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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남경 May 26. 2020

엄마가 엄마가 되었던 스물다섯

이 글을 시작하며


  가장 먼저, 엄마를 글로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글을 쓸 때는 내가 먼저 북받쳐도 안되고, 기뻐도 안되고, 감동받아도 안되고, 슬퍼도 안되는데 엄마를 떠올리면 그렇게 차분해지지 못해서 글로 담아내지 못했다.


  예전에는 엄마를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났는데 그때 아마 20살이었 것 같다. 평생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고 살다가, 20살이 되어서 처음으로 엄마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엄마, 엄마라는 단어를 속으로 되뇌었는데 그 단어에서 파생되는 무엇인가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눈물부터 맺혔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한동안 왜 눈물이 나려고 하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했다. 아마도 못난 딸이었던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학부모 위원장이었던 엄마와 사고뭉치 중학생 딸


  중학교  나는 사춘기를 제대로 겪었다.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하고 사춘기 없이 평탄하게 자랐던 오빠랑은 달리 나는 중학교로 넘어가던 시점에 소위 일진이라 불리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같이 몰려다니는  멋져 보였고  소속감이라는 감정으로 모자랐던 나의 자존감을 웠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치마를 짧게 줄이고, 그때는 두발 자유가 아니었으니 자연 갈색 빛으로 엄마 몰래 염색도 하고. 짧치라고 불렀던, 허벅지가 훤히 보일만큼 짧게 줄인 교복 치마를 항상 가방에 챙겨 다니면서 학교가 끝나면 짧치로 갈아입고 아지트라 불리는 곳에서 친구들이랑 몰려있었다. 그렇게 늦게까지  다음 다시 긴치마로 갈아입고 집으로 가곤 했다. 게다가 그때는 지각해서 교실에 늦게 들어가는   그렇게 멋져 보였는지, 나는 줄곧 주인공이  듯한 기분을 느끼며 잦은 지각을 했고 결국 학주 선생님과 마주하게 되었다. 물론 지각뿐만 아니라 머리 길이, 갈색 빛이 도는 머리 , 규정에서 아슬아슬한 치마 길이, 모든  눈에  만큼 문제였다.


  학주 선생님과 개인 면담을 하는 횟수는 잦아졌고 교무실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시간도 길어지면서 나의 학교 생활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엄마에게로 들어갔다. 지금에서야 느껴지는 낯 뜨거운 사실은 그 당시에 우리 엄마가 학부모 운영위원장이었다는 것이다. 매일매일 학교로부터 걸려오는 전화에 엄마는 얼마나 낯뜨거웠을 것이며 당신이 딸이 이렇게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말해야 했을 선생님들은 얼마나 민망했을까.



처음으로 엄마의 우는 모습을 보았던 날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날이 있다. 그날도 난 사고를 쳤고 교무실로 불려 갔다. 그리고 개인 면담을 할 수 있는 휴게실로 가서 고개를 숙이고 학주 선생님을 기다렸다. 학주 선생님은 곧 휴게실로 들어오셨는데 한 손에는 하키 채를 들고 계셨다. 엉덩이를 두 대 맞았다. 아팠다. 하지만 사춘기 중학생에게 아픔과 꾸중은 자랑거리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되곤 했기에 그때의 나는 여느 때보다 의기양양하게 교실로 올라갔다.


  아마 그날, 처음으로 학교에서 엄마를 불렀던 것 같다. 전화로 끝나는 게 아니라 부모님을 학교로 불러낼 만큼 나는 잘못을 했다. 면담 시간을 가진 후 엄마와 나는 교무실 문을 나와서 학교 건물을 빠져나왔다. 해가 저무는 시간이었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은 주황빛 햇살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그곳을 가로질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무 말 없이 차에 타는 엄마를 따라서 나도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에 시동이 걸렸고 주차장을 나와서 정문을 통과했다. 엄마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차로 10분이었다. 다리를 지나, 오른쪽으로 꺾고, 소방서를 지났다. 방지턱을 넘고 이어서 교회를 지나고, 경찰서도 지나고, 큰 아파트 하나, 둘, 세 개를 지났다. 방지턱을 하나 더 넘으니 집에 다다랐다. 엄마는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나는 엄마를 따라 내렸다. 열쇠를 가지고 대문을 열 때까지, 대문을 열고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 때까지. 엄마는 말이 없었다. 현관이 열리고 신발을 벗고서 거실로 들어섰다. 그때 소파 앞에서 엄마가 멈춰 섰다. 나도 따라 멈췄다. 엄마는 곧이어 소파에 앉으셨다. 나는 그대로 멈춰 있었다. 3분쯤. 정적이 흘렀을까.

  엄마가,

  울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보는 엄마의 눈물이었다. 눈물을 넘어서 울음이었다. 엄마가 엉엉 울었다.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섰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울어야 할지 무릎을 꿇어야 할지 휴지를 건네어야 할지. 죄송하다고 빌어야 할지. 차마 그렇게 우는 엄마 앞에서 죄송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런 엄마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

.

.


  여기까지가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어린날의 기억이다. 그날 엄마는 엉엉 울면서 내게 소리쳤던 것 같다. 왜 그러냐고. 왜 나쁜 짓을 하고 다니냐고. 그리고 나서 그날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엄마의 기억 속에는 생생하게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이유를 알아가는 나이, 스물다섯


  20살, 처음으로 엄마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던 날.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이 이것이었다. 그리고는 궁금해졌다. 알고 싶었다. 손으로 세어보니 겨우 4년 전 그날, 엄마가 그렇게 울었던 이유를.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계속해서 궁금해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엄마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리고 25살, 그날로부터 9년이 지다.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엄마가 그렇게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던 이유.


  엄마는, 엄마였기 때문에.


  우리 엄마는, '10번만 참으면 다시 돌아올 거라길래 정말 9번쯤 참으니 네가 다시 마음을 다잡더라'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얇은 손목으로 밤늦게까지 벌레 가득한 호박을 깎으며 우리를 키워낸 사람이었다. 엄마는, 전당포에 카메라를 맡겨 우리 급식비를 내고, 남은 돈으로 소고기 한 줌을 사서 미역국을 끓여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몰랐다.

  내가 25살이 될 때까지 엄마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우리를 키우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혼자서 감내했는지.

  엄마가 짊어진 세 사람의 삶의 무게가 어땠는지.

  엄마가 엄마가 되었던 25살이 얼마나 아름다운 나이였는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중학교 3학년 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교무실 한켠에 마련된 휴게실에 무릎 꿇고 앉아 반성문을 썼던 그때로. 여전히 엄마를 글로서 덤덤하게 맞이하는 일은 어렵다. 지난 시간 동안의 엄마를 생각하면 쉽사리 덤덤해지는 것도 이상하다. 그래도 이제 조금씩 엄마를 글로 담아내며 더 많이 감사하고 추억하고 간직하고 싶다.


To. 우리 엄마

여전히 엄마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딸이 남기는 글이에요. 항상 감사하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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