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의 전략
판사는 판결로 재판을 종결할 수도 있고, 조정으로 재판을 종결할 수도 있다.
판결로 종결하면 판결문을 써야 한다. 판결문을 작성하는 일은 판사에게 중노동이 된다. 쌍방이 써 내는 모든 법률서면을 다 읽어야 하고, 증인 신문도 해야 하고, 그외 제출하는 모든 증거를 세밀하게 살펴야 하고, 그 사건에 맞는 판례와 법리도 연구해야 하고, 이 모든 과정을 문장으로 정리하여 판결문으로 나타내야 한다.
당사자가 항소나 상고라도 한다면 상급심의 판사들이 자기의 판결문을 검토하게 되므로 판결문에 설시되는 판단과정에 오류가 있어서도 안된다.
조정으로 재판을 종결할 경우에는 판결문을 쓰지 않아도 된다. 주문(主文), 즉 결론만 쓰면 된다. 또한 그것으로 확정되므로 항소나 상고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판사는 조정으로 재판을 종결시키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낀다.
조정으로 종결하기 위해서는 원고와 피고, 모두 그 조정안에 응해야 한다. 둘 중 한쪽이라도 응하지 않으면 조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게으르지만 수완이 좋은 판사는 적절하게 원고, 피고를 협박하면서 조정에 응하게 만든다. 내가 제시하는 조정안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판결로 갈 수밖에 없고 그 경우에는 응하지 않은 당사자에 대하여 더 불리한 내용으로 판결을 선고할 수 있다고 암시하여 겁을 준다. 그럴 경우 양쪽 변호사는 이 조정안에 응할 것인지, 끝까지 갈 것인지에 관하여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한다.
이 때 제일 필요한 것은 법률지식이다. 판결로 갈 경우에 판사는 법률과 법리, 그리고 증거로 판단해야 하므로 마음에 들지 않는 당사자라고 하여 함부로 불리한 판결을 선고하지 못한다. 항소심, 상고심에서 그 판결은 뒤집힐 수 있고, 법원 내부에서 자기의 평판이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사에게 어마어마하게 재량의 많으므로, 재량은 오판까지도 포함하므로 아무리 유능한 변호사라도 사전에 소송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제1심의 오판은 항소심에서 바로 잡아져야 마땅하지만 기계적으로 제1심 판결을 답습하는 판사들도 많기 때문에 제1심 판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상고심, 즉 대법원에서의 역전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지극히 선택받은 사건만 대법원에서 심리를 하지, 90% 이상은 제대로 검토도 되지 않고 기계적으로 기각된다. 대법원에 접수되는 엄청난 사건 수를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재판은 사실상 3심이 아니라 2심이다. 항소심이 사실상 최종심이다.
이와같이 조정안보다도 불리한 내용으로 판결이 선고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판사가 제시하는 조정안을 거부하고 밀고 나갈 때는 그에 대한 대비 내지 배짱도 있어야 한다.
윤씨는 타워 팰리스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가족도 그리로 이사를 하였으므로 그 아파트를 젊은 의사에게 전세 주었다. 전세보증금은 9억원이었다.
2008년에 서브 프라임 사태가 발생하였고, 우리나라도 그 여파를 맞아서 전세값은 폭락하였다. 타워 팰리스의 전세보증금의 시세도 8억원, 7억원으로 짧은 시간 동안에 계속 떨어졌다. 높이 나는 새가 떨어질 때는 더 많이 추락한다.
전세기한 만기가 다가왔는데 윤씨는 전세보증금을 돌려줄 수가 없었다. 새로 들어오는 사람이 9억원의 보증금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시세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윤씨가 현금 9억원 정도는 은행에 넣어 두고 살만큼 큰 부자도 아니었다.
세입자인 의사는 화가 났다. 지금 9억원을 돌려받아 다른 타워 팰리스 아파트에 전세를 들어 가면 평수도 더 큰 곳으로 이사할 수 있고, 만일 같은 평수로 이사 가면 돈 몇억원이 남기 때문이었다.
