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케어 디자이너가 미국에서 눈여겨본 일곱 가지
애틀랜타에서 BCBSGA(조지아(GA)주의 Blue Cross Blue Shield를 의미, BCBS는 미국 전역을 커버하는 거대한 건강보험 연합)라는 건강보험을 가지고 다양한 보험의 환자를 받는 산부인과 클리닉에 다니던 2017~2018년, 전화는 병원과 나를 연결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진료를 예약하거나 변경하려면 클리닉의 대표 번호로 전화를 걸어 예약 담당자와의 연결을 부탁했다. 담당 의사의 의견이 필요하면 클리닉의 대표 번호로 전화를 걸어 담당 의사의 MA(Medical Assistant)와의 연결을 부탁했다. MA와 바로 연결될 때보다 '삐 소리가 난 후 이름, 생년월일, 연락처를 말하고 전화한 용건을 설명하면 연락하겠다'는 자동응답 메시지를 들을 때가 많았다. 인터넷 시대에 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자동응답기에 메시지를 녹음한 후 전화가 올 때까지 핸드폰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평일 진료 시간 중 상담이 필요할 때는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 산부인과 간호사(OB Nurse)와의 연결을 부탁했다. 밤이나 주말에 응급으로 상담이 필요할 때는 클리닉에서 미리 알려준 비상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 이름과 연락처를 남겼다. 잠시 후 그룹으로 진료를 보는 일곱 명의 의사 중 한 명인 당직 의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사진. 산부인과 클리닉에서 임신 초기 진료 때 받은 안내지. 근무 시간 중에 상담이 가능한 전화번호와 근무 외 시간의 응급 상황을 위한 전화번호가 형광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전화를 걸 때마다 클리닉이 문을 열고 담당 직원이 충분히 업무를 시작했을 시간인지 혹은 클리닉이 닫는 시간이 임박했는지를 확인하고, 클리닉의 대표 번호로 전화를 걸어 클리닉 이름에 이어 '생명이 위험한 응급 상황이면 전화를 끊고 911에 연락하라'는 안내를 듣고 메뉴 별 번호를 들은 다음 연결된 직원에게 이름과 생년월일과 전화한 용건을 말하고 또다시 다른 사람을 연결하고, 때로는 자동응답기에 이름과 생년월일과 연락처와 용건을 남기고 연락을 기다리는 과정을 모든 클리닉들에서 똑같이 반복했다. 미국의 병원은 '전화 영어 안되면 다닐 수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끊어진 점들 사이를 인내심을 갖고 전화와 방문으로 열심히 연결했다.
워싱턴주로 옮겨와 카이저 퍼머넌트 워싱턴(KP WA, Kaiser Permanente Washington) 건강보험에 가입한 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코로나 유행 후 KP가 온라인 서비스를 강화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 열렸다.
KP 건강보험에 가입하기 전 KP에 대해 알아보고 소속 의사들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 KP의 홈페이지를 여러 번 방문했다. 여느 건강 관련 웹사이트와 크게 다르지 않게, 첫 화면에는 의료 관련 이미지들에 건강 관련 정보와 뉴스들이 나와 있었다. 또 건강보험 회사이자 의료서비스 제공자답게 건강보험 상품과 소속 의료진 및 시설에 대한 정보를 보여주었다. 모든 이가 확인할 수 있는 많은 정보가 있는 웹사이트였다. 내게 맞춰진 정보를 확인하려면 로그인을 하라는 말이 나와있었지만, 회원 번호(Member ID)가 없는 상태에서는 무엇이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건강보험 가입 절차가 마무리되자 숫자 8개로 구성된 회원번호를 전달받았다. 웹사이트에서 회원번호를 넣고 회원 등록을 했으나 로그인을 해서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신분 확인을 받아야 했다. 전화로 예약한 산부인과 첫 진료 전에 잡힌 혈액/소변 검사를 위해 토요일 아침 KP 벨뷰 메디컬센터를 방문했을 때 데스크 직원에게 신분증을 보여주고 웹사이트 이용을 위한 서류를 작성해 제출했다.
