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카이 세 번째 아침

by 이남경

12/27

07:36 AM

보라카이에서 맞는 세 번째 아침


오늘의 컨디션은 그럭저럭. 창 밖은 약간 흐리다. 보라카이에 오기 전에는 우리가 있는 기간 내내 비가 올 것처럼 보였는데, 막상 와보니 맑은 날이 더 많다. 아직까지는. 비가 와도 소나기가 잠깐 내리는 것에 그친다. 걱정했던 것과 다른 결과. 가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말이 떠오른다.


어제 보라카이의 가장 핫한 스테이션 2 구역 비치 앞 카페에 앉았을 때, 친구와 올해의 회고 질문들을 몇 개 추렸다. 추렸다기 보단 gpt 한테 10개를 추천받았다. 질문에 답하기 전 올해는 어땠어라는 심플한 인트로를 가져봤다. 나는, 힘들었지 라는 말이 가장 먼저 입 밖으로 나왔다. 올해 회고 하려면 소주를 한 박재기 두고 말해야 된다며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올해는 내게 힘든 한 해였다. 지금도 물론. 평소에 힘들다는 말을 많이 아껴서 하는, 그러니까 잘하지 않는 내가 요즘은 힘들다는 말을 가까운 곳과 글에서도 하고 있다. 스스로 힘들어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나 보다. 지금 한번 해본다. 힘들어도 돼. 힘들 수 있지. 그럴 수 있지. 그래도 뭔가가 달라지지 않는 걸 보면, 나는 어쩌면 내가 힘들어도 좋으니 그 노력에 대한 인정을 받고 싶은 것 같다. 결국 커리어 시장에서 필수적인, 타인에 의한 인정. 그것이 없으면 집단에서 나의 효용가치와 필요성에 대해 다시 질문하게 된다.


— 01:02 PM

날이 흐리더니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한다. 조식을 먹고 들어와서 어제 보다가 말았던 오징어게임 2를 다시 켰다. 이제 마지막화가 막 시작했다.


어제 마트에서 산 망고를 찹찹 썰어 유리컵에 담아 이불속으로 쏙 들어왔다. 망고를 다 먹고 2차는 초코 머핀. 침대 위에서 이불 덮고 먹는 맛이 아주 달콤하다.


— 06:47 PM

보라카이는 5시 30분만 넘어도 밖이 아주 깜깜하다. 오늘은 회사 일 처리할 것이 있어서 2시 조금 너머부터 일을 했다. 나의 직업은 IT회사 프로덕트 매니저다. 개발 일정 관리, 서비스 기획 등을 한다. 지난 9월부터 외주 개발팀과 서비스 하나를 만들고 있는데 매번 일정 관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오늘도 결과물을 공유하기로 한 날이었는데, 미팅 몇 분 전, 구현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미팅에 들어가서, 서로가 약속했고 그래서 내가 기대했던 것을 말한 뒤 오늘 어떤 것을 확인할 수 있냐고 물었다. 오늘 내로 전달 줄 것과 처음에 합의한 결과물 전체를 받아볼 날짜를 다시 조율했다. 미팅을 나와서 팀에 상황 공유를 하고, 개발팀에 전달할 자료를 챙기고, 디자이너에게도 리뷰를 남겼다. 이게 나의 책임이고 일이라지만, 수개월 전부터 내가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의 든다. 휴가에서 다시 돌아가면 대표와 솔직한 면담을 한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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