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소리

by 남이사장

자격증

가게를 시작하기 전.

가게를 하고 싶다란 생각이 들 때마다 문득문득 뭐라도 하나 있어야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요리랑 관련해서 배운 바도 없으니, 학벌도 없고, 자격증도 없고

조리사자격증은 까다로울 것 같았고, 그래서 식품가공기능사 자격증으로 선택했다.

찾아보니 합격률 96%라고 해서 그게 그 자격증을 탐한 유일한 이유였다.

필기는 가뿐하게 우수하게 통과했고, 실기는 막막했다.

일단 제주에서 실기시험을 볼 수가 없어서 부산으로 수험장소를 정했다.

실기 준비는 배워야 할 것 같아서 대전에 있는 식품정보원에서 하는 교육을 받았다.

시험 이틀 전,

동생과 서울에 계시던 엄마랑 부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엄마는 롯데 야구팬이셔서 겸사겸사 야구 경기도 보고 온천도 하고 시험보자라는 만만한 계획을 세웠다.

야구 경기는 썩 시원한 경기가 아니었고 흥이라고는 없는 나는 지루했다

롯데 응원단장님과 치어리더 박기량 씨를 보면서 감동받은 것 이외엔 정말 맛없는 치킨과 미지근한 맥주와 더불어 그날 롯데는 졌다.

다음날 온천은 내가 아는 세상이 아니었다. 생기 왕성한 아우슈비츠 같은 온천탕은 신기했으며 엄마를 잃어버릴까 봐 마흔일곱의 나는 겁이 났었다.

다음날 엄마와 동생은 서울로 제주로 돌아갔고 오후에 길치이자 쫄보인 나는 수험장소인 학교까지 숙소에서 두 번 왕복을 해보았고 휑한 온천탕 방 안에서 그제야 찾아오는 시험 걱정에 초조했었다.

시험당일 아침.

미리 답사한 두 번의 왕복 덕분에 시험 장소까지 시간 딱 맞추어 도착했고

생각보다 예스러운 시험 시설이 인상적이었는데, 내 나이 또래의 수험생은 드물었고 고등학생들이 많아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조리고등학교 남학생들.

하얀 높은 조리사 모자를 쓰고 내 앞에서 시험을 같이 봤다.

중간중간에 내가 이상하고 서툴다 싶으면 고개를 짧게 저어서 사인을 주고, 리트머스 종이도, 저울도 감독관 모르게 건네주면서 나를 챙겨 주었지만, 샐 바가지는 어디서든 샌다.

어묵 만드는 과정 시험 중간에 짧은 필기시험이 주어지는데, 난 계산에 약하고 문제를 겨우 풀고 내 어묵 팬을 보았더니 검은 윷가락 네 개가 기름 위에서 끓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났고 내 앞에 남학생은 정색을 하면서 안타까워했다.

"이 시험에서 내가 합격이면 이게 사기다." 그때의 내 심정이다.

시험을 마치고 공항에 갔는데 기상악화로 항공편은 다 취소되었고, 난 ktx를 타고 서울에 갔고 엄마는 잠깐 어이상실한 참담한 표정을 하시고는 닭죽을 끓여주셨었다.

그렇게 해서 난 계획에 없었던 합격률 96%에 4%의 낙방의 주인공이 되었고, 한 달 뒤 다시 부산에서 똑같은 학교에서 혼자 경건하게 시험을 보고 합격을 했다.

그로부터 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자격증은 찾지 않았고 종종 내가 그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지도 잊어버린다. 그냥 단편 드라마처럼 대전, 부산, 시험, 조리사 모자를 쓴 고등학생, 까만 윷가락이 롯데 응원가와 함께 내 기억에 머문다. 누가 뭐래도 기억의 최강자는 온천이지만.

공항에서 부산역으로 바퀴 떨어진 슈트케이스를 끌던 나는 아쉽지도 않았고 그 빗길이 좀 거추장스러웠으나 좋았다.


덧붙이는 슬픈 이야기는 어묵을 태워가면서 풀어낸 그 계산 문제도 또한 틀렸었다.

후에 답을 맞히던 조리고등학생의 표정이 일품이었는데 고마웠다. 네 마음 씀씀이.







가족

우리 가족은 작은 일에는 소리내서 기뻐하고 마음 아픈 일에는 조금 물러나서 응원합니다. 좋은 일에는 환호하고 아픈 일에는 생채기에 덧 생길까 싶어 마음은 가까이, 말은 한 걸음 물러서서, 시간이 잘 지나기를 바라는 듯 합니다.

저는 오십년 중에 사십 년이 비만이였습니다. 어렸을 때 너무 마르고, 약하고 예민해서(신경질적?) 사랑 충만하신 우리 할머니는 녹용에 밤 꿀에 재운 것을 계절마다 해 먹이셨고 덕분인지 나는 살이 오르고 태평한 아이가 된 듯 합니다.

살이 오르지 않았을 때에도 승부욕은 없었는지 초등학교 첫 운동회 달리기에서 뛰지 않고 우아하게 결승선에 들어 온 제게 엄마가 ”왜 안 뛰냐.“고 물으시니 ‘왜 빨리 뛰어야 하냐’고 답했다고 하네요.

