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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 변호사 Mar 23. 2023

출근길의 횡설수설^^

Seize the moment

정자역에서 서울로 가는 신분당선의 첫차는 새벽 5시 30분이다. 정자역 뒤로도 동천역, 성복역 등을 거쳐 광교역까지 연결되는 신분당선이지만 첫차와 그 뒤의 40분 출발 열차는 정자역이 기점이다. 


신분당선이 처음 생겼을 때 정자역과 강남역이 종점이자 기점이었다. 정자역에서 앉아서 출근하고, 강남역에서 앉아서 퇴근했다. 좋은 시절이었다. 이제는 광교역에서 출발하여 신사역까지 가므로 출근 시간에는 뉴스에서나 보던 지옥철이 되어 버렸다. 좋은 일은 마치 부당이득처럼 오래 가지 않는다. 


매일은 아니지만 주로 나는 첫 열차나 두번째 열차를 타고 서울의 사무실로 출근한다. 붐비는 전철이 싫기 때문이다. 오래 전의 고등학교 시절, 등교 길의 만원버스가 싫어서 그 때도 나는 이른 아침에 학교에 갔었다. 


집에서 정자역까지는 약 1.2km의 거리다. 탄천변을 따라서 걷는다. 비가 조금씩 왔다. 가방에 있는 우산을 꺼내서 썼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우산을 늘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일기예보를 챙기지 않고 살기 때문이다. 


비가 모자라므로 왕창 왔으면 좋겠는데 빗줄기가 아닌 빗방울 수준이었다. 그나마 곧 그쳤다. 문명화되기 전으로 돌아가서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살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자연 그대로는 공정하지 않다. 비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폭우로 바닷가 동네가 잠기는 뉴스를 본 지가 어제 같은데 이제는 가뭄이다. 


교대역 편의점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얼마 전에 renovation을 하더니 물건의 배치가 달라졌다. 햇반과 1인분 볶음김치를 한참동안 찾았지만 못찾았다. 결국 점원의 도움을 받았다.


작년 어느때쯤 어느 조개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술을 마셨다. 그 식당에서는 특이하게 디저트(?)로 햇반과 김을 내놓았다. 햇반을 밥그릇에 담아 내온 것이 아니라 용기 그대로. 하얀 쌀밥을 김에 싸서 먹으니 맛이 기가 막혔다. 아무 거나 좋아지는 술기운 때문에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무실로 들어와서 햇반을 전자렌지에 넣고 타이머를 2분에 맞췄다. 볶음김치의 포장을 뜯고 접시에 담았다. 사무실에는 1회용 김이 대용량 비닐 포장에 가득 들어 있다. 그것도 두 뭉치나 있다. 아래와 같은 사연이 있다.


얼마 전에 그 편의점에서 1회용 김을 찾았는데 없었다. 주의깊게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선반 맨 꼭대기에 1회용 김이 가득 들어있는 투명 비닐 포장이 보였다. 나는 이렇게 조그만 편의점에서 저 포장 전체의 김을 사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포장을 뜯고 그 안에서 김 한봉지를 꺼냈다. 


계산대에 올렸다. 점원 아주머니가 "어, 계산이 안되네요. 이상하네."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자꾸 총같이 생긴 것으로 김봉지에 레이저를 쏴댔다.  잠시 후, 그 아주머니는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 깨달음을 얻은 표정은 후련할 때의 표정과 같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 "손님, 혹시 이것, 포장지를 뜯고 꺼냈어요?"라고 물었다.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포장 안에 있는 김을 통째로 다 사야 한다고 했다. 죄에 따른 합당한 처벌이라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점원 아주머니는 1+1 이라고 하면서 한 뭉치 더 가져가라고 했다. 무게는 별로 안 나가지만 덩치는 큰 김포장 뭉치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출근했어야 했다.


사무실에 출근하면 일단 1시간 정도 운동을 하고, 이어서 일본어 공부를 1시간 하는 것으로 루틴을 정해 놓았다. 그리고 캘린더에 실천 여부를 일련번호를 붙여서 기록을 한다. 그래야 과연 몇 번을 실천하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 해가다가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에 무너진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이상하게 하기 싫어진다. 그리고 또 그 다음날도. 이렇게 사흘 정도 연달아 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일주일 이상을 빼먹게 된다.


다행히 올해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술을 마시면서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떠는 것도 일종의 도파민 중독이다. 가장 강한 도파민을 만들어내는 것은 마약, 섹스, 도박이다. 