그 의사의 동서는 변호사였다. 동서인 정변호사가 윤씨를 만났다. 합의가 성립되었고 정변호사가 합의서 문구를 작성하였다. 합의내용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1)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때까지 의사는 계속 그 아파트에 살되 집주인은 그 의사에게 전세보증금의 이자로 매월 70만원씩 지급하기로 한다.
(2) 집주인이 새로운 세입자를 구해서 전세보증금을 돌려줄 수 있다면 8주 전에 통보해주기로 하고, 의사도 다른 곳을 구해서 나가게 되었을 때는 8주 전에 통보해 주기로 한다. 이를 어길 시에는 위약금 9천만원을 지급하기로 한다.
이 합의 이후 불과 몇 달도 되지 않아 적어도 타워 팰리스 동네의 금융위기는 해소되었는지 다시 전세값이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윤씨 소유의 아파트 전세보증금 시세는 10억원으로 오히려 금융위기 때보다 더 올라 갔다.
윤씨는 전세보증금 10억원을 주겠다는 세입자를 손쉽게 구했다.
9월 4일에 “새로운 세입자와 계약을 했습니다. 명도날짜는 11월 12일부터 15일 중으로 정해서 연락 주시면 계약금으로 쓰실 9천만원을 지금 먼저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 동안 못 빼 드려 죄송했는데 잘 되었네요. 진료 중일 거 같아 문자로 드립니다. 오늘 중에 연락주세요”라고 문자를 보냈다.
의사는 응답을 하지 않았다. 하루가 흘렀다. 답답해진 집주인은 9월 5일에 또 다시 문자를 보냈다.
의사는 9월 7일에 문자로 답신을 보냈다. 오늘부터 정확하게 8주째가 되는 날인 11월 2일에 이사를 나가겠으니 그 날짜에 전세보증금 9억원을 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윤씨는 새로 들어오려는 세입자에게 11월 2일에 이사 올 수 있는지 물었다. 그 사람은 아무리 빨라도 11월 12일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 날이 돼야 자기도 지금 살던 집에서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윤씨는 도저히 11월 12일 이전에는 전세보증금을 돌려주기 어려우니까 11월 12일 이후에 이사를 나가면 안되겠느냐고 의사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의사의 답신은 냉랭하였다. 8주째 되는 날인 11월 2일에 자신은 무조건 이사를 나가겠으니 그 날 만일 전세보증금 9억원을 돌려주지 않으면 지난 번 합의서에 따라 9천만원을 위약금으로 내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의사는 충분히 화가 날만 하였다. 불과 넉 달 전에는 9억원으로 지금보다 더 큰 아파트에 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9억원으로 오히려 더 작은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것이다.
윤씨는 '아니, 생돈 9천만원이 날아가게 되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대출이라도 일으켜서 9억원을 마련하여 11월 2일에 그 의사에게 주고 11월 12일에 새로 들어오는 세입자에게 받는 전세보증금으로 그 대출금을 갚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무려 9억원이나 되는 돈을 2주 정도 빌리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빌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 따른 이자비용도 많이 든다.
윤씨는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냥 버티라고 하였다. 11월 2일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지켜보자고 하였다. 집주인은 그렇게 될 경우 위약금으로 9천만원이 날아가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했다. 그렇게 될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11월 2일이 왔다. 의사는 이사를 나갔다. 11월 12일에는 새로 세입자가 들어왔다. 윤씨는 전세보증금 9억원 중 지난 번에 먼저 보낸 9천만원을 공제한 나머지 8억 천만원을 의사에게 온라인으로 송금하여 반환하였다.
문제가 생겼다. 의사가 그 집에 들어올 때 전세보증금 9억원으로 전세권 설정이 되어 있었고 의사가 전세보증금 9억원을 다 돌려받았는데도 전세권 등기 말소를 해 주지 않는 것이었다.
