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김 워커 (4화)

by 에이나


빈 접시가 놓인 쟁반을 밀쳐 두고 테이블의 서랍장을 열어 안에 든 양장제본 노트와 펜을 꺼냈다. 한 장 한 장 찬찬히 노트를 넘기며 읽던 그녀는 빈 페이지가 나오자 슬며시 펜을 쥐고 생각하더니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창문으로 레몬빛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적막한 거실에 슥슥 단조로운 리듬으로 글씨 쓰는 소리만이 들리는 가운데 이따금 새소리나 바람의 기척이 섞여 들었다. 한참을 적어나가던 그녀는 문득 손을 멈추고 누가 부르기라도 한 듯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어깨 뒤 허공으로 눈빛을 번득이던 그녀가 물었다.

어땠냐고? 기분 말이지?

그녀는 펜을 놓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입을 열었다.

굉장했지. 부들부들 떨렸어. 더럽고, 치사했어. 하지만 지금은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단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유리야.

유리를 부른 다음 순간 그녀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내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창밖의 나무로 시선을 옮겼다. 말 상대가 없어서일까.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혼자 중얼거릴 때가 있었다. 저도 모르게 그러는 버릇이기도 했지만 어쩔 때는 그러고 싶어서 일부러 말을 내뱉기도 했다. 유리야, 하고.

워커는 목말을 태운 유리와 함께 샤이엔 산으로 야영을 한다고 가서는 삼일 만에 혼자 돌아왔다. 동공이 커진 이상한 눈빛으로 워커는 사고가 있었다고 말했다. 아이는 찾지 못했다고 했다. 이마에 땀이 맺힌 그는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도 했다. 시신이라면, 애가 죽었다는 말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유리는 고작 네 살이었다. 건강하던 아이가 갑자기 죽다니. 그녀는 왜, 어떻게 죽었는지 물었고 정말 죽은 게 확실하냐고 따지며 울다 혹시 어디다 팔아먹은 건 아니냐고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멍하니 붙들린 워커는 그녀를 밀쳤다. 한마디만 더 하면 죽여 버릴 거라고 협박하며 쓰러진 그녀를 군홧발로 밟고 또 밟으며 화를 키운 그는 급기야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지그재그로 끌고 가다 층계 앞에 이르자 발로 내팽개쳐서 굴러 떨어지게 했다. 그녀의 부친이 워커에게 대든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대든 정도가 아니라 쿵쾅대고 소리치며 몸싸움을 하는가 싶더니 끝내는 지붕에 폭탄이 떨어진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총소리였다. 그녀는 층계 끝 바닥에 얼굴을 붙이고 널브러진 채로 그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사방이 조용해진 가운데 희미한 의식 너머로 그때부터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메리 김 워커, 넌 항상 도망치려고만 했었지. 하지만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이라도 언제든, 이 지긋지긋한 걸 너 스스로 끝장낼 수가 있어.

그녀는 자신에게 속삭인 그 목소리가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언제든 떠날 수 있다면 떠나기 전까진 견뎌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머릿속을 포근하게 맴돌았다. 아주 오래전에 했던 그 생각이 다시 떠오르자 그녀는 깊숙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사무치는 고통이나 증오, 수치심, 그 어떤 것도 세월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했다.


노트를 덮고 펜과 함께 다시 서랍에 넣었다. 끙, 하고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날달걀을 하나 깨뜨려 먹고 사과 주스를 마신 뒤 설거지를 했다. 아이스박스를 열고 저녁을 위한 재료점검도 잊지 않았다. 아침은 가볍게 먹지만 저녁에는 고기와 채소로 요리했고 맥주나 포도주를 한 잔 곁들였다. 이 층으로 다시 올라가 머리를 묶고 잠바와 바지로 갈아입었다.

장갑을 어디 벗어두었더라.

한참을 찾다 포기하고 서랍을 열고는 새 걸로 꼈다.

뭐야, 이런.

현관을 나서던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잠바 주머니에 장갑이 있었다. 문을 열자 겨울의 끝자락을 지나온 바람이 양 볼에 스쳤다. 복식호흡을 하며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이내 찡그리며 다시 웃었다.

나 원, 오늘 날 잡았네.

실내화를 신은 채로 현관을 나섰다가 되돌아와 입구에 세워둔 장화를 신었다. 진득한 땅에 발자국을 찍으며 그녀는 마당에 들어섰다. 숲에서 살면 음식을 하고 집을 데울 화로와 벽난로에 들어갈 장작이 늘 필요했다. 주변에 나뭇가지를 줍기도 했으나 함부로 나무를 베지는 않았다. 대신 차를 몰고 샤이엔으로 가서 생필품을 살 때마다 장작을 팰 수 있는 통나무들을 사 왔다. 통나무들이 쌓여 있는 마당에 선 그녀는 나무 둥치에 찍어둔 도끼를 빼서 손에 들었다. 눈으로 도끼날을 확인하고 반들반들한 도낏자루도 한번 쓰다듬었다. 조부가 모국에서 가져왔다는 이 도낏자루는 ‘박달’이라는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졌다. 얼마나 단단한지 도끼날은 닳거나 부서져서 수십 차례 교체를 했어도 도낏자루는 그동안 한 번도 바꾼 적이 없었다. 도낏자루 안쪽 면에는 문양인지 글씨인지 모를 암호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왠지 그 오돌토돌한 부분을 한 번 더 쓰다듬곤 했다. 그리고 8파운드가 넘는 묵직한 도끼를 가뿐히 휘두르며 그녀는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허리를 좌우로 돌리고 머리, 어깨, 무릎, 발, 다시 무릎, 발 그리고 발목의 관절까지 풀어주는 건 장작 패기의 준비 동작이었다. 질척한 땅에서 흙이 튀며 장화를 더럽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장화를 닦아 말리는 것도 엄연한 하루의 일과였으므로 그녀는 신나게 땅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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