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민주당, 어디로?

'더불어'의 가치를 되살리자

by 남재준

1. 서론 : 가장 강력한 리더십, 존재하지 않는 리더십

2021년 말에 대선 출마를 준비 중이던 이낙연 전 대표에게 질문할 기회가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가 종료되고, 86세대도 곧 퇴장하는데 앞으로의 민주당의 존재 가치와 비전을 어떻게 설정하느냐?'

내 질문의 요지였다.

이에 대해 이 전 대표는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대답을 남긴 것이 없었고,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달성했으므로 경제민주주의로 이를 심화해 노동권 보장 등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 정도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 전 대표는 관훈토론회에서도 비전에 대한 질문을 받았지만 또 피해 갔다.

그의 말인즉슨, 당의 뜻을 따른다는 것이 요지였는데 그 전제에는 또한 당이 계속 지향해 온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로도 들렸다.

전통은 지속되지만 조직은 그것을 계속 리뉴얼해야 하고 그 핵심적 기수는 다름 아닌 리더이다.

민주당은 보수정당의 존재와 그에 대한 반대로서의 민주화라는 역사적 정체성을 자신의 존재 의의이자 이념으로 삼아 왔다.

그러나 시대가 점점 바뀌고, 민주화가 사실상 달성된 상황에서도 민주당은 되려 보수정당에 기한 적대적 존재 의의만을 강화한다.

민주당의 독자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상당히 모호하고, 그런 점에서 이낙연 전 대표가 마치 민주당의 독자적 이념이 있다는 것처럼 주장한 것은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이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의 주역이 되면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공고화하였고,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이어 받아 제도적 민주주의를 넘어 시민 주도의 참여민주주의를 주창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를 이어 받으면서 인문주의, 복지국가 등을 제시했다.

문재인 정부는 산업화 대 민주화의 대립이 유의미했던 막차라고 할 수 있었다.

세대와 시대가 교체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화를 존재 의의로 하고 있는 민주당에게는 보수정당 타도만 있을 뿐 자기들의 주도적 철학이 없다.

예전에는 있기는 했다.

예컨대 앞서 밝힌 정치적.제도적 민주주의-참여민주주의나 개발국가 탈피와 신자유주의-제3의 길과 사회투자국가-공공과 사회 가치 중심의 복지국가 등의 노선 발전이 그러했다.

문재인 정부의 경우 윤리적 경제정책이 반시장적이라고 비판받았지만 적어도 철학과 정책은 분명한 편이었다.

당초에 이재명 대표 주도의 민주당은 이를 더욱 강화해 직접민주주의, 기본사회 등을 주장할 것으로 보였었다.

하지만 정작 이재명 정부와 현재의 친명 주도 민주당은 당원중심주의로의 퇴보나 친시장적 언명과 반시장적 정책의 혼재 등 실용이라는 간판 하에 기준과 가치가 불분명해졌다.

한때 민주당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안철수 의원이 처음 '새정치'라는 화두를 들고 정계에 입문해 민주당을 능가하는 위상을 일시적으로 지녔을 때,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진보적 자유주의'로 묘사하니 문재인, 이정우, 유시민 등이 이구동성으로 참여정부가 바로 진보적 자유주의 정부였다고 언급했다.


X세대 코드건, 리버럴이건 뭐라고 이름 붙이건 간에, 내가 생각하는 민주당의 의의는 '개성에 대한 관용'이었다.

아직 한국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참여정부의 등장이 대한민국에 의미하는 바가 '코드의 반란'이라고 했는데, 그 말은 참으로 의미가 있었다.

패거리 문화로부터의 탈출, 각자의 자유로운 개성에 대한 존중, 타인의 삶과 언행에 대한 이름 붙이기와 평가와 오지랖의 자제, 개인과 공동체의 이분법을 넘어 관계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 성과만큼 중요한 과정, 뭐 그런 것들.

부드러운 혁명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임기종료 후 20여 년, 대한민국 사회는 또 다른 코드의 반란을 요구받고 있다.

2.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넘어, 관계 중심의 배려윤리로

X세대와 참여정부를 거쳐 '권위에 대한 저항', '통제보다 차라리 갈등' 이런 것들이 부상했다.