새로 들어온 세입자는 불만이었다. 무려 10억원이나 전세보증금을 주고 들어왔으니 전세권 설정을 받아야 하는데 선순위 전세권이 해지되지 않고 있으니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나는 그 의사를 상대로 전세권 등기 말소 청구를 하는 소송을 수임하였다.
이젠 의뢰인이 된 윤씨는 의사가 사는 동안 벽걸이 텔레비젼을 단다고 벽에 함부로 못을 박았고, 안전을 위하여 조금만 열리게 되어 있는 전동창을 환기가 잘 되게 한다고 더 넓게 열리게 만드는 공사를 하였고, 더 열리게 하는 대신 어린 아이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스테인레스 안전 바를 창문에 설치하였는데 그에 대한 수리비를 청구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런 소액의 수리비 청구는 쉽지 않다. 판사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이런 소액의 수리비 청구다. 수리비 청구 사건은 시간을 많이 빼앗고, 경우에 따라서는 현장 검증을 가거나 감정을 시켜야 하는 등, 재판업무가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그 수리비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하려면 감정인을 선임하여 감정을 하여야 하는데 불과 몇십만원, 몇백만원의 수리비 감정을 위하여 감정인을 선임할 경우 그 감정비용이 더 든다. 윤씨 주장이 모두 받아들여지면 감정인 비용은 상대방인 의사로부터 돌려 받을 수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될 수 있다, 그만큼 감정인의 보수는 비싸다,
윤씨에게 그 동네 수리업자로부터 수리비에 관하여 대충 견적서를 받아서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전세등기 말소 청구와 더불어 270만원의 견적이 나온 수리비 청구도 병행하였다. 아래에서 보듯이 조정절차에 들어갔을 때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의사가 선임한 정변호사는 윤씨에게 위약금 9천만원 및 위약금의 지연이자 200만원을 더한 9,200만원을 지급하라고 반소청구를 하였다.
전세권등기 말소를 구하는 우리 소송에 대하여는 9,200만원을 지급하기 전까지는 전세권등기 말소를 못해준다고 답변하였다.
나는 위약금 주장은 기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8주간이라는 것은 최소한 8주 이상의 유예기간을 두고 전세계약 해지 통보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 통보한 날로부터 8주가 되는 날이 무조건 명도날짜로 확정된다는 의미로 합의서를 해석하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윤씨가 어느 날 일방적으로 명도를 통보하고 그 날로부터 8주가 되는 날에 의사가 미처 집을 비켜주지 못하면 의사가 윤씨에게 위약금 9천만원을 물어줘야 한다는 것인데 의사는 그런 해석을 받아들이겠는가.
즉 최소한 8주 전에는 통보해주고 명도날짜는 당사자 사이에 조정이 가능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의서 문구의 합리적 해석이 된다. 집주인인 윤씨가 새로운 세입자를 구했을 때는 세입자인 의사에게 적어도 8주 전에는 통보를 해줘서 의사가 8주 동안에 이사 나갈 집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을 주라는 것이고, 의사가 이사나갈 집을 구했을 때는 적어도 8주 전에는 집주인에게 통보해줘서 집주인이 8주 동안에 다른 세입자를 구할 수 있는 시간을 주라는 뜻인 거다.
그래서 윤씨는 9. 4.자로 통보하면서 8주 후에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오게 하려고 하는데 11월 12일부터 15일까지 사이로 명도날짜를 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문자를 보낸 것이었다.
나는 위약금 인정이 되지 않으면 위약금에 대한 이자도 당연히 발생하지 않는 것이고, 만에 하나 위약금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전세권등기는 즉시 말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전세권등기가 담보하고 있는 대상은 전세보증금이지 나중에 파생된 위약금을 담보할 수는 없는 것인데 전세보증금은 이미 반환되었기 때문이다.
첫 재판 날이 왔다. 판사는 재판을 시작하자마자 "이런 재판을 계속 해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양쪽 분들이 다 웬만큼 있는 분들 같은데 뭐 이런 걸 가지고 소송을 합니까"하면서 짜증을 냈다. 조정으로 끝내고 싶다는 의사표현이었다.
