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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미 안투네즈 Oct 04. 2022

문을 열고.


Susan Seddon Boulet




나는 집안의 문제아였다. 자주 엄마랑 싸우고 혼나고 엄마를 평생 미워하며 살았다. 그리고 화가 날 때면 자주 언니를 생각하며 울었다. 언니는 엄마한테 혼나지도 않고 착하게 잘 살아가는데 왜 나만 이 모양 이 꼴인 걸까? 나는 왜 언니처럼 될 수 없는 걸까?


나는 미운 오리 새끼로 태어난 내가 싫었다. 가족들과 달리 나만 검은색 오리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언제나 별거 아닌 거에 예민하게 굴었고 쉽게 짜증내고 화를 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러지 않을 수 있는지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나는 항상 집을 떠나고 싶었다. 집을 떠나 미운 오리에서 백조가 되고 싶었다. 무언가 멋진 꿈을 찾아 대단한 것을 이루고 화려한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감정이 풀려야 인생이 풀린다는 말처럼, 응어리져 있는 감정처럼 나는 언제나 실패했고 상처받은 미운 오리로 돌아갔다.




언젠가 나는 먼 외국의 바닷가에서 혼자 덩그러니 앉아 집에 돌아가고 싶다며 엉엉 울었는데 나에게는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집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받아 줄 곳이 없었다. 언제나 화를 내고 짜증을 내며 문을 박차고 집을 나가 버리는 문제아를 받아 줄 곳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결혼은 절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나에게 '누가 너랑 같이 살 수 있겠니?'라고 묻곤 했는데 나도 엄마의 말에 동의했다. 나도 나랑 살기가 싫은데 누가 나와 함께 살고 싶을까.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친구의 소개로 점을 보러 갔다. 점쟁이는 세 달 뒤인 8월에 귀인이 나타난다면서 그 사람과 내년에 결혼하게 될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언제나 곧 남자를 만난다고 했지만 한 번도 그 점괘가 맞은 적이 없어 별로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정말로 8월 1일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일 년도 연애를 하지 않고 그다음 해에 덜컥 결혼해 버렸다.


나는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빨리 집을 떠나고 싶었다. 언제나 문제아로 살아온 내가 서른 중반이 되어서 돈도 직장도 없이 집에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매일 삼시 세끼 밥이 아니라 괴로움을 먹는 기분이었다. 문득문득 이유가 없이 울었고 지독하게 외로웠고 숨 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그렇게 엉망인 마음으로 결혼을 했으니 남편이랑 잘 지낼 리가 없었다. 나는 또다시 집안의 문제아였다. 나만 조용하면 우리 집에는 별일이 없었다. 언제나 언제나처럼 별것 아닌 것에 짜증을 내고 화를 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방 안에 들어가 언제나처럼 혼자 울었다.


하지만 나의 귀인으로 짝지어진 남편은 언제나 굳게 닫힌 방문을 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와 가만히 곁에 앉아 있어 주었다. 화를 내도 나가지 않았다. 가족 중 누구 하나 나의 방문을 열고 들어 온 적이 없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두려워 누구도 나의 방문을 열 수 없었다.


하지만 남편은 달랐다. 언제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했다. 처음으로 사랑을 경험했다. 사랑은 모든 모습을 받아 주는 것이었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함께 하는 것이 사랑이었다. 특별한 말도 위로도 조언도 필요 없었다.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충분해졌다.




누구의 마음속에나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나의 마음속 어린아이는 남편에게 울면서 화를 냈다.


"너도 어차피 나를 싫어할 거잖아. 내가 얼마나 못나고 엉망인지 알려주려고 할 거잖아. 나를 바꾸고 가르치려고 할 거잖아. 어차피 내 말은 들어주지 않을 거잖아."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나는 남편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를 문제아 취급한 것은 언제나 엄마나 가족들이 아니라 나였다. 나는 나의 마음속 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해야 했다. 나의 잘못만을 뚜렷하게 기억하며 나를 바꾸고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줬어야 했다. 나의 짜증도 나의 예민도 불같이 화를 내며 날뛰는 망아지 같은 나의 마음을 잘 다스려주어야 했다. 나의 마음속 망아지의 고삐를 엄마가 잡아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내가 고삐를 붙잡고 진정할 때까지 곁에 있어 주어야 했다.


나는 그렇게 나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명상을 하고 글을 썼다. 작은 짜증에도, 순간적인 예민함에도 언제나 느낌에 집중하며 나와 함께 있어주었다. 그러자 언제나 작은 자극에도 날뛰던 망아지는 점점 온순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멋진 말이 되어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달렸다. 마음이 가벼워졌고 더 이상 예민하지 않았고 평화로웠고 세상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처럼 다시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마음이 날뛰더라도 곧 지나갈 거라는 것을 알았다.




살면서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이 항상 괴로웠다. 이제는 엄마를 미워해야 하는 이유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데도 가슴속 응어리져 있는 감정들 때문에 엄마만 생각하면 괴로움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아직도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이 떨어진다.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진 자리에 엄마를 이해하는 마음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준 사람이 엄마 평생에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을 알기에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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