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정규재ㆍ조갑제 오찬이 그로테스크했던 이유

by 남재준

2025년 7월 11일, 대통령실은 '보수 성향' 원로 언론인 조갑제·정규재 두 사람을 초청해 오찬을 열었다. 용산에서 마주 앉은 세 사람은 경제·안보·외교를 두루 논했다고 한다. 언론은 이 만남을 “국민 통합”의 행보로 포장했고, 뉴스의 댓글창은 열광의 감정으로 뒤덮였다.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 감동입니다.”
“찐보수도 감동시킨 이재명님”
“이 분은 연임하셔야 합니다. 꼭이요.”

나는 그 댓글들을 읽으며 이상하리만치 깊은 이질감을 느꼈다. 왜 웃음이 났을까. 왜 이 장면 전체가 기묘하고, 기괴하고, 어딘가 서늘했을까.

그건 단순한 정치적 호불호가 아니었다.
그건 겹겹이 쌓인 정치적 그로테스크함에 대한 정서적 직감이었다.

1. 조갑제·정규재를 ‘통합’의 상징이라 부를 수 있는가

정치인이 보수 인사와 대화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누구와 대화하느냐는 전적으로 정치인의 판단이며, 정치적 상징성은 그 선택을 통해 빚어진다.

윤석열을 극우라며 극렬히 배척했으면서 정작 또 다른 부류의 극우 인사들을 통합이라는 명분으로 포용하겠단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재명을 호평했다'라는 점이 제일 중요할 것이다.

조갑제는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고, 반공 프레임을 고수해온 인물이다. 정규재는 박근혜 정권을 극구 옹호하며 사회적 약자와 진보 시민을 조롱해왔다. 이들이 민주공화국의 대통령과 공식 회동을 갖고, 그 장면이 '통합'으로 포장된다면, 우리는 정치의 윤리적 기준이 얼마나 무너졌는지를 직시해야 한다.

그들을 대통령의 식탁에 앉힌 순간,
민주주의의 가장 어두운 서사들이 공인받고 재활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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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작 내부 비판자들은 배제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당내 온건파와 반대파를 의도적으로 외면해왔다. 비명계 그리고 이견을 제기해온 수많은 인사들이 논의의 장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극우적 담론을 대표해온 외부 인사들과는 스스럼없이 마주앉는다.

이것은 ‘통합’이 아니다.
이것은 우호적인 외부만을 선별해 수용하고,
내부의 건전한 견제를 체계적으로 차단하는 정치적 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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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치가 감정의 장르극이 될 때

그보다 더 낯설었던 건 뉴스에 달린 수많은 댓글들이었다.
“보수도 감동하는 이재명 대통령”
“이 약속도 지키시네요. 역시 다르십니다”
“통합의 리더십은 이런 것”

그 댓글들 사이엔 어떤 질문도 없었다.
왜 하필 그 인물이었는가,
그들의 과거 발언과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는 어떤가,
대화는 어떤 내용을 담았는가 —
이 모든 맥락은 생략되고, 감동과 찬양만이 반복된다.

정치는 더 이상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정치는 감정의 소비재가 되었고, 대통령은 팬덤의 아이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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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언론은 들러리로 전락했다

포토라인에 앉은 언론은 질문하지 않았다.
대신 “대통령이 보수를 품었다”는 내러티브를 확산시켰다.
그들은 그 인물들이 누구였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이 과거에 어떤 상처를 남겼고, 어떤 담론을 퍼뜨려왔는지를 조명하지 않았다.

그저 “약속을 지켰다”, “감동적인 통합 행보다”라는 장면만이 반복되었다.
언론이 정치의 연출에 들러리로 서는 순간, 민주주의의 주석 기능은 실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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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통합이라는 거짓말

정치가 통합을 말할 자격은
다른 생각을 향한 존중,
기억에 대한 책임,
그리고 권력에 저항하는 언어들을 경청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지금 이 정부는
정적을 배제하고,
극우를 초대하며,
모든 것을 감정으로 포장하고 있다.

이것은 통합이 아니다.
통합이라는 말로 권력을 고립시키고, 그 고립을 이미지로 세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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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에게 남은 것은, 그로테스크한 장면 하나

조갑제·정규재와 대통령이 웃으며 대화하는 화면,
그 아래로 이어지는 연임 찬가와 맹목적 찬사들.
그 풍경은 정치를 너무 무겁게 바라보는 내게, 도리어 웃음을 터뜨리게 했다.

그 웃음은 냉소였다.
그리고 그 냉소는,
정치의 이름으로 감정과 기억, 도덕과 진실이 무너지는 순간에만 터지는,
정당한 이질감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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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정치란 책임이고,
통합이란 도전이며,
민주주의란 맥락을 기억하는 일이다.

‘통합’이라는 말이
극우의 세탁에 쓰이고,
감정의 소비재가 되며,
내부의 건전한 비판을 봉쇄하는 명분이 될 때 —
우리는 그것을 통합이라 부를 수 없다.

그건 그로테스크한 거짓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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