개를 훈련 시킬 때 쓰는 도구는 간식이고 간식이 하는 역할은 도파민 생성이다. 그 행동을 하면 간식(도파민)이 나오더라는 것을 개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개체보전, 종족유지와 관련되는 행위는 도파민을 많이 만들어낸다. 먹는 것에 그리 집착하는 것도 맛있는 음식 뒤의 도파민 때문이다. 불타는 사랑도 역시 도파민의 장난이다. 마약을 할 때 느껴지는 행복감이나 열렬한 사랑에 빠져 있을 때 느끼는 행복감이나 그 원천은 똑같은 도파민이다. 


사람을 포함하여 동물은 '항상성(恒常性)'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도파민이 많이 나오면 그것을 억제시키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출된다. 따라서 동일한 강도의 자극이 그 다음에 왔을 때는 그 이전만큼의 도파민이 나오지 않는다. 똑같은 도파민을 만들어내려면 더 많은 강도의 자극을 줘야 한다. 마약, 섹스, 도박에 빠지는 사람이 계속하여 강도(強度)를 높이게 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쇼핑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더 좋은(비싼) 물건, 더 많은 물건을 원하게 된다.


지나친 도파민을 차단하기 위하여 스트레스 호르몬이 나온다고 하였는데 마약의 금단현상이 그것이다.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술에 만취하면 그 때는 시름을 잊을 수 있어서 좋으나 다음날 아침에 우울해지는 것도 역시 도파민 차단장치의 작동 때문이다.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오늘은 그 루틴을 포기하였다. 그 대신 햇반을 볶음김치, 김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이어서 좋아하는 소설가 요 네스뵈의 '칼'을 펼쳤다. 칼 이후에도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는 한 권 더 있지만 번역이 된 것으로는 '칼'이 최신작이다. 


타고난 DNA 중에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 마음에 안드는 것도 있다. 그 중 책 읽기를 좋아하는 DNA에 대해서는 아주 감사하게 생각한다.


은퇴해서 시간 나면 책을 읽겠다는 사람은, 할 일 없으면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를 짓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농사짓는 것이 가벼운 소일거리가 아니듯이 책 읽는 것도 어느날 마음 먹는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또는 적어도 젊은 시절부터 취미가 있고 많은 시간을 바쳐야 책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고전음악을 어느날 결심한다고 하여 즐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책을 읽는 것이 특별한 가치가 있는 취미라는 것은 아니다. 그냥 골프나 낚시 같은 취미의 일종에 불과하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특별히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바둑 잘 둔다고 회사 경영을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또한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하여 훌륭한 인격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책을 가장 많이 읽는 직업은 소설가다. 소설가들이 모여 있는 문인협회에서도 성추행을 포함하여 온갖 부조리가 일어난다. 이것만 봐도 책이 인격을 함양시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책읽기 취미의 단점은 즐기려면 오랜 시간의 연마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장점은 돈이 별로 안들고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혼자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요 네스뵈의 소설은 이른바 장르소설, 그 중에서도 범죄소설이다. 장르소설은 휘발성이 강하다. 반면에 정통 문학소설은 읽기가 마냥 편한 것은 아니지만 여운이 있다. 범죄소설은 '재미있거나, 유치하거나' 이고 문학소설은 '감동있거나, 지루하거나'이다. 감동이 있으면서도 재미있는 문학작품도 많다. 


재미를 느끼려면 수준이 높아져야 하고 나이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완벽한 번역은 영원히 불가능하지만 - AI가 아무리 발달한들 절대로 완벽한 번역은 커녕 제대로 된 번역도 못한다고 확신한다. 문학작품의 문장은 매뉴얼과 다르다 - 요즘의 번역가들은 번역을 잘하고 있으므로 번역이 잘못됐다는 핑계는 될 것이 아니다.   


예순살이 넘은 지금, 과거를 회고하건대 정말 후회되는 일이 하나 있다.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3 시절에 좋은 소설책을 읽을 때 마음 편안하게 못 읽었다는 뜻이다. 일단 읽기 시작했으면 그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 소설을 읽는데만 집중했어야 했다. 공부해야 하는데, 지금 소설을 읽을 때가 아닌데 하는 주저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어도 항상 과제는 있다. 몸이 아플 수도 있고 병의 진행 결과를 미리 걱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지 말아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전쟁이나 지진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냐, 없냐는 본인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백만금을 가져도 걱정이 많은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되뇌인다. "Seize the mo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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