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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 변호사 Mar 30. 2023

나와 철학이야기

The Story of Philosophy(Will Durant)

윌 듀란트(Will Durant)가 쓴 철학이야기(The Story of Philosophy)는 20대 때 나의 one-pick이었다.


철학사에 빛나는 인물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프랜시스 베이컨, 스피노자, 볼테르,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 등)을 선정하고 그들의 생애와 사상을 요약하고 저자가 비평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1926년에 초판이 나오고 1933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그 시절에는 학자가 개설서(Outliners)를 쓰는 것은 점잖지 못하다는 인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개정판 서문에서 윌 듀란트는 '나의 책을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 하에 그런 곱지 않은 시선에 대하여 반박을 한다.


철학이야기는 초판이 출판됐던 1926년에도 베스트셀러였고 그 이후에도 계속 많이 팔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철학사에 대한 좋은 개설서도 당연히 많이 나왔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철학이야기는 철학 서적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매력이 있다. 윌 듀란트가 미문가(美文家)이기 때문이다. 그의 문장은 옛날 사람답게 만연체이고, 장식(裝飾)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빼어나다. 고급진 위트도 있다. 문장의 맛을 느끼게 해 준다.


번역서를 완독한 후 언젠가는 영어 원서로 읽으리라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대중서적의 원서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의대생들이 교과서로 쓰는 책들 같은 것은 예외였지만.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U.C. Berkeley에 가게 되었다. 대학도서관에서 윌 듀런트의 전집을 발견하였다.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감개가 무량하였다. 샌프란시스코의 큰 서점에 가서 paper-back으로 나온 철학이야기를 샀다.


원서로 읽겠다는 결심을 실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창 놀 나이였다. 늘 그래왔듯이 "이 다음에..."라고 죄책감 없이 실천을 나중으로 미뤘다.


시간이 또 한참 흘렀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큰아이가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갔다. 평소에 책을 읽지 않던 아이가 군대에 가더니 갑자기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부대 안에 널려 있던 자기계발서들이 독서 리스트였는데 매번 그 소리가 그 소리니까 곧 싫증을 냈다.


자기계발서에서 갑자기 수준이 너무 높아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잠깐 했지만 혹시나 싶어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샀던 철학이야기를 갖다줬다. 읽다가 재미없으면 언제라도 때려치우라고 했다. 며칠 후에 전화가 왔다. 다음에 면회 올 때 영영사전을 가지고 와달라고 했다. 의외였다. 재미를 느꼈다는 말인가?


큰아이는 철학이야기에 흠뻑 빠졌다. 책을 챕터별로 분리시킨 후 스테이플러로 묶어서, 즉 분철(分綴)하여 갖고 다니면서 수시로 읽었다고 했다.


 



전역할 무렵, 큰아이는 철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하였고, 실제로 복학 후에 철학과를 선택하였다. 큰아이가 다니던 대학은 저서를 남긴 철학교수가 많았다. 저자가 직접 강의를 하러 들어오니까 큰아이의 표현에 의하면 아이돌 콘서트에 가는 것처럼 수업시간이 기다려졌다고 했다.


내가 읽은 번역본은 황문수님이 번역하고 고려대학교 출판부가 1975년에 출판한 책이었다. 이사 다닐 때마다 책을 버렸고 어느 날은 큰 결심을 하여 남아 있는 모든 책을 버렸다. 철학이야기는 도저히 버릴 수 없어서 사무실에 갖다 놓았다. 몇십년이 지났으므로 책은 누더기처럼 낡은 상태가 되었다.


클라이언트 중에 한 분이 그 책의 사연을 들었다. 책을 빌려달라고 했다. 한 달 후에 다 읽었다면서 책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그 책이 아니었다.


그 분은 인쇄소에 가서 책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인쇄소는 오직 그 책 한 권을 두꺼운 양장본으로 출판한 것이었다. 참으로 고마운 선물이었다.



