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을 다루는 행동강령(Code of Conduct)

제한된 사회적 집중력은 공적 사안에 집중되어야 한다

by 남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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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0월 18일에 해롤드 맥밀런(Harold Macmillan)이 영국 보수당 대표와 총리를 사임하면서 맥밀런 내각은 만 6년 만에 붕괴되었다.


윈스턴 처칠이 이끌었던 보수당은 1945년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의 총선에서 노동당에 참패하면서 최초의 다수 단독 노동당 내각의 출범을 허용했다.


6년 뒤에 1951년 총선에서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은 승리하면서 정권을 탈환했고 이후 앤서니 이든을 거쳐 해롤드 맥밀런에 이르기까지 1955년 총선, 1959년 총선에서 계속 승리하면서 내리 만 11년을 집권했다.


수에즈 위기(Suez crisis, 1956년)라는 실책으로 위기에 처해 결국 사임한 이든의 뒤를 이은 맥밀런은 안정적으로 국가를 이끌며 ‘슈퍼맥(Supermac)’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1959년 총선에서는 ‘이렇게 좋은 시절은 없었다(Never had it so good)’라는 슬로건을 내걸기도 했다.


노동당엔 다시 집권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했고 당내 우파와 좌파 간 내분도 심했다.

이렇듯 잘 나가던 맥밀런 내각과 보수당의 성실성(Integrity)에 결정적 치명타를 입힌 것은 프로퓨모 사건(Profumo affair)이었다.


사건의 주인공인 존 프로퓨모는 40대의 젊은 전쟁부장관이었는데, 1961년부터 19세의 모델이었던 크리스틴 킬러라는 여성과 혼외교제를 했다.


1963년에 프로퓨모는 하원에서 이러한 관계를 부인했으나 경찰 수사 결과 이는 거짓으로 드러났다.

진정한 문제는 이 킬러라는 여성이 접골사이자 소셜리트(Socialite/사교계에 인맥이 넓은 사람)인 스티븐 와드라는 사람을 통해 프로퓨모와 동시에 소련의 해군무관 예브게니 이바노프라는 자와도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것인데, 당시가 냉전 시대였던 만큼 국가안보상 리스크가 문제 되었다. (더구나 프로퓨모는 전쟁부장관이었으니.)


워드가 킬러를 통해 부당이득을 취했다는 점에서 유죄로 결론이 나기 전에 재판 중에 약물중독으로 사망하는 등 사건의 사회적 처리 과정은 상당히 소란스러웠고, 이 사건은 영국 상류층의 문란함이라던가 위선 등을 광범위하게 비꼬고 지적하는 비난과 비판의 소재로 쓰였다.


원로법관이었던 데닝 경은 청문회와 조사를 통해 보고서를 냈고 거기에서는 이바노프와 킬러의 관계로 인한 국가안보상 문제나 위험은 없었고 정부가 부적절하게 대응한 것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맥밀런은 악화된 건강 등으로 인해 결국 사임했다.


그렇다면 제1야당이자 간만의 엄청난 ‘정치적 호재’를 맞이한 노동당은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을까?


애틀리 이후 노동당 우파로서 노동당을 이끌었던 휴 게이츠켈(Hugh Gaitskell)이 1963년에 사망하면서, 본래 당내 좌파였다가 중간파가 되어 내분을 통합할 후보를 자처한 해럴드 윌슨(Harold Wilson)이 노동당 당수로 당선되었다.


이것이 1963년의 일인데, 윌슨은 경제사와 통계학에 정통한 학자 출신으로서 31세의 나이로 애틀리 내각에서 무역위원장(각료)에 오르는 등 촉망받는 인재였다.


프로퓨모 스캔들에서 윌슨이 이끄는 노동당의 대응은 한 마디로 ‘노 코멘트’였다.

이것은 매우 성숙한 반응이었는데, 구체적으로 윌슨 당수의 당시 코멘트를 들어보면,

“제 생각에 그(맥밀런 내지 프로퓨모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의 사임의 사유가 된 이슈들은 정당정치에서 다루기엔 적절치 않습니다. 물론 (그 사건이) 안보에 관련하여 문제가 될 수 있는 한, 하원은 단순히 이를 다룰 권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관련 사실들이 알려지도록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윌슨의 대응으로부터 민주국가의 정치인이 오피니언리더로서 여러 사안과 이슈를 다룰 때 가져야 할 태도를 알 수 있다.


사실 여부가 불확실한 정보와 비난인지 비판인지 또 찬양인지 옹호인지 등을 구분하기 어려운 의견들이 난무하는 민주사회 속에서는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그런 역할을 언론이 일부 할 수 있지만, 정치가 당해 문제나 관련 문제가 되는 경우 주요 정치인들의 역할도 중요해진다.


