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원익 _ 1547-1634 / 우의정 / 좌의정 / 영의정 / [완평부원군] / 호성공신 *선조 호종(1592) / 익사공신 *임해 사사(1613) / 배향공신 *인조
1569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1570년에 출사하였다. 성격이 내성적인 편이라 사람들과 번잡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외출도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이, 류성룡에게 두루 인정받았다.
1587년에 안주목사로 기용되어 구휼을 행하면서 병졸들의 훈련 근무를 연 4차 입번하던 것을 6번으로 고쳐 시행하였다. 이는 군병을 넷으로 나누어 연간 3개월씩 근무하게 하던 것을 2개월로 고쳐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킨 것이었다. 이 제도는 순찰사 윤두수의 건의로 전국적 병제로 시행되었다.
왜란기에는 선조보다 먼저 평안도로 가거나 평양의 군무를 맡아보는 등 전시행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왜란 후 류성룡을 필두로 한 남인들이 북인의 공격을 받아 실각하자 이원익도 사직하였다. 곧 영의정으로 다시 복귀하면서 북인들의 공세를 당파의 폐단이라는 취지로 근절하고자 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 전후 수습책의 일환으로서 대동법을 경기도 지방에 실시해 토지 1결당 쌀 16두를 납부하도록 하였다. 임해군 처형에 반대하다 낙향하고, 폐모론에도 반대하다가 결국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후 영의정이 되었는데 폐주가 된 광해군의 처형을 막았다. 1624년 이괄의 난, 1627년 정묘호란 때 왕과 세자 등을 호종했다. 성품이 담백하고 소박하고 청렴하였다고 한다. 인조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았다.
Comment) 이원익의 고평가 이유에는 정광필과 마찬가지로 백성의 사랑을 받았고 실무 능력이 빼어났다는 점과 더불어 어려운 때 할 말을 했다는 점이 있다. 1615년(광해 7년)에 올린 차자에서는 ‘어미가 비록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폐모론에 반대하는 취지였고 이미 임해군의 죽음 때 반대하면서 낙향한 후였는데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상경해 올린 것이었다. 광해군이 노하여 ‘대비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는 말을 어디에서 들었는가. 항간에서 그렇게 말한다 하여도 과인을 믿지 못하고 과인에게 불효의 죄악의 혐의를 씌우는가.’라는 취지로 말하였고 결국 이원익은 유배되었다.
폐모론은 당시 북인 주류였던 대북 중 일부가 주도하고 이원익, 이항복 등 서인, 남인이 이에 반대하다가 모두 벌을 받았다. 폐모의 문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왜란 전후로 계속 불안한 세자 시절을 보내고 심지어는 유영경 등에 의하여 영창대군 때문에 보위를 위협받을 뻔한 일도 있었던 것이 큰 트라우마로 다가온 것이 아닌가 싶다. 또 인목왕후(소성대비)와 그 집안이 축재를 하는 등 다소간에 광해군에게 거슬릴만한 눈치 없는 일들을 한 점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유영경이 선조의 유명(遺命)까지 숨겨 가며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리려 기도했음에도 최종적으로 세자 이혼(광해)을 즉위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인목왕후였다. 자신보다 나이부터 어린 계모인 인목왕후가 곱게 보이지 않더라도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적어도 인목왕후가 광해군에게 적대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고, 또 장성해 오래 세자로 있었으며 왜란기에 활약한 광해군을 이제와 어린 영창대군이 대체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도 않았다. 그러니 부모의 자식에 대한 효를 논하지 않더라도 어쨌든 그 일만으로라도 광해군은 영창대군에 대한 전은론(全恩論)을 수용했어야 했고 폐모론도 내쳐야 했다.
이미 북인 강경파 위주로 조정이 구성되고 폐모론이 아닌 폐모를 향해 치닫는 상황 속에서 이원익은 노구로 용기 있는 소신을 내보이었다. 이는 후세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지점이다.
2. 이항복 _ 1556-1618 / 우의정 / 좌의정 / 영의정 / [오성부원군] / 평난공신 *정여립의 난(1589) / 호성공신 *선조 호종(1592) / 위성공신 *왜란기 광해 보좌(1613) / 익사공신 *임해 사사(1613) / 형난공신 *김직재의 옥(1613)
이제현의 방손이며 권율의 사위였다. 출사 후 신료들 사이에 갈등이나 분쟁이 있을 때 이를 중재하고 시비를 공평히 판단하고 무마하여 덕을 입은 사람이 많았다.
서인으로서 동인 강경파였던 이발을 비판하다 역으로 공격을 당하여 사직하려 하였으나 선조가 그를 감쌌다. 이후 정여립의 난 처리에 참여해 평난공신이 되었다. 다음 해에 거꾸로 서인의 좌장 정철의 논죄가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를 꺼려하는데 그만이 날마다 찾아가 대화를 하였다. 이에 좌승지로서 정철의 건을 태만히 처리했다는 공격을 받고 잠시 파직되었으나 곧 도승지로 복직되었다. 이때에도 대간의 공격이 많았으나 이원익이 대사헌으로서 감싸주었다.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여 호성공신이 되었다. 이덕형과 더불어 명에의 파병 요청을 건의하였다. 명 조정이 조선이 일본과 내통해 명을 치려는 속셈이 아니냐고 의심하자 일본에서 보내온 문서를 보여주어 의심을 해소하였다.
세자였던 광해군의 분조에 속해 보좌하기도 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 북인 정권 치하에서 임해군에 대한 살해 음모에 반대하자 정인홍 등 북인들이 그를 공격하였고, 계속하여 폐모살제에도 극력반대하였다. 결국 이로 인해 1618년 삭탈관직되고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관직을 지내면서 수십 년간 중립을 잘 지켰다는 평을 들었다. 익살스러운 성격이었다고 한다.