철옹성 같은 대한민국의 연고주의, 학벌주의, 권위주의, 집단주의 이런 것들을 깨려면 그런 극약처방 같은 코드가 필요했을 수 있다.

2020년대 대한민국은 '싫으면 보지 마세요'같은 식으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필터링 없이 솔직함과 무례함의 경계가 흐려진 이기주의에 와 있다.

그러면서도 집단주의적 DNA가 사라진 것이 아니어서 집단의 분위기를 흐리는 튀는 행동에 대한 제약은 여전히 교묘하게 존재한다.

'싫으면 보지 말라'라는 말에는, 사실 정당한 비판도 딴지 걸기처럼 불편해하고 귀를 막으려는 협소한 심리가 깔려 있다.

그렇다고 이것을 집단과 공동체의 논리를 다시 호명해 가며 해소할 순 없다.

본래 처음 권위주의를 깼던 코드에는 '관계성'에 대한 중시도 있었다고 나는 본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의 개성도 소중하지만 타인에 대한 개성에 대한 존중과 배려도 있었다는 점이다.

또 가치에 대한 관점 자체를 '무엇이 옳다', 'A냐 B냐' 등의 (과격하게 말해) 남성적이고 단선적인 접근보다 '구체적인 관계와 공감'을 감안해 행동하는 여성적인 관점이 도입될 필요가 있다. (또 곡해될까봐 밝혀 두는데, 이건 흔히 옛날에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말하던 '물러빠진 무조건 공감'과는 다르다)

박완서, 은희경, 최진영 등 많은 여성 작가들을 관통하는 공통의 가치관은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구체적 관계의 맥락에서 언행을 생각하는' 태도이다.

'배려형 개인주의'라고도 할 수 있겠다.

개성과 관용의 조화와 균형이 진정한 의미의 '더불어 숲'이라고 나는 본다.

3. 운동권식 온정주의와 가부장적 위선을 넘어

예전에 인문주의라고 생각했던 민주당의 바이브를 다시 보니, 실은 (나쁜 의미의) 온정주의에 가까웠다.

시나브로 자기 편을 '선'이라 판단하고 그것을 향해 가는 동지들에 대한 온정주의 말이다.

그러다 보니 몇 년 전의 미투 사태 때나 조국 사태 때에도 일단 진영 대결의 프레임에서 '또 우리가 억울하게 코너로 몰린 거 아니야'라는 의심부터 작동했다.

과거에 노무현 대통령 수사 때나 이런 때 '오해 받더라도 참고 자기 변론을 성실히 하고 시민의 권리를 가지고 이겨내겠다'라는 태도는 이제 '그러다가 당했으니 이젠 좀 더 뻔뻔해져도 돼'로 바뀌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이 보도록 애써 돌려 놓았던 시민의 시선이 아니라, 노골적인 '자기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언행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메타인지가 매우 약화된다.

정책적으로 윤리적 가치를 강조하는 것과 개인의 도덕 문제는 별개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결격 사유란 것은 존재하고, 일단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이상 그에 대해 성실히 변론해야지 자기에 대한 프레이밍이라며 맞불 작전에 나서기부터 하는 건 부적절하다.

게다가 미투 사건 같은 건을 보면, 그 전에 민주화 운동 시절부터 이미 '대의 앞에 개인은 없다'라는 명목 하에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한 역사가 있었으며, 지금까지도 고질병이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나아진 바는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 세대의 많은 이들은 표면과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

가부장제적 사고방식을 유지하면서도 민주적 가정인 것처럼 어필한다.

운동권의 정의라는 것은 거시 세계에서만 강조되지, 생활 세계에선 그들은 매우 다르고 어떻게 보면 견고한 도덕주의가 강조되던 산업화 세대보다도 더 악질적이다. (누릴 건 누리고 싶고, 지킬 건 부정하고)

4. 이상과 현실을 혼동하다 : 이상을 현실처럼, 현실을 이상처럼

민주당은 수권정당으로서 매우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구상과 실제는 매우 다르다.

자기가 이해하는 현실이 실제와 다르면 그에 대한 진단도 왜곡되고 오류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투기와 투자를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이나 배당 위주의 주식시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나 수능과 사시 등을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이나 공공이 마중물이 되어 민간을 주도한다는 생각이나..

