이 양보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상대방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황회장은 이명재가 퇴사한 후 유튜브 방송 등을 통하여 오성전자를 비방하게 되면 오성전자의 매출이 급락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이명재를 배임으로 고소하여 형사처벌을 받게 하면, 그리고 오성전자가 그동안 손해를 입은 금액 전부를, 또는 상법 제397조 제2항에 따라 그가 대도기공을 통하여 얻은 이득 전부를 양도하라고 이명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하게 되면, 그는 많은 것을 잃게 되므로 마땅히 이명재가 더 무서워할 것이라고 황회장을 설득하였다.
상법 제397조(경업금지)① 이사는 이사회의 승인이 없으면 자기 또는 제3자의 계산으로 회사의 영업부류에 속한 거래를 하거나 동종영업을 목적으로 하는 다른 회사의 무한책임사원이나 이사가 되지 못한다. ② 이사가 제1항의 규정에 위반하여 거래를 한 경우에 회사는 이사회의 결의로 그 이사의 거래가 자기의 계산으로 한 것인 때에는 이를 회사의 계산으로 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제3자의 계산으로 한 것인 때에는 그 이사에 대하여 이로 인한 이득의 양도를 청구할 수 있다.
이명재가 소시오패스든 아니든 지킬 것이 있는 자라면, 정상적으로 뇌가 작동하는 자라면, 그는 득실을 계산하게 되어 있다.
무서운 사람은, 이해득실을 따지지 못하고 분노만 남아 있는 이성적이지 못한 자, 자기 나름대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려는 지사(志士)적 성향이 있는 자들이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극히 소수다.
이명재는 자기 명의의 조그만 건물도 가지고 있는 등 재산도 있고, 이쪽 분야에서 확고한 명성도 쌓은 자다. 그런 사람이 배임죄로 고소되어 자기의 치부가 만천하게 공개되고, 그 조그만 건물을 위 상법규정에 의한 이득양도청구로 잃게 되는 리스크를 감수할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황회장, 그리고 황회장보다 더 부드러운 대표이사 오영수 대표의 걱정을 달래주면서 나는 이명재와의 담판을 준비하였다.
장소는 호텔에 있는 회의실로 정했다. 오영수 대표이사가 이명재에게 호텔 커피숍으로 차 한 잔 하자면서 부른 후, 내가 있는 회의실로 데리고 오게 했다. 전격적인 공격은 늘 효과적이다.
나는 검사가 기소할 때 쓰는 공소사실을 미리 작성해 놓았다. 그렇게 공소사실을 미리 작성해보면 부족한 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일기든, 뭐든 글로 써보면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는 것보다 여러모로 장점이 많다. 수학문제를 눈으로 풀어보는 것과 실제로 종이에서 풀어보는 것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회의실에 먼저 가서 기다리면서 “겸손하자, 흥분하지 말자, 이명재의 말을 주로 듣자, 이명재를 이기려고 하지 말자.” 라는 등의 주문을 외웠다.
임전무퇴의 본능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이명재처럼 적어도 도덕적으로 파렴치한 인간이 공격적으로 나올 때는, 나도 모르게 더 공격적으로 나올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이명재를 제압할 수가 없다. 나의 임무는 이명재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명재를 항복시켜서 조용히 오성전자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고, 오성전자를 떠나고 나서도 오성전자에게 일체의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에 있는 것이었다.
조금 후에 오영수 대표와 이명재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이명재는 당연히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용기를 내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친절한 응대를 하였다. 이명재씨 라고 부를까, 상무님이라고 부를까 잠깐 생각했는데 상무님이라고 불러주기로 했다.
이런 식의 대화를 할 때 말을 될 수 있는 한 적게 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말을 많이 하게 해야 한다.
클라이언트에게 녹음을 해 오라고 시키고 나중에 들어보면 주로 본인 혼자 이야기 하고(---라고 했지요? ---가 맞는 것이지요? 등등) 상대방은 ‘예’ 라고만 대답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증거가치가 없다. 법정에서의 신문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이 Yes, No 라고 대답하게 하는 질문은 될 수 있는 한 피해야 한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내 정보를 노출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이야기하게 시키는 것은 상대방의 정보를 손쉽게 획득하는 방법이다. 그런데도 감정적으로는 누구나 자기가 많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그 감정을 눌러야 한다.
