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運)이 간 영웅(英雄)은 자유(自由)롭지 못한 것인데, 너희들이 나의 뜻을 어기고자 하느냐?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고자 하는 것이다."
_ 세조실록 47권, 세조 14년 9월 7일 계해 1번째 기사 '세자가 수강궁 중문에서 즉위하다'
조선 세조 이유는 1468년에 승하하였는데, 재위 14년 만이었다.
세조는 승하 하루 전에 세자 이황 즉 예종에게 전위했는데 신하들이 반대하자 위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죽기 직전까지도 스스로를 '영웅'으로 칭하는 것으로부터 호기와 허세를 엿볼 수 있다.
세조는 예종의 즉위 시 태상왕이 되었으나 그 다음 날 승하하였다.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는 세조의 면모를 왜곡 없이 드러낸 사극 중 대표적이라 보는데, 마지막회에 보면 세조가 너무 늙어 있다.
그러나 세조는 실제로는 향년 만 50세였으니 옛날에는 젊은 나이에도 지금보다 노안이었다지만 얼굴에 검버섯이 피고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얗게 센 모습으로 묘사한 것은 다소 과했다고 본다.
극중에서 세조는 의경세자(덕종) 이장이 요절하면서 참척을 겪고 술로 세월을 보내는 폐인이 된다.
그러나 실제 실록에서의 세조는 마지막까지 호기로운 모습을 잃지 않고 자신의 선택인 계유정난과 이후의 일들에 대해 번민하는 모습도 크게 없어보인다.
다만 극중에서 '자식들이 업보를 받는다'는 부분만큼은 역사에 부합한다.
의경세자도 그렇고(1457년 사망), 의경세자 사후 세자로 봉한 해양대군 이황은 그 부인이 한명회의 딸이었는데(장순왕후), 1462년에 인성대군 이분을 출산한 후 16세로 요절했고 다음 해에 인성대군도 2세로 죽었다.
세조가 세자빈이었던 장순왕후를 아꼈고, 후궁도 3인 밖에(그 중 하나는 폐했다) 두지 않았음을 생각할 때 장순왕후ㆍ인성대군의 죽음은 세조에게 적잖은 심리적 충격을 주었을 것 같다.
극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아버지로 돌아오기를 바랬을 뿐이라고 세령은 말하고, 세조는 "그 모습도 이 모습도, 나이니라."라고 답한다.
실로 수양대군일 때의 냉철하고 과묵한 행동파 정치인 이유와 세조일 때의 피폐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소 경망스럽고 감정적인 군주 이유는 차이가 있었다.
좀 더 어렸을 적에는 전자의 모습만을 선호했는데 당연히 문종ㆍ신료들 가운데서의 능구렁이 같은 정치적 공작이 실로 멋있었기 때문이었고 왕으로서는 품위도 없고 세령과의 관계 파탄과 승유에의 집착으로 인해 폐인이 되었으므로 싫어했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들고 힘겨운 경험들을 한 후에는, 업보를 치르며 폐인이 되어가는 세조와 의경세자의 죽음 이후 개과천선하고 업을 갚으려는 정희왕후 윤씨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정치보다 실존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조는 자신에게서 이어지는 왕통을 새로 세우는 데에 성공하긴 했지만 아들 예종(19세), 손자 성종 이혈(37세)이 모두 본인만큼 오래 살지 못했다.
게다가 증손자 연산군 이융은 폐위되고 29세로 유배지 교동에서 죽었으며, 이러한 과정은 또 다른 증손자 중종 이역이 세조보다 오래 살면서 종료되었다. (다만 그 뒤에 인종 이호ㆍ명종 이환은 오래 살지 못했고 결국 적자가 없어 중종의 서손인 선조 이연이 양자로 대통을 이었다)
세조 본인은 반드시 왕위 욕심이 아니어도 그저그런 왕족으로 눌려 사는 것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아 거사한 것이니 후회는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고한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은 사실이었고 그 업보인지 이후 왕실은 왕들의 요절, 폐비 윤씨의 사사, 무오사화, 갑자사화, 중종반정 등 편할 날이 없었다.
적어도 세조가 계속되는 반역에 지쳐 폐인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어 보인다.
오히려 세조는 자신이 보위에 오르는 과정을 보좌한 공신들을 우대하면서도 염려했다.
세자가 아직 젊은데 공신들은 노회하고 권력이 컸다.
결국 세조 말년인 1467년에 이시애의 난이 터졌을 때 이시애가 한명회ㆍ신숙주를 무고하는 글을 보내자 세조는 둘을 가두었다.
풀어주긴 했지만 세조는 이신제신의 전략을 취하여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적개공신 즉 구성군 이준ㆍ남이 등을 한명회ㆍ신숙주 등 구공신 견제에 이용하기로 한다.
그러나 예종이 그 신공신들을 남이의 옥을 통해 숙청하면서 세조의 구상은 무위로 돌아가고. 성종 초반까지 구공신들은 원상과 겸판서 제도를 통해 권력을 누린다.
세조는 의경세자를 가르치는 문제를 논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창업(創業)하기는 쉽고 수성(守成)하기는 어렵다.’ 하였는데, 수성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대저 수성하는 임금이 부귀(富貴)에서 생장(生長)하여 편안하고 게을러서, 근심하고 부지런하고 조심하고 생각할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후세(後世)의 인주(人主)가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유송 고조 무제 유유는 한미한 출신으로 남조의 첫 왕조를 개창하면서 이후의 후손들이 자신의 고생을 잊지 않고 근검하라는 취지로 자신이 고생하던 시절의 물건들을 모아 박물관 비슷한 것까지 만들었으나 유송은 오래 가지 못하였으니 세조의 말은 알 만 하다.
그러나 세조의 후계들은 실은 부귀에서 생장한 문제 때문이 아니라(예종ㆍ성종ㆍ연산군 모두 자질이 부족한 군주는 아니었다), 결국 본인의 건강과 여러 인재人災 때문에 종국적으로 보면 수성에 완벽히 성공하지 못하였다.
진정 세조의 업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네 집에 영영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며 부정한 짓을 저지른 다윗 왕 때문에 그 왕가에게 내려진 천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