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과 번역의 정치

단순화된 담론을 넘어 페미니즘과 젠더를 사유한다

by 남재준

현대 사회에서 "혐오"와 "젠더"는 단순한 감정이나 표면적 차별을 넘어서, 권력과 구조의 문제를 드러내는 중요한 사회과학적 개념이다.


그러나 현실의 공론장에서는 이들 개념이 지나치게 단순화되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왜곡되어 정치적 도구로 소비되곤 한다.


이 글에서는 그 오해를 해소해 보고자 한다.


1. 혐오란 무엇인가: 감정인가, 구조인가


혐오란 단순히 누군가를 ‘싫어하는 감정’에 머물지 않는다.


즉 여성혐오는 '여성이 싫다'라는 것이 아니다.


혐오는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 대한 대상화(objectification)와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를 동반하는 구조적 현상이다.


대상화란 인간을 고정된 이미지나 역할로 환원시키는 행위이며, 배제는 그 환원을 근거로 한 참여의 박탈이다.


예컨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이 여성혐오이고, '여자처럼 운전하네' 이런 발언(실제로 내가 운전면허 교습자에게 들은 말)이 여성을 운전이라는 사회적 행위로부터 배제하는 것이다.


이 둘은 혐오의 담론에서 밀접히 얽혀 있으며, 특히 젠더와 인종, 계급, 장애 등의 맥락에서 강력하게 작동한다.

‘여성혐오(misogyny)’는 단순히 여성을 싫어하는 개인 감정이 아니라, 여성을 특정한 역할(모성, 성적 대상, 돌봄의 존재 등)로 한정짓고, 주체성을 박탈하며, 그를 정당한 시민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제도적·문화적 배제의 체계다.


이는 반복되는 언어, 미디어 재현, 법과 제도, 일상의 기대 속에서 작동하며, 그 담론에 가담한 자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조차 많다.

2. 남성혐오는 대칭적인 개념인가?

그렇다면 '남성혐오'는 '여성혐오'에 대응되는 대칭 개념일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회과학적으로는 어렵다.


여성혐오는 오랜 가부장제 구조 속에서 제도화된 권력관계를 전제로 하며, 반복적인 억압과 배제를 통해 여성의 삶을 제약해 왔다.


반면, ‘남성혐오’라고 불리는 발화들은 대부분 개인적 반감이나 방어적 저항의 언어에 불과하며, 구조적·제도적 권력을 수반하지 않는다.


또는 가부장제 그 자체의 일부이다.

예컨대 “남자는 군대 다녀와야 사람 된다”는 말은 남성에 대한 혐오라기보다는, 가부장제가 남성에게 부과한 규범의 표현이다.


또 남성에게만 신체적 행동을 부과하는 것도 가부장제에서의 남성성의 산물이다.


즉 남성혐오로 지칭되는 언행들은 되려 페미니즘으로 설명되는 것이 적절하다.


이는 여성들이 남성을 배제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남성 중심의 질서 내부에서 남성성(강인함, 통제력, 감정 억제 등)을 증명하도록 강요하는 통과의례적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성들이 이를 반복한다 해도, 그 구조의 창시자가 아니며, 단지 그것의 재현자일 뿐이다.


남성과 여성은 모두 사회화ㆍ구조화된 젠더의 피해자일 수 있다.


그리고 전통적 의미의 여성성의 해방은 결국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자신을 구속하는 남성성으로부터의 해방일 수 있다.


3. 여성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이러한 구조적 시각은, 페미니즘이 '여성이라면 무조건 옹호하는' 입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가부장제의 가치와 규범을 내면화하여 자녀에게 그대로 사회화하는 여성, 예컨대 어머니는 페미니즘의 비판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는 개인 여성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내면화된 억압(internalized patriarchy)이 가족 단위에서 재생산되는 과정을 분석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여성 역시 그 체제를 유지하는 담론과 실천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4. 담론의 단순화와 ‘번역의 정치’

문제는 이처럼 복합적이고 맥락적인 개념들이 공론장에서 지나치게 단순화된다는 데 있다.


‘페미니즘’은 종종 “여자만을 위한 주장”으로 오해되고, ‘젠더’는 “성전환자만을 위한 개념”으로 축소되며, ‘성인지 감수성’은 “과잉 정치적 올바름”으로 폄하된다.


이는 개념을 정치적 프레임이나 정서적 반감으로만 소비하는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 나아가, 이들 개념이 정책의 언어로 ‘번역’될 때에는 더욱 고도의 주의가 요구된다.


개념이 일상어 혹은 행정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그 급진성과 구조 비판성은 제거되고, 형식적이고 중립적인 언어로 ‘길들여지는’ 현상이 빈번하다.


'양성평등', '성인지 예산', '젠더 감수성'과 같은 용어가 실질적 젠더 권력의 불균형을 지우고, 제도적 안전장치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할 때, 이는 곧 개념의 탈정치화이자 정체성의 소거다.

결론: 사유의 정교함을 회복하자

페미니즘과 젠더는 ‘누구를 편들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구조를 분석하고, 어떤 권력을 해체하고, 어떤 인간 조건을 회복할 것인가의 질문이다.


우리는 그 개념들을 단순화된 감정언어가 아닌, 정교한 분석과 비판적 사유의 대상으로 다시 불러내야 한다.


사유의 깊이와 섬세함을 잃지 않는 것이, 결국 우리 모두에게 더 나은 사회를 열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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