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드라마 <무신>의 최우와 역사상의 최우 : 들어가며
드라마 <무신> 제23회를 보면, 권신으로서의 최우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난다.
[고종 : 어쩌다가.. 어쩌다가 내가 보위에 있을 때 이런 망극한 일이 생겼단 말이오! 몽고군에게 무릎을 꿇다니! 이 나라를 창업하신 태조 성제와 열성조들께서 이 몸을 얼마나 책망하시겠소. 기왕에 이렇게 항복을 하려고 했으면 진작 했을 것을..
(그 말에 시선을 돌려 고종을 흘겨보는 최우.)
고종 : (헛기침) 아니 뭐,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일찍 해버렸으면 그 많은 군사들도 상하지 않았을 것이고 백성들도 다치지 않았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흥왕사도 타지 않았을 것이고요. 흥왕사가 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짐은 밤새 가슴을 쳤습니다.
최우 : 폐하, 비록 사안이 급박하여 화친을 청하는 문서를 작성했사옵니다만, 그렇다고 수항막을 차리고 무릎을 꿇으시는 것은 아니시옵니다.
고종 : 하지만, 항복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 않습니까.
최우 : 우리가 많은 것을 잃어 가면서 싸워왔던 것은 저들에게 결코 고려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옵니다! 처음부터 무릎을 꿇고 꼬리를 흔들었다면, 지금쯤 폐하께서 앉아계신 그 옥좌는 이미 여기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경악하는 고종과 싸한 긴장감이 흐르는 편전 안 문무백관들.)
고종 : ...알아요, 압니다. 알고 말고요..
최우 : 아직도 귀주성이 저들과 마주하고 있고, 자주성의 최춘명이가 저들의 뒤를 노리고 있사옵니다. 아마도 몽고군도 속으로는 놀라고 심히 두려워하는 바가 있을 것이옵니다. 유념해 주시오소서!]
이 장면의 맥락은 제1차 여몽전쟁을 일단락지은 1232년 고려-몽골 강화이다.
1233년 몽골이 금의 수도 개봉(카이펑)을 함락시키고 몽골과 남송이 힘을 합쳐 결국 1234년에 마지막 황제 애종이 자결하면서 금은 멸망했다.
고려는 일단 금을 섬기고 있었으므로 몽골은 금 멸망전 전에 배후의 고려를 쳐서 굴복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1231년에 사신 저고여 살인 사건(1225)에 대한 책임을 힐문하며 몽골은 고려로 침입해 들어왔고 그해에 흥왕사까지 불타기에 이르렀다.
1232년 3월에 여몽 간 강화가 이루어졌다.
다음 달인 4월에 자주성의 최춘명이 항복하지 않는 문제가 생겼다.
처음에 제시한 장면에서 최우는 ‘자주정신’에 입각해 항전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있고, 또 자주성부사 최춘명(崔椿命, ?-1250)을 옹호한다.
드라마와 정사에서 모두 대집성(大集成, ?-1236)과 회안공 왕정(王侹, ?-1234)이 최춘명에게 항복을 누차 권유하지만 최춘명은 상장군인 대집성에게 활까지 쏘도록 하면서까지 조정의 명이 공식적으로 오기 전까지는 항복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결국 항복을 하긴 하지만 항명한 최춘명은 죽을 위기에 처했고 특히 대집성이 앙심을 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드라마와 실제 역사가 매우 다르다.
우선 드라마에선 살리타이와 몽골 장수들이 고종, 최우 및 고려의 문무백관들과 잔치를 가지면서 몽골 장수가 최춘명을 죽여야 한다고 하고 고종은 난처해하는데 대집성이 그 상황을 이용해 슬쩍 몽골 장수를 거든다.
이 가관을 지켜보던 최우의 얼굴이 점점 굳더니 결국 대집성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매섭게 노려보고 대집성은 최우의 눈길을 피한다.
결국 살리타이가 최춘명을 살려주도록 하면서 상황이 종료된다.
정사를 보면, 우선 최초로 최춘명을 죽이라 한 것은 살리타이였다.
고종이 의견을 구하니 신료들은 가장 가벼운 죄로 다스리라 아뢰었다.
대집성은 최우에게 가서는 그의 단독 결정으로 최춘명을 죽이라 하였고 최우는 이를 승낙하였으며 유승단(兪升旦, 1168-1232)을 제외한 신료들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다.
서경으로 압송해 그를 처형하려 하는데 몽고 관리가 자신들에게는 항명이나 너희들에게는 충신이며 너희가 이미 우리와 화친을 맺었는데 성을 온전히 보전한 충신을 죽이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며 청하니 석방하였다고 한다.
결과는 최춘명 생존으로 같지만 상황의 전개 과정이 완전히 다르다.
최춘명을 죽이라 부추기는 사람은 대집성이고, 구체적 주체는 다르긴 하나 처음에 죽이라 했다가 결국 충신이니 살려주라 하는 것도 몽골 측이다.
신료들은 당연히 처형 반대지만 힘 있는 측의 눈치를 보는 것은 같다.
제일 큰 차이는 결국 고려의 실권자인 최우의 대응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인상으로, 드라마와 정반대로 실제 최우는 별생각 없이 최춘명을 죽이라 한 것 같다.