이슈를 다루는 사회적 집중력과 감정은 한정되어 있고 소모적이기 때문에, 오피니언리더로서는 그 사안을 다룰 만한 가치가 있는지의 평가부터 해야 한다.


즉, 이 사건의 경우 만일 그것이 단지 한 각료의 불륜에서 끝날 사적 그러나 다소 사회적 차원으로 논란이 된 문제라면 그가 스스로 거취를 결정할 문제이다.


윌슨의 말대로 킬러가 이바노프와 프로퓨모 모두와 관계를 맺으면서 안보 리스크가 있었다는 상당한 근거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정치권도 그 근거의 여부와 안보 리스크의 정도와 영향 등을 구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되고 또 나아가서는 관련 정치인이나 정당을 문책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야당에서 문책하기 전에 이미 국민들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일은 그렇게 흘러갔고 국민의 신임과 성실성에 금이 간 맥밀런 내각은 붕괴되었다.


정치가 다루는 사안은 공적인 사안이다.


공적인 사안은 사회문제와 정책의제이다.

정치의 내용이 국민의 삶과 연결되지 않고 서로 간의 알력과 권력투쟁을 위한 약점과 스캔들 및 감정 싸움으로 전락하는 경우 대의민주정치의 질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민주정치 자체에 대한 국민의 신임이 하락하면서 민주주의 체제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의 정치는 서로가 조금이라도 의혹이 있을 여지라도 있을 것 같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서로 물고 뜯는다.


그것이 어디까지가 진위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공적으로 다룰 만한 사안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고민이 없다.


국민들이야 일부 호사가들처럼 정치나 사회적 스캔들 등을 ‘소비’할 수 있겠지만, 정치인들이 그것을 서로를 타격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고의로 띄우는 경우 계속해서 사정(司正)만 문제가 되는 저질의 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


진영과 정체성의 정치에 피로감을 느끼는 국민이 이미 상당하다.


윌슨은 노동당이 느끼던 집권에 대한 절박함과 만년 야당으로의 전락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지 않았고 오히려 십분 느끼고 있었다.


이에 사력을 다해 노동당이 이를 약점 삼아 보수당을 흔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때가 무르익기를 즉 민심의 동향이 보수당에게서 등을 돌리기를 기다렸다.


또한 이미지 메이킹과 정책적 프레이밍을 도모했다.


해럴드 윌슨의 트레이드마크는 가넥스 레인코트와 파이프 담배인데, 이는 ‘서민성’을 강조한다는 의미가 있었고 ‘보통 사람’임을 강조함으로써 이제까지의 보수당 중심의 귀족 출신이나 기업가 등의 상류층에 비해 비주류 노동계급임을 어필했다.


다른 한편으로 ‘기술의 백열(White heat of Technology)’이라는 말을 통해 기술을 통한 생산성 향상을 강조했고,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노동자들을 포괄해 지지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1964년 총선에서 윌슨이 이끄는 노동당은 매우 근소한 차이이지만 무려 13년여 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1966년 조기총선에서 윌슨은 보수당과의 의석 격차를 더 벌려 안정적 다수 의석을 만들었고 노동당은 1970년까지 집권했다.*


정치는 사회-경제-국가에 제도적 인프라와 법적 프레임워크를 제공하고 가계, 기업, 사회운동조직, 사회적기업 등 다양한 사회와 경제의 민간 주체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하고 더 진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능을 한다.


모든 행위가 그렇듯 정치 역시 제한된 자원이라는 조건 하에서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야 하는 효율성의 과제를 안고 있고, 또한 이를 민주적으로 최대한 잡음 없이 안정적으로 해내야 한다는 민주성의 과제도 안고 있으며, 효과성 있게 해야 한다는 과제도 있다.


세 가지의 최적 균형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진정한 삶의 문제 즉 민생은 민주주의 나아가 일국의 명운에 직결된 것이므로 국민과 정부는 성숙한 자세를 가지고 자신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이슈와 그렇지 않은 이슈를 구분하고 또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며 나아가 어떻게 해야 명철보신할 수 있는 길이 될 지를 고민해야 한다.


사회적 충격을 주는 스캔들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이러한 측면에서 국가와 국민과 정치의 성숙도를 판단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다.


*노동당 출신으로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가 된 당수는 클레멘트 애틀리, 해럴드 윌슨, 토니 블레어, 키어 스타머 넷 뿐이다. 그중에서도 윌슨은 대개 근소한 차이이긴 했으나 4번의 선거(1964년, 1966년, 1974년 2월, 1974년 10월)에서 모두 이겨 노동당의 역대 당수 중 가장 많은 선거에서 승리했다. (블레어가 3번(1997년, 2001년, 2005년), 애틀리가 2번(1945년, 1950년), 스타머가 (아직) 1번(2024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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