현실적으로 국민 개개인의 입장에선 노후보장이 어려운 위태로운 상황에서의 안전 자산 확보라던가, 고성장 투자 종목으로 빠르게 치고 빠져 시세 차익 얻기라던가, 뒤늦은 도전이나 재도전을 도모한다던가 하는 여러 인식들이 있었다.

민주당의 잘못된 시나리오와 나이브하거나 조잡한 정책설계 등이 건건이 실패를 했다.

냉철한 인식과 설계 없이 미숙한 정책 레버 다루기를 남발한 결과이다.

그래놓고도 이제는 대놓고 자신들이 '실용'이라며 정작 실용과는 거리가 먼 정무와 정책을 보인다.

이러한 인식을 좀 더 현실의 인식 하에 점진적으로 유도해 나간다는 태도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경제에서는, 시장이 우선한다는 명제는 단순한 신자유주의 이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고도로 다양하고 복잡한 산업과 기술들이 병존하는 상황 속에 공공 확대는 마중물이 아니라 구축효과만 가져올 수 있다.

뉴딜이건 국가 주도 개발이건 현재처럼 고도의 첨단산업들이 주력인 복잡한 현대 경제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얼마 전의 금융세제 문제도 그렇다.

주식시장 활황 도모까진 좋았지만 투자자의 실제 행동 경향 등의 맥락을 생각하지 않고 단순무식한 배당세 완화 & 양도세 강화가 배당 중심 장기투자를 유인할 거라는 황당한 시뮬레이션을 생각했다.

차라리 주식시장 활황을 위해선 양도세를 두고 배당세만 점진적으로 완화해 나가던가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외교에서도, 국익 외교ㆍ자주 외교라고는 했지만 그 명목으로 중국ㆍ북한 등과 밀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건 서방의 의구심을 사기에 좋았다.

규범ㆍ가치 외교는 단지 네오콘적 진영 논리가 아니다.

제레미 코빈 등 좌파 인사들도 보편적 인권의 견지에서 가자지구나 중국의 문제를 평등하게 다룬다.

하지만 고유의 내셔널리즘적 편견에 사로잡힌 민주당은 미묘하게 자기모순적 행보를 보여 왔다.

우리나라도 이제 국제사회에서 선진국으로서의 가치 언명을 요구 받고 신냉전 체제로 편입되어가는 중이라는 점을 감안한 것인지 의문이다.

5. 자유주의에 대한 협소한 이해를 넘어

얼마 전 정상호 서원대 교수의 논문을 보니, 자유주의를 신자유주의와 개인 중심 철학 정도로 인식하는 그 진영의 무지함이 보였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완벽하지 않다.

권위주의 시대긴 했지만 민주진보진영이 계속해서 코너로 몰리고 낙인을 찍혔던 시기는 국민들이 가스라이팅을 당했건 뭐건 다수의 힘이었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 민주주의는 국민 스스로가 책임 있게 주권 행사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국민의 의지는 절대 선이 아니다.

집단지성을 위한 집단학습은 오직 자극이 있고 토양이 양질일 때에만 가능하다.

그 자극과 토양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이다.

개인의 개성과 다양성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중요하다.

그것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한 인격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집단 전체를 긍정적 방향으로 학습하게 만든다.

이제는 민주주의를 넘어, 자유주의가 필요한 때이다.

그냥 자유주의 보다도 인문주의(Humanism)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포용적인 자유주의가 말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숙의(Deliberation)를 통해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며 진단하고 국민의 구체적 피드백을 들으며 나아가 국민 스스로가 책임 있게 국정에 참여하는 뉴 거버넌스로 나아가야 한다.

당원중심주의가 아니라, 국민참여경선을 재활성화하고 일반국민과 당원 등이 모두 정례화&제도화된 전당대회에서의 정책컨퍼런스에 참여토록 하여 민주정치의 책임성과 개방성을 제고함이 타당하다.

또 정책위원회의 독자적 정책 입안 기능 강화를 통해 정책 중심 정치를 보다 강하게 실현해야 한다.

지나간 윤석열이 어떻게 될 지에 집착하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의 원리를 되찾아야 비로소 민주당은 온전히 주류가 된 자기자신이 어디로 나아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고 국민에게 오피니언 리더십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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