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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효진 Mar 15. 2021

주치의를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 - 5) 주치의의 대안

헬스케어 디자이너가 미국에서 눈여겨본 일곱 가지

주치의의 진료를 받으려고 KP의 웹사이트나 앱에서 가장 빨리 진료를 볼 수 있는 날짜를 확인해보면 대개 1주일 이상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진료를 위해 주치의 한 명만을 볼 수 있도록 제한을 받는다면 이런 갑갑함과 불안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주치의 지정이 필수인 KP는 모순적인 것 같지만 주치의를 만날 수 없는 경우를 위한 대안을 확실히 제공한다. 주치의를 만날 수 없을 때 케어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확실하기에, 주치의를 만나지 못해도 여전히 나는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누군가를 원망할 필요가 없다.


채팅 상담 Care Chat

코로나가 유행하자, KP는 비대면 진료 옵션들을 강화하고, 대면 진료는 의료진을 꼭 직접 만나야 할 때에만 선택하도록 권하고 있다. 그래서 대면 진료나 주치의 및 이전에 진료를 받은 의사들과의 이메일 연락 외에 채팅(Care Chat), 화상 진료(Video Visit)와 전화를 통해 의료진을 직접 만나지 않고도 즉시 상담을 받을 수 있다. 덕분에, 진료가 필요할 때마다 예약 후 몇일에서 몇 주의 대기를 거쳐 차를 타고 이동하는 복잡한 과정 없이 그때그때 바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건강보험에 상품에 따라 온라인 상담 이용에 대한 비용이 다른데, 내 경우 채팅 상담 이용 시 보험사에는 비용을 청구하나 내가 지불해야 하는 본인 부담금이 없기에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바로 상담을 신청해 해결책을 찾게 됐다. 병원 다니기 가장 어려운 미국에 살아 슬프던 내가 코로나 이후 미국에서 그 어느 때보다 쉽고 편하게 진료와 상담을 받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고 있다.


화면. 화면. KP WA 홈페이지에서 채팅 서비스를 열었을 때 보이는 옵션들. 자정 가까운 시간임에도 의료진(Care Provider)과의 상담과 Consulting Nurse와의 상담이 가능하다.

그래서 5개월 된 아기의 기저귀 똥에서 피 조각들을 발견했던 월요일 오후 3시, 며칠 동안 계속된 눈의 가려움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자 더 이상 그냥 있으면 안 되겠다는 자각이 들었던 토요일 아침, 아이의 엉덩이에서 발진과 농포를 발견했던 토요일 저녁 6시, 불면증이 계속되다 밤을 꼴딱 새운 후 이제는 진짜 수면 보조제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던 일요일 아침, 나는 크게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문제들에 직면할 수 있었다. KP의 홈페이지에 로그인해 Care Chat 메뉴를 찾아 상담을 신청하고 누군가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대개는 가정의학과 의사가 연결되었고, 때로 NP와 PA를 만났고, 아이에 대해 상담할 때는 소아과 의사에게 다시 연결되기도 했다. 채팅 상담을 통해 연결된 의료진들과의 상담으로 집을 벗어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안도감과 함께 KP를 선택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매번 들었다.


화면. 눈의 가려움증으로 채팅 상담을 받았던 예. 전문 간호사(NP)가 연결되어 내 증상에 대해 상담하고 알러지 약을 추천해주었다.

의사와의 이메일 연락, 채팅 상담, 화상 진료와 같은 비대면 진료를 강화하는 KP의 변화는 비단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1981~1996년 출생) 중 많은 이들이 주치의나 일차 의료 의사(PCP)의 진료를 예약한 후 몇일에서 몇 주를 기다려 휴가를 내고 클리닉에 찾아가 진료를 받는 방식에 불만을 표해왔다. 그래서 아플 때 예약 없이 찾아가 즉각적으로 필요한 도움을 받고 상황을 끝낼 수 있는 리테일 클리닉(Retail Clinic)이나 어전트 케어(Urgent Care Center)를 방문하거나 원격 진료(telemedicine)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증가해왔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많은 헬스케어 시스템들이 대면 진료 외에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온라인 서비스를 강화해왔다(참고. The (Family) Doctor Isn’t In: Millennials Are Rejecting Primary Care Physicians (Healthline, 2018/11/1)) 심지어 KP는 모든 온라인 진료를 별도 비용 없이 기본 옵션으로 이용하면서 대면 진료는 꼭 필요할 때만 온라인 진료를 통해 의뢰를 받아 이용하는 Virtual Plus 상품을 2021년 1월부터 제공하고 있다(참고. New Virtual Plus Care Plan in Washington (Kaiser Permanente, 2020/9/10)). 미국에서 코로나로 가속화된 비대면 온라인 진료 확산이 코로나가 잠잠해지더라도 계속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주치의를 만나든 주치의가 아닌 의사나 NP와 채팅으로 상담을 하든 내 진료 기록에는 나를 만난 의료진들의 상담 노트가 차곡차곡 쌓였다. 클리닉에서 진료를 받은 후 클리닉을 떠나기 전 받았던 그날의 진료 요약본(After Visit Summary)의 파일뿐만 아니라 의료진들 사이의 공유를 목적으로 작성된 진료 기록(Progress Notes)도 웹과 앱에서 내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주치의 역시 내 진료 기록을 확인할 수 있기에 내가 다른 누구에게 무슨 이유로 어떤 상담을 받았는지 굳이 알릴 필요는 없다.

