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케어 디자이너가 미국에서 눈여겨본 일곱 가지
한국에서 개원의의 단독 개원 비율이 80% 정도인 것과 달리, 미국에서는 의사들이 그룹을 이루어 진료하는 방식(group practice)이 일반적이다. 지난 30년 간 협상력 강화, 수익성, 동료 의사들과의 협조와 전화 상담 및 휴가 분담, 환자 치료의 질 향상 등을 위해 여러 의사들과 그룹을 이루어 진료를 하는 의사들의 비율이 상당히 증가했다. (참고. 의료계 지성 의학한림원도 우려 "일차의료 날로 악화" (메디컬타임즈, 2019/2/9), Physician Group Practice Trends: A Comprehensive Review (Journal of Hospital & Medical Management, 2016))
그래프. 2018년 미국 진료 방식의 규모별 분포 현황. 단독으로 개원하는 의사들의 비율은 17.9%였다. (출처. Statista - Distribution of U.S. medical practices by size in 2018)
임신 중 KP Bellevue Medical Center에 근무하는 여러 산부인과 의사들 중 내가 원하는 시간에 예약이 가능했던 3명의 의사를 번갈아 보며 진료를 받았다. 출산 시 세 분 중 한 명이 함께하기를 기대했으나, 실제 병원 입원 시 제일 먼저 내 상태를 평가한 당직 의사와 응급 제왕절개 수술을 담당한 당직 의사는 그동안 만나지 않았던 KP의 또 다른 산부인과 의사들이었다. 여러 명의 의사들이 그룹을 이루어 환자를 진료하고 당직 일정에 따라 입원 환자를 담당했다. 어느 의사를 만나든 반갑게 맞아주었고 다음 진료 때 자신이 아닌 다른 의사를 만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나는 한 의사의 환자가 아니라 KP Bellevue Medical Center 산부인과의 환자였다.
아이의 주치의로 동네의 KP Medical Center에 근무하는 소아과 의사 중 한 명을 선택했지만, 실제 진료 예약 시 지정된 주치의뿐만 아니라 워싱턴주 내의 KP Medical Center들에 근무하는 소아과 의사나 가정의학과 의사 누구든지 진료를 예약할 수 있다. 그래서 아이 주치의와의 일정이 맞지 않았던 경우, 다른 지역에 근무하는 소아과 의사와의 진료를 예약해 진료를 받은 적도 있다. 또 아이의 상태에 따라 당일에 바로 진료가 필요했던 경우, 같은 동네의 KP Medical Center에서 당일 예약 진료로 배정해둔 시간에 진료가 가능한 소아과 의사의 진료를 받은 적도 있다. 누구에게 진료를 받든, 내 진료 기록을 주치의가 EHR에서 확인할 수 있기에 주치의에게 따로 연락할 필요는 없었다.
각 회원이 주치의를 갖도록 하는 HMO지만, 주치의 외의 다른 일차 의료 담당 의사를 만나는 데 제한이 없으며, 현재 주치의보다 더 마음에 드는 일차 의료 담당 의사를 찾았고 그 의사가 새로운 환자를 받고 있다면 언제든지 주치의를 변경할 수 있다. 다만, 일차 의료가 아닌 전문과의 진료 예약은 최근 3년 간 진료를 받았던 전문과 의사를 제외하고는 주치의와의 상담 후 의뢰를 받아 예약하도록 되어있다.
화면. KP 앱에서 아이의 진료를 예약하는 화면. 주치의를 비롯한 일차의료 의사는 누구든 바로 예약할 수 있지만(왼쪽) 알러지 전문의와 같은 전문과의 의사는 지난 3년 간 진료를 받은 의사가 아니라면 바로 직접 예약할 수 없고(오른쪽) 주치의나 일차의료 의사의 의뢰를 받아서 예약해야 한다.
일단, 홈페이지나 앱이나 전화를 통해 일단 진료를 예약하면 주치의와 함께 팀으로 일하는 일련의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진료를 예약하면 예약일 며칠 전 으레 주치의의 Medical Assisant(MA)로부터 몇 개의 질문을 담은 메일을 받는다. 첫째, 진료에서 상담하고 싶은 주된 내용이 무엇인지(What is your main concern for the visit?), 둘째, 해결하고 싶은 다른 요구나 질문이 있는지(What other needs or questions would you like our team to address?). 그리고 EHR에 저장된 알러지, 투약, 건강 관련 이슈 중 바뀐 내용이 있으면 먼저 알려달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정보를 미리 정확히 확인함으로써 진료 시간 활용을 최대화하고자 한다며, 의미 있는 진료를 위해 협력해주어서 감사하다(This information will help us maximize our time together and to check for accuracy. Thank you for partnering with us to make your visit meaningful. )는 말로 끝을 맺는다.
진료 전에 이 메일을 받을 때마다 진료를 위해 미리 연락하고 준비해주는 진료팀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진료 며칠 전, 받았던 질문에 대한 답장을 작성하며 나 또한 앞두고 있는 진료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하고 필요한 자료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주치의와 그의 팀이 나를 수동적인 환자가 아니라 제 몫을 해야 하는 파트너로 대하는 모습에서 존중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낀다.
화면. 주치의와의 예약된 진료 며칠 전 주치의의 MA로부터 받게 되는 메일. 진료 때 상담하고 싶은 주요 내용과 해결하고 싶은 다른 요구나 질문에 대해 진료 전에 먼저 파악해 진료 시간 활용을 최대화하려고 한다는 설명이다.
진료일에 클리닉의 로비에서 도착했음을 알리는 '체크인'을 진료 시간 15분 전까지 마치고 대기하면, 담당 의사의 간호사(RN)이나 Physician Assistant(PA)가 마중 나와 미리 준비되어 있는 환자 별 진료실로 안내한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EHR에 투약 현황, 진료 이슈 등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해 입력한 후 잠시 기다리도록 한 후 방을 나간다. 이어 주치의가 들어와 진료를 본 후 상담 내용을 EHR에 입력한 후 진료를 마치면, 이어서 담당 의사의 간호사(RN)이나 Physician Assistant가 다시 들어와 주사와 같은 처치를 하고 오늘의 진료 요약지의 출력본을 전달한다. 잘 짜인 각본처럼 각자의 역할에 따라 등장과 퇴장을 이어간다.
진료 이후, 아이의 변비나 알러지와 같이 때에 따라 메일로 주치의에게 연락하게 되면 주치의가 바로 답장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담당 간호사(LPN 또는 RN)가 내용을 확인 후 먼저 답을 하거나 의사에게 포워딩하겠다는 답을 하기도 한다. 때로 주치의의 답장이 늦어졌던 경우, 같이 근무하는 다른 의사가 등장해 내 주치의가 휴가 중임을 알리며 대신 답을 주기도 했다.
한 번의 진료를 위해 주치의뿐만 아니라 담당 간호사나 PA가 바통을 주고받듯 번갈아 등장하고, 주치의에게 보낸 메일에 자기 일처럼 답하는 팀의 직원들과 동료 의사들을 보며, 주치의의 일은 혼자 하는 예술이 아니라 팀으로 협업하는 디자인 프로젝트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