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방아를 찧고 당혹해하던 그의 얼굴에 금방 살기 어린 분노가 서렸다. 그제야 떠오른 기억에 그녀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두 달 전인가 샤이엔에 갔던 날, 돌아오던 길에 들른 싱클레어 주유소에서 그녀는 이 남자의 얼굴을 분명 보았다. 실물이 아니라 종이에 프린트되어 붙은 사진을 통해서였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아구아피에스타스(aguafiestas)’가 매직펜으로 낙서되어있어 눈여겨본, 지명수배자 전단의 그 얼굴과 이 남자가 동일인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두근대던 그녀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휘갈겨진 낙서는 ‘훼방꾼, 즐거움이나 기쁨을 방해하는 자’란 의미였다. 워커가 스페인계의 한 사병과 놀아날 때 그녀는 무심코 벌컥 문을 연 적이 있었다. 그때 워커의 벌거벗은 상대가 그녀를 욕하며 외친 말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유리, 그놈의 이름이 바로 유리였다. 워커는 아들의 이름을 그 더러운 놈과 같게 지었던 거였다. 떨리는 손으로 허둥대며 그녀는 다시 도끼를 빼내려 애썼다.
우라질!
진흙탕에 처박혔던 그가 욕을 하며 박차고 일어섰다. 동시에 가까스로 쏙 빼든 도낏자루 양단을 붙잡은 그녀가 힘껏 그를 밀쳤다. 남자는 다시 엉덩방아를 찧었다. 도낏자루를 머리 위로 쳐들고 내리칠 기세로 그녀는 소리쳤다.
꺼져!
통나무에 박힌 도끼날은 급히 빼낼 도리가 없어 보였지만, 도낏자루를 쥐기만 해도 그녀는 충분했다. 머리 위를 위협하는 그녀의 연장을 피하느라 그는 철퍼덕대며 자꾸만 미끄러졌다. 하지만 진흙탕을 손에 짚고 뒷걸음치면서도 그는 줄곧 히죽거렸고 그녀는 속으로 겁이 났다. 물론 오기도 치밀었다.
마녀 같은 할망구 성질머리하고는.
계속해서 욕지거리해대는 그를 향해 그녀는 꽥 소리 지르며 다시금 도낏자루를 치켜들었다.
꺼지라고!
마침내 그가 집 밖으로 뛰어갔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녀는 현관의 포치로 걸어가 흔들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시 나타나기만 해 봐라, 망할 놈 같으니.
오후의 볕이 제법 따뜻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무에 가려진 입구를 주시하며 흔들의자에 앉아있던 그녀는 긴장이 풀리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잠깐이라도 누워서 눈을 좀 붙일까 싶어 일어나 현관 문고리를 잡는데 왠지 뒤통수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설마. 돌아본 그녀는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아까 그 남자였다. 어떻게 뽑았는지 그녀의 도끼날을 들고 저만치 서 있던 그가 차갑게 웃더니 코뿔소처럼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소스라친 그녀가 급한 마음에 도낏자루를 창처럼 던졌으나 달려오는 그의 뒤로 빗겨 날아가 진흙탕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녀는 황급히 문을 열고 이 층으로 두 칸씩 계단을 뛰어 올라가 침대 밑에 숨겨둔 사냥용 산탄총을 집어 들었다. 총알은 단 한 발이었다. 쫓아온 그는 그녀가 들고 있는 총을 보고 놀랐지만 이내 비웃는 여유를 보였다.
꺼져 제발, 어서! 그녀는 총구를 들이대며 소리쳤다. 제대로 맞으면 단 한 발에도 상반신이 너덜너덜해질 무기였다. 쓰러진 부친을 대신해서 그녀가 수습해야 했던 워커의 마지막 모습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과연 이 자를 쏠 수 있을까. 그녀는 자신할 수 없었다. 이놈은 대체 누군가? 그녀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자세히 보니 한쪽 눈이 찌부러지고 자잘한 상처가 수도 없이 난 몰골이 너무도 한심하고 측은해 보였다. 누가 저런 아들을 낳았을까. 지독한 세상을 굴러다니다 여기까지 왔겠지. 그녀는 가만히 물었다.
날 죽이려고? 도대체 왜?
남자는 어깨를 들썩 올려 보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살려고.
살려고? 어이없는 말이지만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녀 역시 살고 싶었다. 이제야 비로소 찾아온 자신의 삶을 그녀는 미치도록 살고 싶었다. 사라져 가는 비참한 기억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노트에 써 내려간 이야기도 이제 시작일 뿐인데…. 그녀는 층계 벽에 걸린 죽은 이들이 침묵 속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들도 살려고 했었다.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그녀가 한 발짝 내려서자 그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계속 꽉 깨물고 있었던지 입술에 비린 맛을 훔치자 피가 손에 묻어났다.
네가 살려고 나를 죽일 필요는 없잖아. 둘 다 살아갈 방법이 있을 텐데.
그의 얼굴에 어림없다는 비웃는 표정이 스쳤지만 어쩌면 그녀의 말을 재고해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총신을 겨눈 채 기다렸다. 어느새 내려앉은 해가 반쯤 열린 문밖으로 보이는 마당, 눈과 흙이 엉긴 땅을 젖은 빛깔로 물들이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을수록 액자 속 얼굴들의 윤곽은 희미해져 갔으나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들의 모습은 더욱 또렷해졌다. 다시 태어나면 부디 행운이 있기를. 나와 이런 대거리를 하게 된 너 역시 천사 같은 어린 시절이 있었겠지. 그녀는 중얼거리다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