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조선의 재상들 1 : 숙종조~고종조

by 남재준

1. 최석정 _ 1646-1715 / 우의정 / 좌의정 / 영의정 / 배향공신 *숙종 / 서인-소론


최명길의 손자이다. 어렸을 적부터 신동으로 불렸으며 남구만의 제자였다. 노소분당 전에는 서인으로서 남인의 영수 허적을 비판한 오도일을 변호하거나 윤휴를 비판하고 김수항을 옹호하기도 했다. 1685년에 사학 유학생들이 윤증이 자신의 아버지인 윤선거가 아비 때문에 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지 않은 것(윤선거의 강도(강화도) 사건)을 두고 이이가 불교에 귀의했다가 환속(이른바 이이의 입산(入山) 문제)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저서에 쓴 일을 두고 윤증을 비난했다. 윤선거에 대한 내적 배척은 절대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던 송시열과 노론의 입장이었는데 이이는 서인의 지주이니 이이의 입산 후 환속은 시(是)이지만 윤선거의 강도에서의 생환은 비(非)이므로 둘을 같게 본다는 윤증의 변론은 이이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취지였다. 최석정은 윤증을 변론했다. 또 나양좌가 스승 윤증을 변호하는 소를 올리고 영변으로 유배를 갔을 때에도 그를 변호했다. 갑술환국(1694년. 남인에서 서인으로 다시 정권교체)의 정국에서 장희재의 사형을 주장했다.


다른 한편 이조판서로서 서얼을 호조, 형조, 공조에 등용토록 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붕당의 폐단 극복을 논하면서 남인들의 부분 기용을 주장했는데 이것이 노론에게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1701년에 영의정이 되었는데 그해 8월에 무고의 옥이 발생하였다. 최석정은 왕세자가 있으니 그 어미인 희빈을 사사할 수 없으며 옥사가 과도하게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폈다. 노론이 명의 홍무제, 만력제, 숭정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대보단을 세우면서 의리론으로 조부인 최명길을 공격하자 이를 변호하기도 하였다.


1711년에는 이른바 ‘예기유편 사건’이 문제가 되었다. 1693년에 간행된 「예기유편禮記類篇」은 유교 오경(五經)의 하나로서 삼대(하-은-주)의 예법에 대한 주석인 「예기禮記」의 종래의 통설적 주석을 재정리하고 세밀하게 잘못된 부분들을 고친 것으로서 최석정의 저술이었다. 그런데 양주 유생 최유태가 주자와 이설(異說)을 주장한 윤휴와 박세당을 북송의 왕안석에 비견하여 비난하면서 최석정이 스스로 마음대로 주석을 만들어 낸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논지로 전국에 통문을 돌린다. 최석정은 조선의 문인 중에서도 주해하여 상소한 일이 많았으며 그 내용으로서 주자의 본의와는 다르게 되었더라도 비난을 받지 않았다고 자신을 변론했다. 밖으로 불만의 내색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성정이었으며 민생고와 당쟁의 폐단을 완화하려고 애쓴, 조부 최명길과 같은 합리적 정책가였다. 숙종은 본래 회니시비 때부터 윤증의 입장에 무게를 실었고 최석정 생전에는 그를 옹호했다. 그러나 몇 년 뒤 최석정이 사망한 다음 해에 병신처분이 내려지면서 결국 「예기유편禮記類篇」은 훼판되었다. 최석정은 수학에도 관심을 두어 「구수략九數略」을 저술하기도 했다.

Comment) 최명길의 손자답게 실용적, 합리적 성품을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개인적으로 왕안석을 호평하는 입장이어서 그에 비견하며 비난하는 것은 내게는 오히려 칭찬처럼 들린다. 왕안석, 최명길, 최석정 모두 현실주의, 실용주의, 비주류 성향을 지녔다. 모두 재상을 지내면서 보국안민(輔國安民)하는 여러 정책과 제도개혁안을 내었고 또 유학만이 아니라 (유자들이 잡학이라 여기던) 수학, 법학 등에도 관심을 두고 유학 안에서 성리학과의 이설도 탐구하였다. 그러나 조선 특히 후기는 매우 교조적인 주자학의 나라였다. 이설을 옹호하는 일부 남인은 물론이고 이설을 연구하여 배울만한 점은 참고하자고 주장한 소론조차도 배척을 받았다.