Comment) 이항복은 성격이 매우 좋으면서도 속으로는 대단히 체계적이고 합리적이며 세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동서분당, 남북분당,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으로 피로하고 살벌했던 정국을 어느 정도 푸는 데 도움이 되는 리더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고 그러한 모습들이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원익과 마찬가지로 이항복도 임해군의 살해, 폐모살제에 전은론의 취지로 극력 반대하였다. 이는 서인이 이미 선조조에 실각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정말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결국 나라의 북쪽 끝인 함경도 북청에서 죽어 그 대가를 치렀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 이덕형 _ 1561-1613 / 우의정 / 좌의정 / 영의정 / [한원부원군] / 익사공신 *임해 사사(1613) / 형난공신 *김직재의 역모(1613)
북인의 영수였던 이산해의 사위였다. 명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총명하고 인품이 뛰어난 인재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를 호종하면서 명에 파견되어 파병을 성사시켰다. 명군이 입국한 뒤에는 명장 이여송의 접빈관으로서 함께 행동하였다.
전란 후에는 민심 수습과 복구를 위해 노력하였고 1602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대간이 폐모론 즉 소성대비(인목왕후) 폐위와 영창대군 처형을 주장하였으나 이항복과 더불어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이에 대간이 이덕형에게 공세를 집중하였으나 광해군은 다만 그를 삭탈관직하였다. 본래 동인이었다가 남북분당 때 중립을 지켰었다. 종국에는 남인이 되었다.
Comment) 이원익, 이항복과 더불어 선조-광해조를 대표하는 3대 비(非)북인 중도 성향 정승이라 할 수 있다. 이덕형의 행적을 보면 외교 분야에서 상당 부분 활약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원익, 이항복과 마찬가지로 폐모살제를 극력 반대하다가 화를 입었으니 옳은 말 하는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권력의 힘 앞에서는 매우 어렵고 권력이 곧 정의의 해석을 정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서글픈 일이다.
4. 박승종 _ 1562-1623 / 우의정 / 좌의정 / 영의정 / [밀창부원군] / 익사공신 *임해 사사
손녀가 광해군의 아들인 폐세자 이지의 세자빈이었다. 명을 오가는 등 외교, 국방 분야에서 관료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1619년에 영의정에 봉해졌는데 1621년에 후금이 요동을 점령하면서 명에 대한 사대를 수정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재설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 광해군은 후금과의 직접 대화를 통해 긴밀한 유대 관계를 설정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조정의 압도적 다수는 강경한 척화론을 취하였다. 박승종은 왕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나 여론 주도자는 이이첨이었고 발언권은 크게 제약되어 있었다.
북인 온건파로서 서인들 심지어는 강경파이자 인조반정의 주도자 중 하나인 이귀와도 친하게 지냈다. 인조반정이 발생하던 날 양주로 가서 군사를 모으려 하였으나 중간에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박자흥과 더불어 음독 자살하였다.
Comment) 일정 부분 최명길의 프로토타입같은 인물이라는 인상이다. 후금이 국서를 보내왔을 때 이에 대해 답할지의 여부를 논할 때 박승종이 영의정으로서 비변사를 책임졌고 왕이 그 사안을 총괄토록 하였는데, 박승종은 답서를 보낸다고 할 때 그 뜻이 명이나 후금의 불만을 사면 결국 우리에게 화가 닥치므로 신중해야 하며 선뜻 후금과 화친하려는 뜻을 보이면 남송의 진회와 같은 간신으로 자신을 몰아붙일 것이니 곤란하다는 취지로 아뢰었다.
악비를 추앙하고 진회를 경멸하는 것은 그때가 지금보다 더 심했고, 조금이라도 화친의 기미가 보이는 주장을 하는 것은 왕에게 아부나 하고 구차한 목숨이나 연명해 보자는 처신으로 폄훼되었다. 이러한 파병 논의와 답서 논의에 있어서의 박승종 등 소수파에 대한 (서인) 사관의 평가는 가관이다. 박승종이 처음에 두 가지 선택지를 왕에게 제시해 놓고 정작 왕이 답을 헤아려 정하라는 명을 내리자 다시 그것이 어려움을 아뢰니 왕에게 허물을 미루고 자신은 욕을 들을까 발뺌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광해군과 북인 정권을 뒤엎은 서인들이 일방적으로 정권 핵심이었던 박승종의 의도를 마음대로 왜곡하는 것이라 본다.
어차피 결정권자는 왕이니 재상이라 하더라도 권신처럼 홀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고, 또 신중론의 입장을 다시 내어 좀 더 생각해 보시라는 것이 그 자체로 그렇게 타당하지 않은 의견도 아니다. 박승종은 최명길과는 달리 주화론을 본격적으로 주장하지 않았고, 진회와 비견되는 평가를 받을 것을 두려워했다.
무릇 경세가라면 명분론과 현실론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고, 박승종이나 최명길이 특별히 명분론을 부인한 것도 아니다. 최명길은 아예 전시 각료이자 전후 재상으로서 국치(國恥)를 감당하면서 수습을 해야 했으나 어쨌든 인조반정의 공신이었고 정치적으로 화를 입는 일은 없었다. 생전에 많은 공격을 받았으나 사관도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는 평을 주었다. 그러나 박승종은 급변하는 중국의 정세 속에서 현실 감각을 지녀 광해군의 신임을 받는 조정 영수임에도 발언권이 크게 제약되었던 데다 역사의 패자로 남아 묻혀 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