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이 기질과 결합하면 성향이 될 수 있는데, 정철(鄭澈, 1536~1594)의 경우가 그랬다.
문학적 감성과 강직한 기질이 결합해 정철이라는 고집이 강하면서도 문재가 남다른 인격이 만들어졌다.
그는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성산별곡, 훈민가, 장진주사 등 가사문학의 대가로 유명하며, 또한 충신연주지사 즉 충신이 군주를 그리는 노래라는 갈래에 있어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그런데 문학이 대체로 그렇지만, 역사와 함께 통합하여 보면 훨씬 더 흥미롭다.
흔히 고등학생 정도의 수준에서 정철을 비꼬아 '다시 출세해보고자 아부하려고 하던 사람' 정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작가에 대한 이해도 작품에 대한 이해만큼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런 맥락도 시험에는 나오지 않지만 알아둘 필요는 있다고 본다.
좀 더 들여다보면, 정철은 감성이 짙고 정열적이면서 흑백이 분명한 문학가이며 또한 정치인이었으며 단순히 출세 지향적인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어렸을 때 궁에 드나들며 당시 경원대군이었던 명종이 정철과 놀았는데 후에 정철이 장원급제하자 명종이 그에게 술과 음식을 내리려 하니 정철이 이미 출사했으니 공사를 구분해야 한다며 이를 사양하여 명종이 기특하게 여겼다.
또 개인적으로 <훈민가>에서 기억나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데,
[< 제16수 > 반백자불부대(斑白者不負戴)
이고 진 뎌 늘그니 짐 프로 나를 주오
나나ᆞ간 졈엇거니 돌히라 무거울가
늘거도 셜웨라커든 지믈 조차 지실가]
사림파는 향촌에서 향약을 보급하는 등 유교적 공동체 윤리를 널리 일상화하고자 했다.
노래는 좋은 수단이 되어줄 수 있었을 것인데, 이를 감안해도 제16수의 경우 정철의 노인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읽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또 임진왜란 중에 정철이 사망하고(1593), 정유재란 중(1597)에 반대 당(동인-남인)의 수장이었던 류성룡이 탄핵 당했는데 류성룡이 적어도 정철은 무고라 하더라도 뇌물을 탐했다는 말 자체도 없었는데 자신은 이런 말을 들었다는 한탄을 했다고 한다(선조수정실27권, 선조 26년 12월 1일, 전 인성부원군 정철의 졸기).
이로 미루어 보아, 정철이 세인들에게 미움을 받으면서도 개인적 비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오해조차 받은 일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되려 그는 눈치가 없는 편(내지는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보지 않는 편)이어서 오해와 미움을 받기도 했다.
이산해(동인-북인의 수장)의 술수에 속아 넘어가 광해군을 세자(저군)로 봉하자고 주청을 올렸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축출당한 일이 대표적이다(이 일을 '건저파동 建儲波動'(1591)이라 하며, 이후 정철의 처리 문제를 두고 북인(조식 등 계열-강경파)-남인(이황 등 계열-온건파)으로 동인이 분열된다. 간혹 중학교 역사나 고등학교 한국사에서 언급되는 경우가 있다.).
또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가 총애를 받을 적에 빈청에 있던 정철과 구사맹 등에게 퇴선(왕이나 왕비가 물린 음식)을 내린 것을 거부한 일이 있었다.
구사맹이 인빈의 아들인 정원군(인조의 아버지)의 부인인 연주부부인 구씨의 아버지 즉 인빈과는 사돈이 되었기 때문에 내렸다고 하는데, 정철이 어찌 대신이 이 음식을 먹겠냐며 나가버렸다고 한다.
실은 후궁이 퇴선한 음식을 재상에게 내린다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것인데 인빈이 자신의 총애를 믿고 방자한 행동을 한 것이고 정철이 이를 거부한 것이다.
즉 실세에게 대선 것이 된다.
출세 지향적인 인물이었다면 인빈에게도 아첨하고 눈치를 보았을 것이다.