나는 변호사들끼리 이야기 좀 하겠다고 하였다. 판사도 그래라고 하였다. 판사 입장이야 조정이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정변호사에게 위약금은 어차피 인정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정변호사는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꾸했다.
하지만 나는 정변호사의 약점을 안다. 동서가 의뢰인이라면 수임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을 것이고, 정변호사는 이 사건에 시간을 빼앗기기 싫어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 갔다.
"위약금은 어차피 인정되지 않을 것이니 그냥 전세권등기 말소해주는 것으로 하고 끝냅시다."
"위약금은 판사가 판단할 일인데 왜 그렇게 단정하십니까. 그리고 우리 쪽도 얻는게 있어야 할게 아닙니까."
"수리비 270만원을 전부 받지는 않겠습니다."
"그 수리비가 인정이 되겠습니까."
"인정이 안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고집하면 재판이 길어지겠지요. 괜히 이 사건으로 정변호사님 고생할 필요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시 법정으로 들어 갔다.
판사는 우리 이야기를 듣고서는, "수리비 견적서는 윤씨가 실제로 수리를 시행하고 지급한 수리비가 아니라 수리를 하면 그만큼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것인데 그게 인정이 되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수리를 하지 않은 상태로 이미 새로 세입자가 들어가서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수리가 오히려 집의 가치를 증가시켰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고 우리측의 약점을 귀신같이 찔렀다. 훌륭한 판사였다.
그러더니 정변호사보고 잠시 법정 밖으로 나가 있으라고 하였다. 판사는 내게 말했다.
"사실 나는 9천만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위약금을 500만원에서 1000만원 정도 물리려고 하였습니다. 윤씨가 전세기간이 끝났을 때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것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고, 그것 때문에 세입자가 많은 손해를 입었지 않았습니까. 사실은 서브 프라임 사태가 주범이긴 하지만..."
"그 문제는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전세보증금을 돌려줄 때까지 매월 이자 70만원을 주는 것으로 합의가 됨에 따라 일단락된 것으로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때부터는 집주인이 합의 내용을 어겼는지 여부에 따라 위약금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합의서의 위약금도 그런 내용이구요."
판사는 순간 말이 막혔다. 그러더니 수리비는 포기하라고 하였다. 대신 상대방에게는 위약금 및 위약금 이자 포기하고 전세권등기를 말소하라고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수리비 270만원 전부는 안되고 그 중 70만원은 포기할 의사가 있다고 하였다.
판사는 “70만원이요?” 라고 반문하더니 장난하느냐는 식으로 나를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이제는 정변호사가 법정에 불려 들어갔고, 나는 법정을 나와 중국에 있는 윤씨에게 전화를 하였다. 지금까지의 진행상황을 말하고 수리비는 전부 포기하자고 하였다.
돈 계산이 밝은 윤씨는 갑자기 욕심을 내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위약금 걱정에 노심초사하더니 이제는 수리비도 악착같이 다 받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윤씨 입장에서는 이미 변호사 선임료도 냈고, 인지값이니 소송비용까지 다 지급했는데 재판 한 번으로 끝나니 억울한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변호사가 별로 한 것 없는 것 같은데 공짜로 선임료를 먹는 것 같아 아까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의뢰인들의 일반적인 심리다. 사실 재판이든 뭐든 빨리 끝나면 더 좋은 것인데도 말이다,
구속영장을 기각시켜 주면 변호사가 하는 일 없이 쉽게 돈 번 것 아니냐고 선임료를 아까워 한다. 그러나 몇달씩 구속되어 있다가 보석으로 석방되면 변호사에게 감사해 한다. 더 좋은 것은 하루도 구속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의뢰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벌컥 화를 냈다. 그렇다면 재판 오래 끌고 가자고 하였다. 나는 재판 오래 가는 것에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였다. 윤씨는 그냥 알아서 해달라고 하였다.
