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김 워커 (3화)

by 에이나


그녀가 열다섯이었나. 해가 저무는 숲길을 뛰었다. 정신없이. 신발이 벗겨지도록. 워커가 그녀를 뒤쫓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고 난 하늘은 노을이 불타며 사위어가고 땅은 진흙탕으로 발목까지 빠져들었다. 군화 신은 발로 성큼성큼 워커가 그녀를 쫓아왔고 그녀가 공포에 질릴수록 그는 더 웃었다. 한 번 또 한 번 그에게 잡혀서 진흙탕에 얼굴이 처박히다 보니 그녀는 어느 순간 무섭다는 생각이 더는 들지 않았다. 공포, 무서움, 그런 것보다 더 나쁜 무언가가 괴물처럼 가슴을 뚫고 나오려다 진정되기를 반복하며 그녀의 눈빛은 서늘해졌다. 마침내 메리 김 워커로 불리기 시작한 그녀는 그에게 급여를 줄 필요가 없는 젊고 튼튼한 가정부이자 성적 배출구였고, 그럼에도 신중하게 결혼을 추진한 그녀의 부친은 그러한 사정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좋아했을까? 조금이라도 어떤 면에서 그녀도 그가 좋은 적이 있었을까? 그런 물음은 의미가 없었다. 그는 샤이엔 산에 위치한 방위사령부에 복무하는 동안 자주 사병들을 집으로 데려왔다. 언제든 내키면 선심을 쓰는 너그러운 얼굴로 사병들에게 그녀를 내주기도 했다. 지독히 만취한 날에 그는 사병 몇과 합심하여 그녀의 손발을 밧줄로 묶었고 묶인 발줄마다 긴 장작을 끼운 다음 나무와 나무 사이에 매달아 놓은 적도 있었다. 고개를 젖히고 통닭처럼 장작에 매달린 그녀의 옷을 들치고 그는 권총을 겨누었고 사병들은 킬킬대며 저속한 단어를 내뱉었다. 그는 결국 총기 오발 사고로 죽었다. 불운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녀가 불행할 일은 물론 없었다. 불운 따위가 그녀를 약하게 한 적도 없었고 이전에 필적할만한 새로운 불행도 있을 수 없었다. 그녀에겐 그저 깊고 단단한 나무 둥치처럼 자리한 기억이 있을 뿐이었다.

유리 김 워커.

빨간 액자 속에 담긴 아기의 사진을 바라보며 그녀는 말했다. 기저귀를 찬 엉덩이를 끙 들고서 엎어질 듯 말 듯 아장아장 걷다 와 이게 되네 하고 놀라듯 돌아보던 모습이 생각나 그녀는 활짝 웃었다. 유리는 그녀에게 사랑의 기쁨과 희망을 알게 해 준 유일한 존재였다. 김 씨와 메리, 워커와 사병들을 섞어놓은 것 같은, 그래서 누구도 닮지 않은 아들을 바라보며 웃던 그녀의 입꼬리가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워커는 그녀가 아이를 낳자 유리로 이름 짓고 자신의 성을 붙이려 했다. 그녀의 부친은 김이란 성도 붙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워커가 그녀를 서류상의 워커 부인으로 만들어 주자 못 이긴 척 입을 다물었다. 워커는 자기 아들에게 절대로 ‘김’ 따위의 천한 성을 붙이지 말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부친은 김이야말로 귀한 금덩어리를 뜻한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녀는 워커의 광기나 부친의 집요함이 아이를 다치게 하지 않기만을 바랐으나,

유리 김 워커.

아이는 처음으로 쓴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적었다. 그걸 본 워커는 격분했고 순식간에 아이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문을 꽝 닫고 잠갔다. 자지러지는 아이의 비명이 들리고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문을 열라고 외치며 정신없이 두드리던 그녀는 비명이 멈추자 오히려 끔찍한 예감에 입을 막고 주저앉았다. 뜻밖에도 워커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문을 열라고 애원하던 그녀는 막상 문이 열리고 나자 너무도 무서운 나머지 아나콘다에 휘감긴 듯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문 옆에 벽을 겨우 짚었다. 바닥에 누워 있는 유리의 조그만 머리통이 보였다. 한쪽 귀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리가 고개를 조금 틀고서 쳐다보자 숨 막혔던 가슴이 뚫리며 울음이 차올랐다. 아가. 하지만 유리를 안기 위해 몸을 굽힌 순간 그녀는 휙 머리채가 잡혀서 천장을 바라보게 되었다. 한순간 다가온 벽에 이마를 처박히고 정신을 잃으려다 겨우 눈을 떴다. 아가. 하지만 워커의 군화 신은 발길질에 그녀는 까무러치고 말았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생생한 그때의 감각이 되살아나며 현기증을 느낀 그녀는 쟁반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빨간 액자 속 유리의 얼굴이 뿌옇게 안개에 덮이며 초점이 맞지 않는 볼록렌즈 모양으로 희미해졌다. 시큰해진 두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고서 그녀는 이를 악물듯 애써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촉촉해진 눈빛은 평소보다 더욱 빛났다. 발가락으로 바닥을 움켜쥐듯 한 걸음 한 걸음 옮겨서 일인용 소파와 테이블이 놓인 거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아침을 언제나 티브이 앞에 앉아서 먹었다. 고장이 난 티브이는 먹통이 된 지 오래였지만 상관없었다. 볼록한 브라운관과 접시를 번갈아 보며 우물우물 빵을 씹고 차를 마시며 식사를 마치고 나면 거실 창으로 보이는 나무들, 울퉁불퉁 주름이 팬 나무껍질과 평화롭게 흔들리는 잎들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그늘 속에서 실처럼 가느다란 빛들이 다투어 하늘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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