'엘 시크레토 : 비밀의 눈동자'라는 제목의 아르헨티나 영화가 있다. 재밌는 영화다. 그 영화를 보면 "사람의 외양이 아무리 바뀌어도 그 사람이 가진 꿈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영화본지 오래돼서 정확하게 대사를 옮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취지였다.


철학이야기의 원서를 읽겠다는 내 꿈도 쉽게 포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큰아이가 읽었던 책의 글자는 너무 작아서 노안인 내 눈으로는 읽기가 불가능하였다.


가끔씩 아마존에 들어가서 전자책을 다운받는다. 번역본으로 읽고 있는 책 내용이 너무 좋은데 몇 개의 문장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때 원서를 다운받는다. 전자책은 값도 그렇게 많이 비싸지 않고 즉시 다운받아서 kindle 앱으로 읽을 수 있다. kindle 앱은 매우 사용하기 편리하게 되어 있다. 일례로 단어에 커서를 갖다 대면 바로 영영사전으로 연결되는 기능도 있다.


얼마 전에 다른 책을 찾다가 The Story of Philosophy를 검색어로 넣어 보았다. 있었다! 오래된 책이라서 그런지 가격도 6달러가 채되지 않았다. 다운받았다.


킨들로 열어보았다. 넓은 PC 모니터 화면에 텍스트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요즘 시간도 많으니 철학이야기의 원서 읽기를 미룰 이유가 없어졌다.


정적이 흐르는 주말의 사무실에서 부푼 꿈을 안고 개정판 서문부터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너무 너무 어려웠다.


윌 듀란트 할아버지는 원래 문장을 평이하게 쓰는 분이 아니다. 번역본을 읽을 때도 속독은 어림없다. 까마득한 옛날인 1920년대에 쓴 문장이므로, 또한 서문은 원래 저자들이 특별히 정성을 바쳐 쓰는 것이므로 서문 부분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독해력이 부족한 나를 위로하는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번역본이 필요했다. 최근에 번역본이 새로 나왔는지 검색해봤다. 요즘 번역가들과 출판사 편집자들의 실력은 대단하다. 실력은 성의에서 출발한다. 나보코프가 쓴 롤리타(김진준 번역)를 읽고 감동했다. 문장도 매끄럽고 뜻도 이해하기 쉬웠다. 깊이 있는 수많은 주석은 단지 책을 팔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렇게 정성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번역자와 출판사에게 - 그들은 알리 없겠으나 - 깊은 경의를 표한 바 있다. K-Pop만 세계적인 수준인 것이 아니다.


반면 옛날의 번역은 어설프다. 영어권 사회에서 살아 본 경험이 없고 크로스 체크를 해 줄 사람이 없던 시절이라서 영어로 쓰여진 책을 바로 번역하지 못하고 일본 번역판을 중역(重譯)하는 경우도 많았다.


철학이야기는 황문수님이 번역한 것과 임헌영님이 번역한 것이 있다.  그러나 오래 전이므로 그 이후에 새로 번역된 책이 있을까 하여 인터넷 검색을 해봤던 것이다.


있었다! 더구나 개인적으로 아주 신뢰하는 정영목님이 번역한 것이었다. 2013년에 '봄날의 책'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품절이었다. 중고를 찾았다. 놀라웠다. 새 책의 가격은 27,000원이었는데 중고책의 가격은 31,000원부터 무려 90,000원짜리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배송비 3,300원은 별도다.


고서(古書)도 아닌데 이건 너무하다 싶었다. '봄날의 책'에 전화를 걸어서 재고가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특이한 것이 '봄날의 책'은 1인 출판사였다. 재고는 없다고 하였다. 1인 출판사가 그다지 많이 팔리지도 않을 것 같은 책을, 최고 수준의 번역가를 초빙하여 번역하다니, 그 사장님이 대단한 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고책을 구매할 수 밖에 없었다. 중고책방에서는 자기가 보관하고 있는 책들의 상태를 상, 중('하'라고 자백하는 책방은 없었다)으로 표시하였는데 그 중 한 곳은 '중'이라고 하면서 '밑줄 친 곳 없음'이라고 부기하여 놓았다. 신뢰가 가지 않는가.  정직하거나 정직함을 가장한 좋은 상술이었다. 배송비까지 포함하여 37,000원을 지불하였다. 며칠 후 책이 왔다. 책 상태가 만족스러웠다. ('중고책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 것' 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책의 외양은 검소했지만 책갈피 끈이 두 개가 있었고 단단하게 제본되어 있었다. 출판사 사장님이 훌륭하다는 것이 다시 입증되었다.