검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KP 웹사이트에서 회원번호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니 드디어 로그인이 되었다. 로그인 전의 웹사이트와는 전혀 다른 화면이 펼쳐졌다. 바로 환자 포털(Patient Portal)이었다.
화면. 2021년 4월 현재 KP Washington의 로그인 전 홈페이지 상단
(https://healthy.kaiserpermanente.org/washington/front-door)
화면. 2021년 4월 현재 KP Washington의 로그인 후 환자 포털 상단
미국에서 환자의 참여는 헬스케어 서비스의 필수 요소로 여겨진다. 환자 포털은 전자건강기록(EHR, Electronic Health Record)에 연결된 전자개인건강기록(ePHR, electronic Personal Health Record)을 말하며, 헬스케어 시스템이 환자와 효과적인 파트너십을 만들어 환자가 자신의 케어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 중 하나이다. (참고. Patient Portals and Patient Engagement: A State of the Science Review (Journal of Medical Internet Research, 2015))
미국에서 EHR의 의미 있는 사용(meaningful use)에 대해 연방 정부가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제도인 Medicare and Medicaid EHR Incentive Programs, 일명 Meaningful Use 프로그램은 미국에서 EHR의 확산은 물론 환자 포털 제공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총 3단계로 진행된 이 프로그램은 1단계(2011년 시작)에서 의료진들이 EHR 이용을 시작하고 임상 데이터를 전자적으로 보관하도록 하는 데 집중했고, 2단계(2014년 시작)에서 의료진들과 의료 기관들이 임상 데이터와 기술을 통해 환자 케어의 수준을 높이고 의료 기관 안과 의료 기관들 간에 정보를 쉽게 교환하도록 만드는 데 집중했다. 마지막 3단계(2016년 시작)는 EHR과 임상 데이터를 활용해 건강 결과를 개선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미국에서 노인층과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보험인 메디케어(Medicare)와 메디케이드(Medicaid)를 주관하는 CMS(Center for Medicare & Medicaid Services)는 2018년 이 프로그램의 명칭을 Meaningful Use(의미 있는 사용)에서 Promoting Interoperability(상호운용 촉진)으로 변경했다. (참고. CMS.gov - Promoting Interoperability Programs) 이름의 변경을 통해 정책의 방향을 알 수 있다.
그림. Meaningful Use 프로그램의 단계별 목표 (출처. Meaningful Use Stage 1 Requirements Overview (CMS, 2010))
Meaningful Use 프로그램의 2단계 요구사항에는 진료를 받은 환자에게 진료 후 요약지(After Visit Summary, AVS)를 제공하고, 환자와 의사(provider)가 이메일을 주고받고, 개인의 건강 데이터를 확인/다운로드/전송할 수 있고, 환자 별 교육을 제공하고, 환자에게 예방적 서비스에 대해 알려주고, 환자의 복용 약물 목록을 최신의 정보로 업데이트(medication reconciliation)하는, 환자 포털 기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기능들이 포함되었다. 인센티브를 받으려면 예를 들어, 보고 기간 중 자격 있는 의료진이 5% 이상의 환자들과 관련 건강 정보에 대해 연락하기 위해 보안 이메일을 사용함을 증명해야 했다. (참고. Patient Portals and Patient Engagement: A State of the Science Review (Journal of Medical Internet Research, 2015))
그런데 병원들이 환자 포털을 제공하는 것과 환자 포털이 얼마나 쉽고 유용하게 잘 만들어졌는지 그래서 환자들이 환자 포털을 얼마나 잘 이용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ONC(The Office of the National Coordinator for Health Information Technology, 미국 국가 건강정보기술 조정국)의 2019년 자료에 따르면, 2017년에 거의 모든 병원들이 환자들이 자신의 건강 정보를 전자적으로 확인하고 다운로드할 수 있는 환자 포털 기능을 제공했으나, 그중 65%의 병원들에서는 25% 미만의 환자들만이 실제 환자 포털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반면, 8% 이하에 해당하는 소수의 병원들에서는 50% 이상의 환자들이 환자 포털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참고. Electronic Capabilities for Patient Engagement among U.S. Non-Federal Acute Care Hospitals: 2013-2017 (ONC, 2019))