최석정의 삶은 조부와 마찬가지로 개인은 역량이 뛰어났고 나름대로 관료로서 인정도 받았으나 시대의 압력과 권력투쟁 속에 비주류로 남았다. 호란 당시 척화론, 의리론의 거두였던 김상헌의 가문이 결국 노론 명문가로서 세도정치까지 이어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최명길의 현실론은 남송의 진회와 같은 취급을 받았고 결국 버려졌으며 후손인 최석정은 계속 자신과 조부를 변론해야 했다. 솔직히 내가 느낀 건, 우리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에 거스르는 사상을 지닌 것이 아님을 끊임없이 변론해야 했던 진보-리버럴 인사들의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2. 최규서 _ 1650-1735 / 좌의정 / 영의정 / 영의정 / 배향공신 *영조 / 소론


1687년에 윤선거의 제자 나양좌가 스승을 변호하는 소를 올렸다가 영변으로 유배되었는데, 이때 나양좌를 옹호하며 소론의 입장에 섰다. 이후에도 소론 재상인 최석정의 파직을 변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소 모두 근본은 서인이었기에 1689년 남인에 맞서 희빈 장씨의 중전 책봉에 반대했다. 숙종 말년에 병신처분(1716년. 내용은 후술한다.)으로 소론이 밀려나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경종 즉위 후 재상이 되고 세제 이금 즉 영조의 대리청정을 밀어붙이려는 노론에 맞섰다. 다만 신임사화(1721년-1722년) 때 노론 인사들의 과도한 숙청에 반대하며 온건파 즉 완소(緩少)의 입장에 섰다. 그 직후 조정에서 다시 물러났다가 1728년 무신난 즉 이인좌의 난이 발생했을 때 용인에서 상경해 이를 고변하고 완소 계열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난 진압 후 영조가 그를 공신으로 봉하고자 했으나 사양하였다.


Comment) 최규서는 공신 책봉을 거절했으나 소론 대신으로서 조문명과 더불어 영조의 묘정에 배향된 인물이다. 소론의 의리를 일관되게 지키면서도 이를 과격하게 주장하거나 정적들을 가혹하게 다루자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또한 스스로 나아가고 물러갈 때를 잘 알아 처신을 잘하였고, 본인뿐만 아니라 무고한 같은 당인(黨人)들이 화를 입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제일 먼저 무신난을 고변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때 나이가 이미 80세였다.


3. 이광좌 _ 1674-1740 / 우의정 / 좌의정 / 영의정 / 소론


이항복의 현손이다. 1716년에 병신처분으로 소론 정권이 붕괴되었다. 요는 숙종이 회니시비에 대한 입장을 바꾼 것이다. 아버지 때문에 병자호란 때의 순절 약조를 지키지 않은 윤선거에 대해 송시열이 불만을 품었고 제자이자 윤선거의 아들인 윤증이 그 아비의 묘갈명을 부탁해왔는데 송시열의 묘갈명에 대해 수정을 요구하면서부터 갈등이 시작된 일(회니시비, 1681년. 노소분당의 기점이 되는 사건 중 하나.)을 그 때에 이르러 숙종이 본래 윤증의 편을 들었던 결론을 뒤집으면서 윤선거의 문집을 훼판하도록 하였다. 이에 반대하다 파직되었다. 병신처분은 연잉군에게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던 숙종이 그에게 우호적인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벌인 일로 해석되기도 한다. 소론은 무고의 옥(1701년) 즉 희빈 장씨 사사 이후 후에 경종이 되는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이광좌는 이러한 흐름에 적극 참여했다.