나는 영어 원서를 처음 읽는 것은 아니다. 내가 처음 읽은 원서는 Erich Segal쓴 유명한 소설 Love Story였다. 그가 쓴 모든 소설은 문장이 쉽고 명확하다. 영화 대사 같다. 그래서 영화로 만들어진 것도 소설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곁가지로 말하면 나는 그의 작품들을 참 좋아했다. 그가 쓴 소설은 단 한 권도 빠지지 않고 읽었다. 지금 이 순간도 그의 소설을 생각하면 그 시절이 생각나 슬며시 미소짓게 된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영어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면 러브 스토리를 원서로 읽으라고 권한다. 의외로 쉽게 읽히면서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러브 스토리 이후에도 나는 제법 많이 원서로 읽었다. 매뉴얼은 물론이고 - MS-WORD는 버전이 바뀔수록 더욱 쓰임새가 풍부해지고 매뉴얼도 그에 따라 두꺼워진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뉴얼 번역본이 출판되지 않는다. - 존 그리샴, 마이클 크라이톤, 마이클 코넬리 같은 대중작가들의 소설은 번역본을 기다리다가는 목이 빠지므로 원서를 구해서 읽었다. 그리고 읽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철학이야기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나 이제는 정영목님의 번역본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을 후방에 두었으므로 마음 편하게 다시 도전하였다. PC에서 킨들로 원서로 읽어 나가다가 막히는 부분은 번역서를 보기로 했다.



독서백편 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은 거짓말이었다. 또는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사람들에게 먹히는 소리였다. 100번(까지는 아니지만)을 읽고 애꿎은 사전을 몇번이나 들락날락 거려도 뜻이 통하지 않는 문장들이 군데군데 나왔다.


윌 할아버지의 문장은 반 페이지가 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침표를 찾아서 구만리다. 혼자서 최대한 견디다가 미치기 직전에 번역본을 들춰보면 정영목 번역가는 "응, 그건 이렇게 해석하면 되는데."라고 하면서 정답을 내 놓는다. 정말 고수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원문이 이렇다.




All that remained was the scientific specialist, who knew “more and more about less and less,” and the philosophical speculator, who knew less and less about more and more. The specialist put on blinders in order to shut out from his vision all the world but one little spot, to which he glued his noes. Perspective was lost. “Facts” replaced understanding ; and knowledge, split into a thousand isolated fragments, no longer generated wisdom. Every science, and every branch of philosophy, developed a technical terminology intelligible only to its exclusive devotees ; as men learned more about the world, they found themselves ever less capable of expressing to their educated fellow-men what it was that they has learned. The gap between life and knowledge grew wider and wider ; those who governed could not understand those who thought, and those who wanted to know could not understand those who knew. In the midst of unprecedented learning popular ignorance flourished, and chose its exemplars to rule the great cities of the world ; in the midst of sciences endowed and enthroned as never before, new religions were born every day, and old superstitions recaptured the ground they had lost. The common man found himself forced to choose between a scientific priesthood mumbling unintelligible pessimism, and a theological priesthood mumbling incredible hopes.



여기서 나를 괴롭히는 문장은 "In the midst of unprecedented learning popular ignorance flourished, and chose its exemplars to rule the great cities of the world" 였다.


해석을 막는 장애물은 exemplar임이 틀림없었다.  영한 사전을 찾아보면 '모범 ; 전형'이고 영영사전을 찾아보면 "an admired person or thing that is considered an example that deserves to be copied ; a typical example"이다.


exemplar를 사전적 의미로 해석하면 위 문장이 도무지 해석되지 않았다.