KP(Kaiser Permanente)는 Veterans Affairs Administration, Geisinger Clinic 등과 함께 미국에서 환자 포털을 가장 먼저 제공하기 시작한 기관 중 하나이며, 미국의 민간 부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환자 포털을 가지고 있다. 2003년에 환자 포털을 제공하기 시작한 KP는 2015년에 성인 회원의 70%가 환자 포털을 사용했다. 참고로, 2015년에 미국에서 은행 계좌를 가지고 있는 가구 중 온라인 뱅킹을 이용한 비율이 60.4%였다. (참고. 2015 FDIC National Survey of Unbanked and Underbanked Households) KP의 회원들이 환자 포털에 높은 등록률을 보인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의사와 이메일로 연락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KP의 연구에 따르면, KP의 환자 포털 이용 회원은 환자 포털을 이용하지 않는 회원보다 회원으로 계속 남아있을 가능성이 2.6배 더 높다. 잘 만들어진 회원 포털은 그 건강 보험이나 병원을 계속 이용하고 싶은 이유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바로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일이다. (참고. 4 lessons on patient portals from Kaiser Permanente (Becker's Health IT, 2016/4/11), Lessons From More Than A Decade In Patient Portals (Health Affairs, 2017/4/7), Improved Quality At Kaiser Permanente Through E-Mail Between Physicians And Patients (Health Affairs, 2010))
2021년 4월 현재, 웹브라우저에서 KP의 웹사이트에 로그인을 하면, 지금 바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들의 메뉴 버튼(COVID-19, Ongoing health concern, New health concern, Contact member services, Access pharmacy services)과 함께 앞으로 예정된 검사 및 예방접종의 일정(Care reminders)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다. 그다음, My health dashboard라는 이름 아래 약(Pharmacy), 진료 일정(Appointments), 의뢰(Referrals), 검사 결과(Lab & test results), 지불(Bill pay) 현황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리고 전체 메뉴 중 Visit을 선택하면, 당장 온라인이나 전화로 상담을 받거나 진료를 예약하거나 바로 이용할 수 있는 Urgent care와 Walk-in clinic을 확인할 수 있고, 앞두고 있는 진료 일정과 지난 진료들의 의무 기록과 진료 후 요약지(After Visit Summary, AVS)를 확인할 수 있다. Message Center에서는 의료진과 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고, Medications에서는 처방약을 확인하고 처방약을 추가로 주문(refill)을 할 수 있고, Medical Record에서는 검사 결과와 예방접종 등의 각종 의료 기록을 확인하거나 출력할 수 있다. Coverage & Costs에서는 청구서를 확인하고 결제하거나 이전 결제 비용이나 예상 비용을 확인하거나 보험 이용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나 자신과 내가 보호자로 등록한 아이의 계정을 선택해서 이용할 수 있다. 앱에서도 같은 기능을 이용할 수 있다. 이전의 건강보험과 당시 이용하던 클리닉들에서 전화로 해결하던 일들 그 이상을 웹과 앱으로 해결하고 있다.
화면. 2013년 당시 KP 회원 용 앱(My Health Manager)의 화면.
화면. 2021년 4월 현재 KP Washington의 앱 로그인 후 화면. 웹사이트의 환자 포털과 같은 서비스를 앱을 통해 이용할 수 있다.
