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토피아(Utopia)와 에덴(Eden)은 구분된다고 본다.
둘의 공통점은 지상낙원이라는 점과 더는 또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ou) 곳이나 에덴은 한때 존재했던 곳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엄밀히 말해 하느님이 인간을 영원히 에덴에 들이지 않겠다고 했고 그것은 원죄로부터의 형벌이었으므로 에덴은 이제 인간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점은 고대 그리스의 목가적 낙원으로 나아가 추상적 차원에서 ‘희망’으로 생각되었던 아르카디아(Arcadia)와 관련하여 의의를 지닌다.
‘Et in Arcadia Ego.’
a. ‘나도 한때 아르카디아에 있었다.’
b.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이 말은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와 일맥상통하는 말로, 지상낙원에조차 죽음은 존재한다는 점을 나타낸 것이다.
희망도, 예술도 모두 죽음 앞에선 덧없어진다.
니콜라 푸생의 회화 속에서 목동들이 발견한 비문 속 사람 또는 죽음 그 자체가 앞서 언급한 발화를 한다.
푸생은 1627년에 한 번 그림을 그리고, 1637-1638년에 동일한 제목으로 비슷한 그림을 한 번 더 그렸다.
예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후자가 전자와 초점이 다르다고 해석했다.
화자가 죽음 그 자체(b)에서 죽은 자(a)로 옮겨 감에 따라 그 의미도 죽음의 보편성에서 과거의 희망과 추억 등에 대한 향수(Nostalgia)로 옮겨 갔다는 것이다.
이는 괴테, 쉴러 등이 ‘나 또한 아르카디아(에서 태어났노라) Auch ich war in Arkadien (geboren)’라는 해석을 내놓는 초석이 되었다.
요즘 내 심정은 이것을 뒤튼(?) ‘Numquam Arcadiae fui.’이다.
이것을 내 본의대로 해석하려면 이중삼중의 겹을 풀어헤쳐야 한다.
우선 이 말은 ‘나는 결코 아르카디아에 있던 적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b에 근거해 이를 해석하기 보다는 a에 근거해 해석하도록 만들었다.
a는 ‘나도 한때 아르카디아에 있었다.’ 즉 파노프스키의 해석에 따라 ‘나도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과거, 추억, 희망이 있었다.’라는 의미이다.
그 반대로 ‘나는 결코 아르카디아에 있던 적이 없다.’라는 말은 ‘내겐 소중한 과거, 희망은 없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실로 이제까지의 짧은 내 인생을 되돌아볼 때의 내 소회이다.
‘내겐 꿈도 희망도 없었다.’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다소 보기 싫고 독자에게 정서적 거리감을 줄 것 같았다.
은은하게 돌려 말하는 것이 이럴 때 도움이 된다.
그때 생각난 말이 어렸을 적 매우 좋아했던 이탈리아 소설 「율리시스 무어 Ulysses Moore」 시리즈에 등장한 저 말이었다.
긍정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앞으로 있을 수많은 날 중 아르카디아에 도달할 수 있는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정도일까?
생의 유한성은 필멸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진정한 문제는 필멸이 충격으로 다가올 만큼 있고 싶은 아르카디아가 누구에게나 있는 게 아니라는 데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죽는 게 어렵고 사는 게 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죽는 게 쉽고 사는 게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