경종 즉위 후 김일경의 상소와 목호룡의 고변으로 노론에 대한 대대적 숙청(신임사화, 1721년~1722년.)이 인 후 소론 정권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영조 즉위 후에도 왕의 탕평 의지(정미환국, 1728년.)로 영의정에 올랐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자 수도방위계획을 수립하고 내응하기로 되어 있던 자들을 신속히 체포해 분무공신이 되었다. 이후 소론의 영수로서 노소연립정권의 한 축이었으나, 토적(討賊)을 주장하는 노론의 주요 표적이 되어 역적을 비호 했다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결국 이러한 와중에 사망했다.


Comment) 사실상 불리한 입장의 붕당이었던 소론의 영수로서 영조조까지 활동한 주요 인물이다. 특히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거나 영조의 탕평책에 협조한 점 등이 눈에 띄는 행적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소론의 의리가 옳다고 본다. 즉, 아비에 대한 효도보다 본인의 순절이 반드시 더 옳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윤선거가 잘했다고 말하기는 애매하나 잘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이설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윤휴를 배척하던 송시열이 그와 교유한다는 이유로도 윤선거를 고깝게 여겼다는데 그 역시 남의 교유 관계를 자신과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할 일은 아니었다. 경종-영조의 문제에 있어서는, 일단 한 번 세운 세자를 폐하거나 흔드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 그러니 경종을 흔드는 데 반대하는 것이 충(忠)이다. 한편, 일단 경종이 영조를 세제로 봉했고 이를 번복하지 않았으므로 처음의 원칙에 따라 역시 영조를 흔드는 데 반대하는 것도 충(忠)이다. 이렇게 본다면 소론이 경종을 지지한 맥락을 이해할 수 있고 이광좌, 오명항 등이 이인좌의 난 진압을 주도적으로 한 점 그리고 영조가 이를 믿고 맡긴 점 등을 설명할 수 있다.


다만 영조는 점점 탕평에서 자신의 신원(伸冤) 즉 경종 연간의 일들에 대해 자신이 옳다는 점을 확인받으려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에 이러한 과정에서 이광좌는 불명예를 받게 되었다. 이광좌가 호역(護逆)을 사유로 탄핵을 받던 와중에 사실상 분사(憤死)했다고 하는데, 대세의 희생양이 된 불행이었다.


4. 김조순 _ 1765-1832 / [영안부원군] / 국구 *순조/순원왕후(명경대비) / 배향공신 *정조 / 노론-시파


순원왕후(명경대비)의 아버지 즉 순조의 장인으로서 국구였다. 정조가 말년에 순원왕후를 세자빈으로 지목하며 그로 하여금 어린 순조의 후견인이 되도록 하였다. 정순왕후 수렴청정기이자 벽파 집권기였던 순조 초부터 우대받았으며, 노론 일각의 대혼(大婚)저지기도(이 건은 후일 1806년 병인갱화 때 시파가 벽파를 숙청하는 하나의 명분이 된다)에도 불구하고 순원왕후는 무사히 중전이 되었다.


시파 집권 후 당연히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 요직들이 제수되었으나 대부분 사양하고 국구로서의 당연직인 영돈녕부사 외에는 훈련대장이나 호위대장 정도만 맡아보았다(이때가 30대였다). 1827년 순조의 관서 온행을 호종하면서 지방행정의 현황과 문제들을 은밀히 조사하여 보고토록 하였다.


본인은 대부분의 요직과 고위직을 사양하였으나 정조가 지명한 순조의 후견인이라는 점 등에 힘입어 막후 실세로 여겨졌다. 세도정치를 개막할 의향이 있었던 것이 아니지만 사후 결국 안동김씨, 풍양조씨, 반남박씨 등 몇몇 유력 가문이 나라를 지배하는 정치 구도가 열렸다.