이명재는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내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했고 중간에 내 질문을 자르고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라고 하면서 설명도 했다.
그의 주장 요지는, 대도기공은 자기가 만든 기업인 것은 맞지만, 자기가 오성전자의 상무로 들어오면서 모든 것을 자기 처남인 김대철에게 넘겼으므로 자기하고는 무관하다는 것이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부품도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라 김대철이 업그레이드하여 새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김대철에게 그런 능력이 있느냐고 물었다. 김대철은 대학교 때 전공은 그 쪽 분야로 하지 않았지만 직장생활을 그동안 그 쪽 분야의 회사에서 해왔으므로 자기 못지 않은 전문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도기공에서 나오는 수익은 이명재 당신이 전혀 갖고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대도기공은 김대철의 것인데 왜 내가 갖느냐고 하였다. 다만 해당 부품의 최초 기술은 자기 것이었으므로 특허권 양도 대가 형식으로 처음에 목돈으로 1,000만원을 받았다고 했다.
대도기공이 자기 처남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은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될 수는 있지만, 오성전자에게 손해를 입힌 것은 전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자기는 오성전자를 위하여 동종의 카본 재질 부품보다 싼 가격으로 해당 부품을 오성전자 협력사들에게 공급했고 대도기공의 부품은 품질면에서도 매우 우수한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오성전자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이라고 했다. 자기는 애사심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고도 강변을 했다.
이명재는 왜 대도기공의 부품이 종전에 협력사들이 쓰던 부품보다 우수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한참동안 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전문적인 내용이었다.
이명재는 내게 반문하였다. “변호사님, 혹시 대도기공의 부품이 다른 카본 부품보다 가격이 더 싸다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시지요?” 나는 알고 있다고 순순히 인정했다.
나는 이명재에게 물었다.
“협성전자에서 새로 론칭한 제품에, 꼭 대도기공 부품이 들어 갔어야 했는가요? 카본 부품 말고 가격이 싼 알루미늄 부품을 쓰면 안되는 것이었나요?”
그동안 파악한 바로는 협성전자의 공장장과 이명재는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있었다. 협성전자가 오성전자에게 신상품을 납품하는 회사로 선정되게 된 것도 그 영향이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그렇다면 협성전자를 상대로 조사하였을 때 협성전자의 공장장은 이명재에게 그 정보를 당연히 주었을 것이고, 이명재는 그에 대한 준비를 했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이 질문에 이르러서는, 이명재는 거품을 물면서 변호사님이 이 쪽 분야에 대해서 잘 모르시니까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마치 유능한 광고기획자가 멋진 프리젠테이션을 하듯이 일목요연하게 그 신상품에 카본 부품이 꼭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신상품에 카본 부품이 필수적인 것이라면 대도기공 부품은 카본 부품 중에서도 가격이 싼 편이므로 오성전자에게 이득이 된다는 말도 되풀이하였다.
자신은 대도기공의 매출이나 수익배분에 전혀 관여한 바가 없었고, 오성전자에게 결국 경제적 이익을 주었는데 이렇게 자기가 음해를 받고 있다는 것이 매우 억울하다고 했다.
음해를 받게 된 이유는, 자기의 능력을 시기하는 오성전자의 기존 임원들 때문인데 자기는 그들의 부정을 현재 파헤치고 있고, 곧 회장님에게 결과를 보고드릴 것이라고 했다.
1시간 30분이 지났다. 이명재는 처음의 초조했던 자세에서 벗어나 이젠 완전히 주도권을 잡은 듯이 당당하였다.
이제 회심의 일격을 가할 때가 왔다.
“대도기공은 상무님이 만든 회사이고, 지금 대도기공의 대표는 상무님의 처남이 하고 있는 것은 맞지요?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회장님의 신뢰를 배반한 행위인 것은 맞지요”
“예.”
“그럼 신뢰를 회복하는 의미에서 한가지만 들어줄 수 있는가요?”