정변호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법정에서 복도로 나왔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한 것이 없게 되니 위약금 이자에 해당하는 200만원이라도 달라고 하였다.
나는 “수리비 270만원 전부를 포기하겠으니 그것으로 정변호사님 역할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지말고 동서 분에게 전화 한 번 해보시지요”라고 공손하게 말했다.
정변호사는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복도 저 쪽으로 가면서 전화를 했다. 제법 오랫동안 전화통화를 하더니 “그렇게 하시지요” 했다.
법정에 다시 들어갔다. 판사님의 조정안대로 합의했다고 했다. 판사는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속으로 얼마나 우리가 예쁘게 생각되었을까. 판사는 사건 하나를 가볍게 해결한 것이다.
일을 많이 하나 적게 하나 월급은 똑같은데, 이 사건이 뭐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대형사건도 아닌데, 이렇게 판결문 안 쓰고 한 건 처리되면 판사 입장에서는 무조건 좋다. 본래 판사가 생각했던 정의감, 즉 내 의뢰인 윤씨에게 위약금으로 500만원 내지 1000만원을 물려야겠다는 생각은 이미 온데 간데 없어졌다.
정변호사도 행복하다. 의뢰인이 동서라서 수임료도 얼마 받지 않은 이 사건을 가지고 몇달씩 재판을 한다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첫날에 해결된 것이다.
나? 물론 행복하다. 내 의뢰인 윤씨? 순간적으로 본전 생각이 났지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결말이 자기에게 최고 좋은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 차렸을 것이다.
재판은 그 결과가 터무니없이 불리하지 않는 한 빨리 끝날 수록 좋다. 재판이 지속되는 동안은 의뢰인은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
협상의 전략은 무엇인가?
첫째, 그 분야에 관하여 잘 알아야 한다. 나는 법을 잘 알므로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이 바닥에 종사해 왔으므로 재판 과정에서 좋은 협상을 할 수 있지만, 거꾸로, 집을 사거나 펀드를 사면 영락없이 바가지를 쓸 가능성이 있다.
둘째, 이게 가장 중요한데 나만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같이 떨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자기의 약점만 보고 있지 상대방의 약점은 계산하지 않는다. 많은 협상 실패자들은 상대방을 너무 강하게 생각한다. 그러니 상대방의 블러핑에 쉽게 넘어간다. 또한 많은 협상 실패자들은 자기의 약점을 상대방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열어 보이지 않는 한 상대방은 의외로 자기의 약점을 모르고 있을 수가 많다.
셋째, 각자의 숨은 동기(이익)를 알아야 한다. 위 사건에서 판사는 재판을 빨리 끝내고 싶어하는 동기가 있고, 상대방 변호사 역시 재판을 빨리 끝내고 싶어할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사건이 사회의 이목을 끌고 있는 대형 사건이거나 성공보수금이 크게 걸려 있는 사건에서는 이렇게 빨리 합의가 되지 않는다.
넷째, 배짱이 있어야 한다. 그 배짱은 최악의 결과를 예측하고, 그 정도 결과 같으면 받아들이겠다는 계산에서 나온다. 이 사건의 경우에 우리가 위약금 부분에서 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최악의 경우는 재판이 6개월 동안 간다는 것인데, 나는 이미 합당한 수임료를 받았으므로 6개월간 더 가도 불만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마음껏 베팅을 할 수 있다. 배짱을 부렸을 때 잃을 것이 뭔지를 알고 있고, 그 잃을 것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정의 주문이 기재된 조정조서가 발급되었다. 조정조서에 기재된 내용은 확정판결과 똑같은 효력이 있다.
사무실 근처에 있는 법무사에게 대행 비용을 주고 전세권 등기를 말소시켰다. 이것은 내 서비스다. 깨끗해진 등기부등본을 윤씨에게 송부해줬다. 윤씨는 "감사합니다."라고 문자를 보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