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멸과 죽음에 대한 메모.

by 남재준

귀멸의 칼날에서 아카자가 쿄쥬로를 죽이면서 그리 강함도 찰나인데 왜 오니가 되어 영생을 누리려 하지 않느냐 어리석다 한다. 내가 생각하기엔... 네가 어리석은데. 왜 그리 아득바득 살려 하지? 그랬더니 옆에서 같이 보던 형이 살아서 누리고 싶은 것들이 있으니까 라고 했다. 어차피 죽는데 그 모든 누리던 걸 다 싸들고 가진 않을 거잖아. 지저분한 이승에 뭐 때문에 그리 오래 남으려 하지? 후궁견환전에서 견환은 '궁에선 죽음만이 해탈이다.'라고 했는데 본래 이 말은 관용을 베풀어 살려 주어도 도무지 어리석은 욕망을 멈추지 못하는 악인들을 두고 한 자비 없는 말이지만.. 모든 인간이 사실상 그렇지 않나. 해탈을 살아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차라리 죽어서 성불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내가 얘기하는 건 생물로서의 인간의 생존 본능의 차원을 말하는 게 아니야. 그 차원과 내가 말하는 차원은 다르지. 물론, 그것도 살아 있는 이유고 거기에 더해서 굳이 죽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산 목숨은 살야야 한다는 말도 틀리지는 않거든.

뭐 생각을 이렇게 끝낼 순 있겠다 생각. 삶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면 반대로 죽음에 집착할 필요도 없지. 말하자면 굳이 살 이유가 없다는 게 중요하다면 굳이 죽을 이유가 없다는 것도 중요하다는거야. 어쩼든 살 지 죽을 지의 생각을 하는 건 살아 있는 현재인데, 죽음으로 가는 건 자살 실패 가능성이 주는 고통의 리스크라던가 무엇보다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해야하는 귀찮음을 선사하지. 그리고 차원이 다르다 했지만 생물학적 생존 욕구 그 자체도 달리 생각하면 최소한 살 이유의 하나 정도는 되겠지. 물론 죽음으로 가는 비용보다 살아서 겪는 고통이 크다고 할 수도 있긴 함. 근데 이건 맨 처음에 말한 살아야 할 지 죽어야 할 지를 균형적으로 고민 즉 살 이유도 죽을 이유도 모르겠다는 전제에 어긋나는 논외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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