후술하겠지만, 정사를 보면 최우는 참소를 굉장히 쉽게 믿고 형벌을 내리거나 사람을 죽이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모르긴 해도 진정으로 판단력이 별로 없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죄가 없더라도 그냥 연계된 자들을 다 죽이면 그만이니 일부러 속아주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최춘명의 경우는 물론 자신에 대한 위협은 아니지만, 대집성이 펼쳤을 논리라고 해봐야 결국
1) 기껏 어렵고 힘들게 강화를 맺었는데 최춘명 하나 때문에 다 그르칠 뻔하였다. 몽골 원수가 그를 죽이라 하니 그들의 심기를 괜히 건드려 일을 크게 만들지 않으려면 최춘명을 참하는 것이 맞다.
2) 기본적으로 군인이 항명을 한 것도 대죄인데, 하물며 활을 쏘아 가며 위협하고 교전을 유도하는 듯한 행위를 하였으니 사전(私戰)의 죄로 보아야 한다.
3) 이렇게 나라가 결정한 일에까지 반항하는 자가 앞으로 어떤 위협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사람을 죽이는 일에 대단히 무감無感한 최우로서는 대집성의 참소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거나 ‘그냥 죽이지 뭐’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듯하다.
그러나 어떤 의도였건, 결국 허탈하게도 그토록 사력을 다해 결사항전했음에도 정작 최춘명을 살려준 건 조국이 아니라 적국이었다.
이렇듯 씁쓸한 경우들이 <고려사>, <고려사절요>에서 묘사되는 최우 집권기에는 꽤 많이 보인다.
최우는 극 중 44회에서 숨을 거둔다.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최우 : ...큰 고려를... 만들거라.. 반드시... 반드시... 저.. 몽고를.... 이겨내거라.. 그리고.. 대...제국을... 제국을... 이루....이루어라..]
이 말만 보면 최우가 어떤 민족주의적 신념과 팽창의 꿈이라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최우의 사망 당시 고려는 제국은커녕 자국의 안위조차 보전하기 힘든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김종성 성우의 내레이션으로 다음과 같은 해설이 나온다.
[최우. 최이라고도 불린다. 아비 최충헌에 이어 무신정권을 이어받았다. 학식도 깊고 글에 능해 신필이라고 불리었고 나름대로 대몽항전에도 최선을 다했다. 물론 군부독재로 인하여 훗날 사가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습적인 최씨의 정권은 최우의 죽음과 더불어 그 빛이 바래기 시작한다. 최항의 집권과 더불어 암흑기가 찾아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내레이션에서 최우가 문사(文士)의 자질이 있었다는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학문의 수준까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해서-행서-초서에 모두 능하여 서예에 뛰어난 신품사현(神品四賢) 중 하나로 불렸다고 한다.
또 대몽 항전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도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어느 정도 사실일 것 같다.
정말로 나라가 망한다면 자신의 권력은 고사하고 목숨을 걱정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고려군이 최충헌 집권기에 북변을 걱정하는 군인들을 경계하고 무신정권으로 인해 조정은 물론 군도 개인 중심으로 기형화되면서 정예병들은 공사의 애매모호한 경계에 위치하게 되었다.
군의 사정이 여유롭지 못하다면 나라의 보전을 위해서는 최고 지휘자가 더 신경을 안 쓸 수 없다.
최우를 국가와 백성이 아니라 권력만 탐했던 부정적 인물로 본다 해도 어쨌든 위정자로서 전쟁 지휘에 아예 태만했다고 추론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강화 천도로 대표되는, 그 의도가 권력 유지를 위한 노력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는 결정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해석이나 추가적 자료 분석에 따라, 설령 잘못된 결정이었다 해도 적어도 진지한 거시 전략으로서 수립한 것은 맞다고 볼 여지도 있다.
그러나 ‘사가들의 비판’ 정도로 곁다리로 언급하기에는, 최씨 정권이 국가를 기형화한 폐단은 매우 구조적이고 거대했다.
게다가 그냥 피상적으로 보더라도, 국가가 전란에 내내 휩싸인 상황이었으니 설령 최우가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최씨 정권이 최우 집권기에 ‘빛났다’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 이전의 최충헌은 수탈하거나 억울한 죽음을 만드는 등의 일들이 최우보다 정도가 더 심했으므로 최충헌 집권기를 ‘빛’이라고 볼 수도 없다.
좀 더 거시적으로 볼 때, 무신정권은 그 전체가 일단 정부와 군을 집권자 개인 중심으로 기형화하여 공사 구분이 흐려지게 하였으며 동시에 억울하고 잔혹한 숙청과 반란이 많았고 그 하이라이트는 여몽전쟁이었다.
드라마에선 최씨 정권을 ‘막부’라고도 표현하는데, 본래 막부는 일단은 아예 조정과는 독립적인 조직이고 가마쿠라 막부 시기 즉 무가 정권의 시작부터 일본의 정부 체계는 기본적으로 이원화된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무신정권 특히 최씨 정권은 기존의 2성 6부제를 뒤틀어서 교정도감이나 정방과 같은 기관들을 조정에 신설하면서 본래 국정의 중추가 되어야 할 중서성-문하성-6부는 존속하되 사실상 1인 무신 집정자가 수장인 교정도감이나 정방에 예속된 것 같은 기형적인 통치구조였다.
계속해서 다음 장에서 이제까지 비교·분석한 바와 같이 좀 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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