미국에서 환자 포털을 도입하는 일에 아무런 우려와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6년부터 2014년 사이에 발표된 논문들 중 환자 포털(patient portal), 개인건강기록(personal health record) 또는 전자개인건강기록(electronic personal health record)에 대해 다룬 논문들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의료진들은 환자의 참여와 관련해 검사 결과 공유로 인한 환자의 불안감 유발 가능성, 환자가 시스템에 데이터를 직접 입력할 때의 정확성 문제, 환자와 의료진의 관계 변화, 업무량 증가 예상 등에 대해 걱정했다. 하지만 환자 포털 도입 후 진행된 연구들에 따르면, 환자들은 검사 결과 공유를 환자 포털에서 가장 유용한 기능으로 받아들였다. 의료진들은 환자들이 자신의 치료에 대해 더 관심을 보인다고 평가했으며, 환자가 환자 포털에 직접 입력한 정보에 대해 대면 진료 시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개별 의료진과 전체 팀의 워크플로우는 환자 포털과 이를 통한 환자 참여를 받아들이기 위해 어느 정도 조정이 필요했다. (참고. Patient Portals and Patient Engagement: A State of the Science Review (Journal of Medical Internet Research, 2015))
환자 포털을 보다 일찍 적극적으로 도입한 KP는 환자 포털 제공이 환자 케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지속적으로 연구했다. 이에 따르면, 환자와 의사의 이메일 연락은 혈당, 콜레스테롤, 혈압과 같은 건강 상태 결과를 2~6.5% 향상시켰다. 케어의 연속성 증가, 환자와 의사의 연결, 환자가 스스로 관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 등이 이유로 짐작되었다. 또한 환자들은 환자 포털을 통해 자신의 건강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알고 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 의료진들과 연락하는 데 있어 훨씬 도움이 된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대면 진료와 이메일 연락의 상관관계에 대한 혼재된 연구 결과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대면 진료는 약간 감소하고 이메일 연락은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그래프. KP에서 의료진과의 이메일 연락 기능 시행 후 환자들의 이메일, 전화, 대면 진료의 이용 정도 변화 (출처. Lessons From More Than A Decade In Patient Portals (Health Affairs, 2017/4/7))
의료진과의 이메일을 통해 연락하는 기능에 대해서 환자들은 매우 높은 만족도를 보였다. 2,677명의 회원들이 참여한 2005년 설문조사에서 85.5%의 사람들이 이메일 연락을 통해 "주치의와 보다 개인적인 관계(a more personal relationship)를 맺을 수 있다"라고 답했다. 한 응답자는 "내가 내 건강 상태를 더 잘 관리하고 있다고 느낀다. 내가 진료받는 사람들에게 연락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다시 책임을 질 수 있다. (I feel more in control over my medical condition. I have access to people I need to consult with, so it puts me back in charge.)"라고 답했다. 2021년에 내가 나와 아이의 주치의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느끼는 바와 동일하다. (참고. Lessons From More Than A Decade In Patient Portals (Health Affairs, 2017/4/7), Improved Quality At Kaiser Permanente Through E-Mail Between Physicians And Patients (Health Affairs, 2010))
환자 포털의 도입에 대한 우려 중 하나는 나이, 학력, 인종 등에 따른 접근성 차이였다. 특히 젊은 사람들 위주의 서비스가 될 가능성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그러나 KP가 환자 포털을 10년 이상 운영하며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환자 포털의 등록과 이용에 있어 가장 적극적인 연령대는 60~69세였다. 아시아계, 라틴계, 아프리카계 사람들은 백인들보다 환자 포털 등록 비율이 떨어졌다. 대학원 교육을 받은 회원들은 고졸 이하의 회원들보다 더 자주 환자 포털을 이용했다.
그리고 KP에서 환자 포털을 이용하는 환자들은 종합적으로 자신이 자신의 건강 상태를 더 잘 관리하고 있고(more in control over their medical condition), 정보와 의료진에 접근성을 가지며(they had access to information and access to the people they needed to consult), 더 자신감을 느끼고 덜 무서우며 의사와 더 가깝게 느낀다(more confident, less intimidated, and closer to their physician)고 말했다.
얼마 전, 내 주치의에게 문의할 사항이 있어 오랜만에 이메일을 보냈다 다음 날 의사에게 “Hi, Hyojin. How are you doing? (안녕하세요, 효진 씨. 어떻게 지내요?)”로 시작하는 답장을 받았다. 병원 직원들한테서 가끔 받는 Dear Hyojin Nam으로 시작하는 메일보다 훨씬 친근하고 따뜻한 느낌, 마치 카톡이나 메신저로 언제든 연락할 수 있는 친구와 대화를 이어가는 느낌이었다. 비록 자주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라 해도, 언제든 직접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 자체가 병원과 의사와의 관계를 얼마나 다르게 만드는지, 더 나아가 나와 아이의 건강 관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내가 느끼는 바와 같은 이야기를 나보다 먼저 경험한 사람들이 이미 오랫동안 말해왔다는 것이 놀랍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