“예,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대도기공은 김대철씨 개인사업체이므로, 즉 주식회사 같은 법인이 아니므로 대도기공에서 김대철씨가 고정적으로 월급을 받고 있지는 않겠네요?”
“예, 그렇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명재는 위험을 감지하고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협력사들에게 물어서 대도기공의 거래계좌가 어느 은행에 있는지 파악해 놓았습니다. 김대철씨에게 연락해서 나와 함께 은행에 갑시다. 해당계좌의 거래내역을 제게 보여주십시오. 거래내역을 보면 김대철씨가 매월 일정한 금액을 월급으로 가지고 가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월급으로 빼가고 있지 않다면 대도기공은 김대철씨 회사인 것으로 인정해주겠습니다.”
그 동안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이명재는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니, 변호사님, 왜 남의 회사 계좌를 보려고 하십니까. 그리고 그 회사는 처남 것인데 처남이 제 말을 듣겠습니까?”
“처남에게 그렇게 큰 이익을 줬는데 당당하다면 처남이 왜 협조를 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제 계좌를 모두 보여드리겠습니다. 제 계좌를 보면 제가 대도기공으로부터 돈을 받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상무님의 계좌가 도대체 몇 개가 있는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고, 처남이 상무님 부인이나 제3자를 통하여 상무님에게 대도기공의 수익을 주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저는 미국 영주권자라서 소득을 철저히 보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난데없이 상무님답지 않게 무슨 황당한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우리 집사람하고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말을 하지 않은지도 오래됩니다.”
“그것도 황당한 소리입니다.”
“처남하고도 사이가 요즘 매우 나빠져서 말을 안 들을 겁니다.”
“자꾸 그런 말을 하면 웃기는 소리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명재는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지만 이미 게임은 끝났다. 나는 말을 막고 최후통첩을 했다.
“지금부터 상무님은 직무정지입니다. 회사에 출입할 수도 없고 회사의 이메일 계정도 정지되고, 회사의 홈페이지에도 접속할 수 없습니다. 이틀 후에 오늘과 같은 시간에 이 회의장에서 뵙겠습니다. 사임으로 처리할지, 해임으로 처리할지, 배임으로 고소할지는 그 날 상무님을 만나 뵙고 최종결정할 것입니다.”
이명재의 태도는 갑자기 고분고분해졌다. 회사의 처분에 따르겠다고 했다.
황회장, 오영수 대표와 만나서 합의서 문안을 작성했다. 3페이지에 달하는 긴 내용이다. 그 중에는 이명재가 배임행위를 하였음을 인정한다라는 내용도 있었다.
이틀 후 같은 시간에 같은 호텔의 같은 회의실에서 이명재를 만났다. 나는 서두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합의서에 꼼수 같은 것은 없습니다. 아주 알기 쉽고 명백한 의미로 문장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합의서를 읽은 후 지금 이 자리에서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십시오. 수정의견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말하십시오. 며칠간 시간을 달라면서 이 합의서를 들고 나가는 것은 허용 안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끝내는 것입니다.
합의서를 이명재에게 주고 읽을 시간을 줬다.
일반인이 작성한 계약서와 합의서 등은 절반 이상이 쓸데없는 문구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예를 들어 ‘계약을 위반할 때 을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와 같은 문구다.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같은 내용이다. ‘반드시’가 들어간다고 법률적 효과가 달라질 것은 없다.
또한 ‘책임을 진다’라는 말은 공허하다. 손해배상책임을 지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구체적인 손해액 입증이 어렵기 때문에 실제로 책임을 묻기 어렵다. 따라서 “을이 본 계약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행하지 않을 때는 위반행위마다 1억원의 위약금을 갑에게 지불한다.”라는 식의 위약벌 규정이 있어야 한다.
전문가인 변호사가 작성한 합의서는 더 이상 뺄 내용도, 추가할 내용도 없는 효율적 문장으로 구성된다. 합의서 문안에서 변호사의 경험과 수준이 나타난다.
이명재는 합의서 문안을 모두 받아들이고 서명하였다.
사건을 수임한지 2주 남짓 만에 임무를 완수하였다. 황회장도, 오영수 대표도 결과에 대만족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