마침내 항복하고 번역본을 봤다. 정영목 번역가는 exemplar를 사전의 뜻풀이에 없는 단어, 그러나 의역도, 오역도 아닌 '대리인'이라고 번역했다. 순간, 의미가 분명해졌다.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대상을 볼 때 흐릿하게 보이던 영상이 렌즈를 이리 저리 돌리다가 초점이 딱 맞을 때 갑자기 선명해지는 것과 같다.


위 단락의 전체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이제 남은 것은 ‘더욱더 적은 것에 관하여 더욱더 많이’ 아는 학문의 전문가와 더욱더 많은 것에 관해 더욱더 적게 아는 철학의 사변가뿐이었다. 전문가는 곁눈가리개를 이용해 시야에서 온 세상을 가리고 비좁은 한구석만 남긴 다음, 거기에 코를 처박았다. 전망은 사라졌다. ‘사실’이 이해를 대체했다. 수많은 조각들로 잘게 쪼개져 고립된 지식은 이제 지혜를 만들어내지 않았다. 모든 학문, 그리고 철학의 모든 분야가 배타적인 귀의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전문 용어를 개발했다. 사람들은 세상에 관해 배울수록, 자신이 배운 것을 교육받은 동료에게 표현하는 일을 더 어려워하게 되었다. 삶과 지식 사이의 틈은 점점 더 벌어졌다. 통치하는 자들은 생각하는 자들을 이해할 수 없고, 알고 싶은 자들은 아는 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전례 없이 배움이 늘어나는 와중에 대중의 무지가 번창하고, 이런 무지가 자신의 대리인들을 선택하여 세상 큰 도시의 지배를 맡겼다. 과학이 전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기부를 받고 떠받들어지는 와중에 매일 새로운 종교가 태어나고, 낡은 미신이 전에 잃어버렸던 땅을 되찾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비관주의를 중얼거리는 과학의 사제와 믿을 수 없는 희망을 중얼거리는 신학의 사제 사이에서 보통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위 번역문을 보고 혹자는 어색한 번역이니, 잘못된 번역이니 라고 할지 모른다.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 있는 댓글을 보면 그렇게 쓴 사람이 많다. 그러나 대부분, 번역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원문도 그렇게 쓰여졌다. 다만 원문의 내용이 어려울 뿐이다.


원문이 어려울 때는 번역자가 섣부른 의역을 할 것이 아니라 문장이 다소 어색하더라도 최대한 직역을 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철학이야기의 경우는 1926년에 세상에 나온 책이다. 그 문장을 요즘 사람이 100% 알 수는 없다. 원어민이 읽어도 마찬가지다. 그 시대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비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0년대를 살고 있는 한국의 번역자가 어떻게 정확하게 그 뜻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럴 때는 문장을 다듬으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개정판 서문 및 초판 서문을 읽는데만 꼬박 이틀이 걸렸다. 본문에 들어가니 예상대로 문장이 다소 쉬워졌다. 그렇지만 중간, 중간에 고통스런 지뢰가 있었다.


포기해야 할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우선, 번역가의 번역이 좋지 않을 때 원서를 찾아 읽는 것인데 정영목 번역가의 번역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원서를 읽어야 한다는 말인가. 구태여 찾는다면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서다. 또는 원어로 쓴 것을 직접 읽으면서 원어 문장의 독특한 맛을 음미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나이에 새삼 영어공부를 할 이유가 없다. 또한 문장의 뜻을 이해하는데 이미 burnout이 되어 버렸는데 무슨 얼어죽을 음미란 말인가.


그냥 번역본을 읽다가 번역본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게 느껴질 때 원서의 해당 부분을 찾아보기로 했다. 원서의 해당 문장을 봐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목표를 포기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포기하는 것이 습관이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늙어가면서 신체의 가동범위가 줄어들듯이 능력치도 줄어든다. 다만 전자는 눈에 보이고 후자는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또한 늙는다는 것은 시간이 부족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간이 부족할 때는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조금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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