또한 선조가 왜란을 당해 어려울 때 호종하지 않는 사대부들도 많았는데 왜란 당시 이미 57세였던 정철은 호종을 하였고 왜란 발발 다다음 해에 사망했다.
정철은 청년기에 고생도 했지만 중년기로 들어가면서 명종에서 선조로 왕이 교체되며 훈구의 시대가 끝나고 사림이 지배 세력이 되는 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곧 사림은 동서분당으로 분열되었고, 이이(율곡), 성혼 등과 가까우며 상대적으로 선배 사림이었던 정철은 서인에 속하게 되었다.
2008년 1월에 방영되었던 KBS 한국사전은 정철을 다루었는데. 제목이 '시인은 왜 당쟁의 투사가 되었나'였다.
특히 '투사'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보다 정철이 1589년의 정여립의 난 이후의 기축옥사에서 위관을 맡아 국문을 책임졌었기 때문이다.
이 옥사로 인해 대표적으로 동인 강경파인 이발의 어린 아들과 노모가 각각 압슬형과 장형으로 죽는 등 잔인함과 규모가 매우 큰 옥사였다.
애초에 위관은 동인 재상이었던 정언신이었으나 정여립이 정언신을 포함해 동인 인사들과 연락했다는 증거가 나오면서 선조가 정철을 우의정으로 봉하는 등 대대적으로 서인들을 기용하고 옥사를 처리토록 했다.
그러나 정철은 처음에 아예 위관을 맡지 않으려고 했고 이발을 살려 달라거나 정언신에 대해서도 노령을 이유로 고문에 반대하다 선조의 격노를 사기도 했다.
후일 이 옥사를 두고 선조는 '간악한 정철에 당했다'라는 식으로 언급하고 이발의 후손들이 제사를 모시고 고기를 다지면서 '정철 정철 정철'이라고 되뇌일 정도였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점들을 고려할 때, 옥사의 실질적 책임자는 선조였으며 왕에게 책임과 원망을 돌린다는 것은 아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므로 결국 최고위 책임자(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왕의 도구였던) 정철에게 비난의 화살이 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종조의 재상이었던 남곤과도 비슷한데, 남곤은 기묘사화를 기획하긴 했으나 조광조 사사를 말리기도 했고 또 개인적으로도 청렴한 사람이었으며 김안로처럼 권신으로 폭주하지도 않았다(오히려 남곤은 김안로를 적극 견제해 축출했다).
조광조 사사를 주도한 사람, 근본적으로 기묘사화를 의도한 사람은 중종이었고 마찬가지로 기축옥사를 통해 동인을 대거 주살한 사람은 선조였다.
정철은 과도한(?) 강직함과 강경함으로 인해 많은 적을 두긴 했지만, 또한 이산해, 류성룡 등 반대 당파 수장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실록에서 '친구'라고 관계가 언급되는 등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더하여 사관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단지 결백성이 지나쳐 의심이 많고 용서하는 마음이 적어 일을 처리해 나가는 지혜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평생 단점이었다.
만일 그를 강호 산림의 사이에 두었더라면 잘 처신했을 것인데, 지위가 삼사(三司)의 끝까지 오르고 몸이 장상(將相)을 겸하였으니, 그에 맞는 벼슬이 아니었다. 정철은 중년 이후로 주색에 병들어 자신을 충분히 단속하지 못한 데다가 탐사(貪邪)한 사람을 미워하여 술이 취하면 곧 면전에서 꾸짖으면서 권귀(權貴)를 가리지 않았다. (중략) 그의 처신은 정말 지혜롭지 못했다 하겠다.
그러나 권간(權奸)과 적신(賊臣)으로 지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철은 조정에서 앉은 자리가 미처 따스해질 겨를도 없이 정승이 된 지는 겨우 1년 남짓하였다.]
정철의 삶을 보면, 대체로 현대의 인물이 그럴진대 역사적 족적이 짙은 인물은 더욱 더 다채로운 면모들이 있으며 구체적 행보들을 종합해보면 인물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나옴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