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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인 Jan 14. 2023

융프라우 싸게 가는 한국인

할인 전문가



느지막한 아침이었다. 창으로는 스위스의 맑은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고, 장기간의 여행에 녹초가 된 내 몸은 편안한 침대 위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융프라우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기차 값만 20만 원이 넘어가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비싼 돈을 지불하고 하루를 모두 소모해서 그곳에 올라갔다가 흐린 풍경을 보는 것만큼 나에게 비효율적인 행동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이 다시 오지 않을 좋은 날씨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침 11시쯤, 5분도 안 되는 시간만에 융프라우를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살면서 다시 스위스를 와서 이런 기회와 날씨가 주어지길 바라는 건 없는 일에 가까웠다. 씻지도 않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내가 가진 가장 따뜻한 옷을 챙겨 입었다.


 하늘은 청량하고 공기는 쾌청했다. 들이쉬고 내쉬는 한 숨마다 상쾌함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짧은 시간에 선택한 내 결정이 잘한 일이 될 거라는 걸 직감하며 기회를 잡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사실은 첫 문단과 관련이 없는 스위스 어느 산 중턱에서


국내 한 여행 업체에서 융프라우 할인권을 무료로 제공해주고 있었다. Basic 티켓이 20만 원이 넘어가는 여행을 16만 원 정도에 VIP 티켓으로 갈 수 있었다. 이 할인권이 통하면 가고, 그렇지 않으면 포기하기로 결정한 나와 내 친구는 걸어서 기차역으로 이동했고, 갈색 웨이브 머리를 한 창구 직원 앞에 섰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해당 할인권을 스마트폰 PDF파일로 보여주니, 종이로 프린트해오지 않으면 할인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프린트할 곳이 어디에도 없었던 나는 사정을 설명했지만 직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나는 융프라우를 포기하기보다 어떻게든 프린트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한정된 돈과 시간에서 불투명한 선택을 한 것은 항상 효율적인 방법을 택하려는 나에게 도박과도 같았다.




나는 기차역에서 거리가 있는 곳에 위치한 패러글라이딩 업체를 찾았다. 전 날 한국인들이 단체로 방문했다는 연관점 밖에 없는 업체에 들어가 카운터에 앉아 있던 한 남자 직원에게 되지도 않는 영어로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Hello. Can I ask you something?. I have problem. I have to print this ticket but I can't find anywhere I can use printer. If you can help me, I will pay you."


 '안녕하세요.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이 티켓을 꼭 프린트해야 되는데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알맞은 금액으로 사례하겠습니다.'


라는 의미를 손짓과 표정으로 열심히 내포하며 말했다.


 아마 내 영어보다 바디 랭귀지를 알아들었을 남자 직원이 정말 친절하게도 도와주겠다며 본인의 노트북을 안쪽에서 꺼내왔다. 나는 서둘러 직원이 적어준 이메일로 내 네이버 이메일을 전달했다.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검은 머리 직원의 이메일로 보내도 옆에서 의자에 앉아 게임하던 동료 직원의 이메일로 보내도 업체의 공식 이메일로 보내도 이메일에 직접 첨부되어 있는 PDF 파일이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너무 고맙게도 그들은 성심껏 도와줬지만 끝내 열리지 않았다. 발걸음을 돌리기 전에 당연히 안될 거라고 생각했던 한 가지를 물어봤다.


 "정말 죄송한데 회사 컴퓨터로 직접 로그인해 봐도 될까요?"


 스위스에서 아무 연관도 없는 네이버 로그인이 될 리가 없었다. 그냥 가기 아쉬워서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낸 것뿐이었다.


 그런데 네이버가 너무 잘 접속되고 로그인도 되는 것이 아닌가.


 PDF파일은 보였고 20장이 넘는 서류를 다 복사해 주셨다. 일이 풀리고 나니 마음이 놓였고 한사코 사례를 거절하던 직원분들에게 무한한 '헤브 어 나이스 데이'를 남발하며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융프라우를 가기 위해 제일 처음 탄 기차




신기하게도 유럽에서 가장 높다는 융프라우 정상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한다. 환승을 여러 번 하고 편도로 4시간 정도가 소요되기 때문에 바삐 움직여도 8시는 되어야 숙소에 돌아갈 수 있는 일정이었다. 


 올라가는 내내 새롭고 신기하고 아름다웠던 기찻길은 어느덧 목적지에 도달했고, 타지에서의 반가움을 넉넉히 주었던 한국어 기차 방송을 들으며 마지막 기차에서 하차했다.


(좌) 갈아탔던 기차들 중 하나, (우) 올라가는 중의 기차 밖 풍경 중 하나




긴 터널을 지나고 엘리베이터를 타며 정말 고산지대여서 느껴지는 건지 고산지대에서 뛰면 호흡곤란이 온다는 경고문을 너무 많이 읽어서 느끼는 심리적인 불안인지 미세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경고문을 무시하고 설레는 마음에 뛰어가고 싶어도 가는 길에 볼거리가 많아서 다 보면서 이동하느라 쓰러지진 않았지만. 


 걸어서 이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는 정말 정상에 도착했다.


엄청나게 맑은 날 융프라우 정상에서


 정상에 선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티 없이 맑은 하늘이 그곳에서 볼 수 있는 최대 시야를 제공했다. 작전이 성공했다는 기쁨을 누리기도 잠시, 마감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탓에 정상 깃발에서 사진을 찍는 줄을 섰다. 진짜 너무너무 추웠기 때문에 친구와 번갈아가면서 줄을 서는데 30분 정도 소요됐다. 우리는 깃발에서 신나게 사진을 찍고 뒷사람과 사진 품앗이도 하며 눈에서 뛰고 눈을 먹고 난리를 쳤다. 


 융프라우의 눈을 만끽한 뒤,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가기 전 VIP 티켓에 포함된 만 원짜리 신라면 컵라면을 먹었다. 판매 목록에는 왕뚜껑도 있고 육개장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확실한 건 티켓에 포함된 라면은 신라면이라는 거. 


이런 느낌이었던 신라면


 머나먼 이국 땅에서 새하얀 눈을 바라보며 먹는 대한민국의 컵라면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집 앞 편의점에서도 정확히 똑같은 맛을 느낄 수 있지만, 그 즐거운 분위기와 장소가 주는 색다름은 다시는 느끼기 힘들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 그날 내내 마주치지 못했던 한국인을 바로 옆자리에서 만났다. 4시간 동안 웃고 떠들며 연락처까지 교환하고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며 숙소에 돌아와서 여행 온 사람들과 와인을 한 잔 기울였던 그날은 아직까지도 내 인생 최고의 날 중 하나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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