Comment) 처세술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명철보신(明哲保身)이라는 말은 이런 사람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왕의 장인이고 실세이면서도 몸을 낮추어 요직을 맡지 않았는데도 동시에 영향력을 잃지 않았고 나아가 그 권세를 자식과 손자들에게 안정적으로 넘겨주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홀로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효명세자의 처가이자 헌종의 외가인 풍양조씨, 순조의 외가인 반남박씨 등과 더불어 국정을 장악했다. 양난 이후 조선의 통치구조가 비변사 중심으로 돌아가 그 기관만 장악하면 국정을 장악하게 되는 셈이었고, 외척으로서 왕실과 가까운 세 가문을 위시로 하고 벽파가 완전히 멸당된 상황에서 누구도 김조순에게 도전하지 않게 되었다. 세도정치의 프로토(Proto) 타입 내지 원형을 수립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다른 가문들과 권력을 나누면서 국정을 장악했다는 점은 경쟁자를 없애고 권력 독점이라는 비난과 책임을 듣지 않을 수 있으니 고차원적인 정치적 구상이며 구도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막후 정치와 가족들의 영향력 확대는 결국 시스템에 의한 국정이 아니라 통치 체제가 마치 재벌 기업과 같게 되었다. 김조순의 주변 친족 중 차남 김유근이 권신으로서 뒤를 잇고 김홍근, 김흥근, 김좌근이 모두 헌종~철종 연간에 정승을 지냈으니 실로 안동김씨 천하였다. 그러나 사회문제 해결에는 신통치 못했고 결국 조선 사회의 모순은 폭발해 서북인의 불만이라는 모습으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5. 박규수 _ 1807-1877 / 우의정 / 배향공신 *고종 / 반남박씨 가문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가순궁) 박씨의 가문(즉 순조의 외가가 된다)으로서 수빈의 아버지 박준원 등이 주도자로서 활약했다. 안동김씨, 풍양조씨와 더불어 국정을 장악한 명문가였다.)


박지원의 손자로서 개화론의 선구적 역할을 한 사람 중 하나이다. 1856년 애로호 사건과 제2차 아편전쟁으로 청의 함풍제가 열하로 도피했을 때 연행사 부사로서 중국을 다녀와 견문을 넓혔다. 1862년에는 진주민란을 수습하는 안핵사를 맡아보았다. 고종 즉위 후 도승지로 임명되었는데 수렴청정을 맡은 효유대비(신정왕후)가 박규수가 부군인 효명세자와 교유가 있었음을 감안한 것이었다. 경복궁 중건에도 참여하였으며, 1866년 평안도관찰사로서 병인박해 와중에도 천주교인들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하지 않았다. 1872년에 다시 중국에 다녀오면서 양무운동을 견문하였다.


흥선대원군에게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나 수용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외래 사상이 전파되면서 청년 개화파들이 탄생했다. 일본의 서계 사건(메이지유신 후 보내 온 외교문서에 ‘천황’ 등을 그대로 사용하여 논란)에 대해 상대의 표현에 구애받을 것 없다는 입장이었고 강화도조약 체결에 찬성했다. 이미 개화 이전부터 연미국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는 국운을 보며 시름이 깊었다.


Comment) 실학에서 개화로의 본격적 전환에 있어 중요한 가교역할을 한 인물이다. 다만 외세에 대해 아예 경계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서계 사건과 강화도조약 등의 정국에서의 입장은 ‘우리 입장에서는 일본이 군대까지 대동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고 돌발상황에는 무력 사용이 불가피하겠으나, 일단은 수호(국가-국가가 사이좋게 지냄)하자고 온 자들이니 우리가 선공하면 저들이 무력을 동원할 명분을 주는 것’이었다. 즉 더는 개항과 근대 국제사회로의 진입을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선제적으로 외래문물을 수용하되 우리의 힘을 갖추고 해야 한다는 현실적, 자주적 개국론을 주장했다고 할 수 있다.


6. 김병국 _ 1825-1905 / 우의정 / 좌의정 / 영의정 / 안동김씨 가문


안동김씨 가문 소속임에도 흥선대원군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등용되어 경복궁 중건에 참여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때에는 사태를 보아 대책을 강구하자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였다. 좌의정 시절에는 황준헌의 「조선책략」에 따라 연미국론(미국과 수교)에 찬성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이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부활시킴에 따라 영삼군부사를 맡아보았다.


Comment) 개화-위정척사의 대립 속에 양 진영 모두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등용되었고, 개화에도 온건하게 동의하였다. 시세 격변의 시대여서 쉽지 않았으나 나름대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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