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 기반' 사극과 정사(正史) Ⅲ

Ⅲ. 정사(正史) 속 최우와 극 중의 최우 (1) : 전반적 정치행태

by 남재준

1. 최우의 집권 과정과 관작


최충헌은 1196년에 이의민과 그 일가를 주륙하고 집권하여 1219년에 이르기까지 약 23년간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에 이르기까지 5인의 왕이 그의 집권기를 거쳤다.


그중 명종, 희종은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었고 특히 희종은 최충헌을 죽이려다 실패하여 그렇게 된 것이었다. (희종은 후에 최우와 관련된 복잡한 모반 사건에 연관되는데 후술한다.)


임종이 가까웠던 1219년 9월에 최충헌은 앞을 미리 내다보고 형제간의 권력투쟁이 염려되니 이후로는 다시 오지 말라고 최우에게 일렀다.


이때 지윤심, 최준문, 김덕명, 유송절이 최우의 동생 최향을 권좌에 올리려고 하면서 최우에게 최충헌이 위중하니 들어오라 누차 요청했으나 최우는 의심하여 가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드라마와 다른 것은 최향이 적극적 권력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지 다소 불투명해 보인다는 것이다.


서술상으로는 최향 본인이 주도하여 최우를 최충헌의 자택으로 유인해 제거하려고 한 것이라기보다 그 측근들이 일을 주도했다고 되어 있다.


결국 불안을 이기지 못했는지 드라마에서처럼 본래 배신을 잘하는 소인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김덕명이 그들을 밀고하였고 최우는 지윤심 등을 제거하고 아우 최향을 유배한다. (최향이 진정으로 형에게 대항한 것은 유배 후이다.)


최충헌이 그달 20일에 향년 70세로 사망하였으니, 최우는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신속히 경쟁자(?)들을 제압하고 최충헌으로부터 무신정권을 이어받은 것이 된다.


최우는 우선 교정도감의 장인 교정별감을 맡아보았는데, 교정도감은 기본적으로 정치범들을 숙청하기 위하여 최충헌이 설치하면서 출발해 최씨 정권의 최고 통치 기구로 자리 잡았다.


2년 뒤인 1221년(고종 8년) 5월에 고종은 최우를 진양후로 봉하려 하였으나 그는 고사하였고 대신 12월에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가 되었다.


다시 13년 뒤인 1234년(고종 22년) 10월에 강화 천도 주도의 공으로 진양후에 봉해졌으며, 1242년(고종 30년) 10월에는 진양공으로 진봉되었다.


2. 최우의 정치 행보


최우는 아버지와는 미묘하게 다른 권신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서예에 능하였고, 또한 학문에 대한 관심과 조예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우는 1227년(고종 12년)에 무관들을 교대로 숙직하도록 하면서 사병 조직으로 기능한 도방(都房)에 대응하여 문관들을 교대로 숙직하도록 하면서 자문을 맡아보도록 한 서방(書房)을 새로 설치하였다.


이는 최우가 이전의 무신 집정자들보다 문(文)을 나름 중시했음의 방증이라고 본다.


기본적인 국정은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중심으로 처리되었고, 일찍이 최충헌이 왕명 출납을 맡아보는 승선들을 마음대로 임명하여 국정운영에 썼는데 최우도 이와 같이 하였다.


2성 6부제는 껍데기만 남고 실질적인 국정은 교정도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최우는 1225년(고종 12년)에 ‘자택에’ 정방(政房)을 설치했는데 여기에서 인사를 전결하여 종래 인사행정을 맡아보던 중서성, 문하성, 이부는 사실상 무력화되고 관료의 인사권이 사유화되었다.


같은 해에 최우는 무신정권의 군사조직도 손을 보아 우선 야별초를 설치하여 매일 밤 순찰하면서 도적을 잡도록 하고, 2년 뒤인 1227년(고종 14년)에 도방을 내도방-외도방으로 개편하였는데 전자는 최우 본인과 자택을, 외도방은 친척과 외부의 호위를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우의 행정 및 군사 조직 개편은 철저히 최우 1인에게로의 보다 체계적인 권력 집중이었다.


교정도감(행정 전반)-정방(인사)-도방(사병)을 통해 최우는 전체 정부조직을 기형화하여 기존의 조정과 군부를 무력화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최우는 아버지 최충헌이 잃은 인심을 얻는 데 신경을 썼다.


집권한 지 2개월 차였던 1219년(고종 6년) 10월에 최우는 아버지가 모아 둔 금은과 기물을 고종에게 바쳤고, 의주에서 발생했던 반란이 최충헌에게 아첨해 벼슬을 구한 안영린 등이 백성들을 수탈한 것이 원인이라 하니 최우가 그들을 여러 섬에 나누어 유배하였다.


다음 해(1220년) 1월에는 아버지가 강탈한 공사 토지를 모두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처지가 어려운 선비들을 많이 발탁했다.


1243년(고종 31년)에는 대학의 기능을 하던 국자감을 수축하고 장학기관이었던 양현고에 쌀 300곡을 바치기도 하였다.


또 같은 해에 1232년(고종 19년) 몽골의 제1차 침입 때 불타버린 초조대장경을 사재를 바쳐 재조(再造)하도록 하였다.


이 재조대장경은 최우 사후 2년 뒤인 1251년(고종 38년)에 완성되었다.


다만 국자감과 양현고 지원 및 대장경 간행을 한 시기에는 이미 강화로 천도(1232년)한 뒤였으니 민력의 상당한 동원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작가의 이전글'선공후사'의 정치가 지닌 위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