 

화면. 진료 일정 목록 화면. 대면 진료, 화상 진료, 채팅 상담 등 내가 받은 모든 진료의 진료 기록과 진료후 요약지(AVS)의 내용을 내가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이 시스템 안에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명확하고 무엇을 해도 그 정보가 공유되기에, 무엇을 하든 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주치의만을 만나든, 주치의 외의 의료진에게 실시간 채팅으로 상담을 받든, 본인의 필요에 따라 가장 좋은 선택을 택하면 그만이었다. 한국의 주치의제에 대한 논의에서 의료진이 기대하는, 자신의 정보를 잘 공유하는 착한 환자와 매너 좋은 환자를 만드는 것은 좋은 인성이나 교육이 아니라 잘 만들어진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급 소아환자 당일 예약 진료

출산 후, 태어난 지 한 달 된 아기가 아침에 수유 후 처음으로 분수토를 했다. 아침의 2시간 동안 분수토 2회, 여러 차례의 역류, 그리고 세 번의 변을 보자 그대로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KP 홈페이지에 로그인 해 의료진과 채팅으로 상담을 하는 Care Chat을 신청해 가정의학과 의사와 연결됐다. 아이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들은 의사는 아이가 더 이상 토하지 않고 불편해 보이지 않는다면 수유로 수분 공급을 잘해주며 지켜보기를 권했다. 그렇지만 주중에 소아과를 방문해 아기의 역류에 대해 진찰을 받아보라며, 상담 후 바로 예약 담당자에 연결해주었다. 다행히 동네에 있는 KP Medical Center에 당일 예약이 가능해 오후 시간으로 예약을 잡았다. KP의 소아과가 당일에 급히 진료가 필요한 아이들을 위한 시간을 미리 배정해두어 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덕분이었다. 의사들이 단독이 아니라 그룹으로 일을 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날 처음 만난, 이후 아이의 주치의가 된 Dr. H는 아기의 역류 상태에 대해 설명을 듣고 아기의 장을 촉진해보더니, 유문협착보다는 밤 사이 늘어난 수유 간격으로 아침에 갑자기 많은 젖을 먹어 감당하지 못해 토해낸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주었다. 아이는 분수토(projectile vomiting)가 아니라 단순히 게워낸 것(spitting up)이라는 말과 함께. 진료 후 마음의 평안을 얻었고, 그 후 몇 차례의 분수토에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24/7 Consulting Nurse Service

임신 36주 차 한밤중에 가진통 때문에 잠에서 깼다. 처음에는 괜찮아지겠지 두고 보다, 사라지지 않고 반복되는 가진통에 걱정이 되어 이른 아침 KP의 Consulting Nurse Service에 처음으로 전화를 했다.


미국의 건강보험사들은 Consulting Nurse Service, 24 hour nurse line 등과 같은 이름으로 회원들이 요일과 시간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전화해서 간호사의 상담을 받을 수 있는 무료 전화번호를 제공한다. 병원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에 대해 조언을 받을 수 있다. 코로나 유행으로 버추얼 진료/상담 옵션들이 강화되기 전에는 이 Consulting Nurse Service가 주말과 밤에 응급 상담을 받을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이었다.  


아침 6시에 전화를 받은 리셉셔니스트는 내 보험 가입 정보와 전화 건 이유를 확인한 후 간호사를 연결시켜줬다. 전화를 받은 간호사는 내 의료기록을 조회하고 내 설명을 들은 후, 내게 조산의 증상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질문들을 이어갔다. 또 집에 누구와 있는지 병원을 간다면 병원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등에 대해서도 확인했다. 아침에 일어나 통화를 하는 동안 긴 시간 계속되던 가진통이 다행스럽게도 잦아들었다. 간호사는 우선은 병원에 가기보다 집에 머무르면서 상태를 보라고 조언했다. 또 자신들은 언제든지 대기하고 있으니 가진통이 계속되면 다시 연락을 하라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사실 처음으로 길게 경험한 가진통에 대한 걱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병원을 갈지 말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두고 언제든 연락해 조언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됐다.  




주치의를 선택하고, 주치의에게 상담을 받으며 필요한 서비스들을 조율받고 주치의와 함께 일하는 그룹과 팀의 도움을 받으며, 주치의를 당장 만날 수 없을 때는 다른 의사를 만나거나 전화와 채팅으로 상담을 받으며,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한 명의 주치의가 아니라 주치의를 포함한 거대하고 정교한 시스템임을 느낀다. 마치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한 주치의가 제대로 일하려면 제대로 만들어진 시스템과 온 팀이 필요함’을 경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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