그러니 살찐게 할머니의 보약 때문이라고만 하기엔 죄송스럽습니다.

다들 미국 다녀와서 살쪘다 생각하지만 미국 가기 전 이미 오를 대로 올라 있었고 오히려 돈이 없었던 미국 생활에 천천히 몸이 줄었는데 이리 선입견이 무섭습니다.

저는 비만이었으나, 별다른 열등감 없었고 이쁘고 날씬한 것을 부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친구들도 나를 늘 유쾌한 아이로 기억하고 중학교 때 지금 생각하면 왕따 같은 따돌림이 있었는데도 그러려니 하고 지나간 듯하네요.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고 고모들 작은 엄마들 카톡방이 난리가 났는데 정작 저는 그날의 제 몸무게가 훨씬 좋았었습니다.

올 여름 초반에 구안와사가 왔고, 별 일없는 일상에 속상한 일이 생겼으며, 더불어 그 속상한 일이 새벽이면 벌떡 눈을 뜨게해 새벽길을 걷게 했습니다.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살이 두달남짓에 10kg 이상 줄었는데 마음 고생은 마음 고생이고 아침마다 내 줄어드는 몸무게 확인은 즐거웠습니다. 굶을 맛 나게 하던걸요.

막내 고모는 60대이고, 조카인 나는 50대인데 우리는 이런 대화를 하고 깔깔거리며 웃습니다.

고모부께 ”우리 가족은 매번 이뻐. 잘해. 잘될거야 라고 해서 밖에 나가면 적응이 안돼요.“

하니 ”그냥 우리끼리라도 이리 살자.“하셨고 살을 빼도 그다지 이쁘지 않은 내 모습에 ”살 빼면 이쁠거라며. 안 이쁜데“ 하니 막내고모 ”뺄 줄 모르고 한 얘기지.“ 하셨답니다.

장사 너무 안된 날 고모에게 전화해 장사 너무 안되니 속상하다 훌쩍거리니 흥분한 우리 고모 ”계좌 번호 불러“ 하셔서 웃고, 친구 작은 아버지 여유있으셔서 친구 사업 도와주시는 것 부럽다 말하니, 듣던 내 동생 ”언니. 난 우리가 뭘 하든 이쁘다 이쁘다 하시는 우리 작은 아버지가 더 좋아“해서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전 항상 남의 떡이 커보이는 유형의 성품인데 가족만큼은 제 떡이 좋습니다.

이건 제껍니다.





함덕

4월에 가게 연세 (일년치 임대료)를 내야 했었는데 1월부터 3월까지 지옥의 시간처럼 장사가 힘들었었다.

모아 놓은 연세에 손을 댔고 그걸 또 메꿔 내느라 3월달에 난 말 그대로 없이 살았다. 그리고 카드 결제액이 나왔는데 7만원이 나왔다.

“내가 이리 살건 아니다” 싶어서 – 어찌어찌 연세는 다 모은 시점입니다 -

핸드폰을 열어 숙박 업소를 예약 하고 가게를 버리고 2박 3일에 탈출을 도모했었다.

그렇게 간 곳이 함덕이었다.

일요일 가게에 들려 단도리를 하고

“ 가게씨. 나 이틀 안 온다. 너도 좀 혼자 있어 네가 뭔데 내돈 다 쓰니? ” 하면서 짧은 이별을 고했다. 신나더라.

실컷 자고 실컷 먹고 실컷 산책하고를 벼르면서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니 미친 듯이 바람이 불고.

혼자 있으려했지만 심심할 것 같아서 일하는 친구를 꼬셔서 동행 성공.

바닷바람 맞으며 팔짱끼고 걷고 뭐 먹을까 하며 식당을 찾아 배회하고 별 일아닌데도 마구마구 웃고 바닷바람 거센데 얇은 치마를 입은 젊은 여성분들을 보면서 “다 한때야 그래도 이쁘긴하다.”하면서 이쁜 바다도 보고 원피스 구경도 했다.

열심히 식당을 배회하다 지친 우리는 조그마한 횟집에 자리를 잡고 맥주 한병을 마시고 조곤조곤 수다를 떨다가 이번엔 커피를 찾아 배회를 하고 또 그냥 아무데나 가자 해서 바닷가가 한 눈에 모이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동네 길을 둘이 걷고 친구는 내일 출근을 해야해 떠났고

혼자 숙소로 돌아 오는 길....울컥 가게씨가 너무 보고 싶었다.

우리 헤어진지 열두시간도 안되었는데 넌 왜 보고 싶은거니?

그렇게 내 짧은 함덕 여행은 이틀간 가게를 그리워하는 여정으로 마무리 되었었다.

침대에 누워서 메뉴 검색하고 구입할 물건 이것저것 들춰보고.

그리고 이틀 뒤에 만난 가게씨는 또 지긋지긋 했었다.

나랑 가게씨는 이런 사이인걸로 마무리. 가봤자 함덕이고 돌아와야 하는건 네 품이구나

이 흥할 놈의 가게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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