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자유’민주주의가 필요하다

by 남재준

1.

통상 현대 선진국의 3대 정치적·법적 기본 가치를 자유/민주/공화로 많이들 거론한다.


개중 공화주의(Republicanism)는 구체적으로 거론되는 편은 아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공화주의가 실현된 정체(政體)로서의 공화정이라는 것의 요체가 군주정이나 귀족정이 아닌, 공민(公民)의 정체로서 대개 이미 실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혹자는 그 외에 공민으로서의 참여라는 미덕을 최근 맹위를 떨치고 있는 양극화의 극단화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모양이지만, 일단 구체적으로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생활인의 감각에서 잘 와닿지 않고 자유주의의 기본권이나 민주주의의 다수결처럼 제도화되기도 쉽지 않다.


통상적으로는 아마도 공화국의 정치과정에 대한 제도적 참여 즉 투표와 같은 것이 있을 텐데, 다른 국가들이라면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투표율을 가지고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민주와 자유인데, 나는 개중 자유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요청하고 싶다.


민주주의는 체제(Regime) 또는 체계(System)이지만, 자유주의는 원리(Principle)이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보다 사회규범 중 강제성을 가지는 법으로서 어느 정도 강도로 실현될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주권에 기초한 다수결로서 그 자체로 입법과 행정을 통제하고 그 자체로 그것들을 실현하는 체제이다.


일례로 우리는 행정수반인 대통령을 선출하며 다수결로 선거와 국회 의결을 처리한다.


그것은 그냥 그렇게 운용되는, 아주 견고한(Solid) 체계이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권리라는 제도를 통해 보장하는 것인데, 이는 침해되었을 때 사법적 구제 절차 등을 통해 비로소 실현된다.


생활 속에서 자유주의는 사람들이 어떤 문화를 형성했느냐에 따라 실현 여부와 정도가 달라진다.


예컨대 중국과 같은 국가에서는 집단주의적인 문화가 매우 강하므로 개인의 영역에 대한 존중이 상대적으로 적다.


선진국이라고 해도 자유주의의 정도는 문화와 권리보장 정도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자유주의는 정치 원리로서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서는 앞서 밝혔듯 다수결의 기제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드시 소수의견에 대한 존중이나 개성에 대한 관용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에 자유=반공으로 자리 잡았고, 현재까지도 권위주의적 DNA를 유지하면서 ‘자유’대한민국을 강조하는 보수 진영의 영향 때문에 일각에서는 자유라는 용어를 부담스럽고 싫게 생각한다.


또 진보 진영은 대개 사회주의 등을 이념적 원류로 삼아서 그런지, 자유주의라 하면 종전의 보수 진영의 반공주의나 신자유주의 등을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일단 민주화가 실현된 이후에는, 소위 반권위주의라는 것은 결국 자유주의 원리에 기초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일상생활 영역에서 개인의 영역 존중, 위계질서의 완화 및 자율의 보장부터 정치 원리로서 대화와 타협을 통한 소수의견의 존중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는 모든 영역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오늘날 포퓰리즘이 전 세계적으로 범람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2020년대부터 그것이 본격적으로 정계를 지배하는 기본적인 바이브가 된 상황이다.


포퓰리즘과 양극화의 극단화, 흑백논리와 껍데기만 남은 역사적 정체성을 둘러싼 투쟁, 이에 기초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공학만 남은 정치는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가 정치체제로서의 실패할 것을 예정한다.


체제는 기계와 같은 것이지만, 원리는 인간이 반드시 실현할 수 있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쉽게 흐트러지고 사라진다.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더는 정치사회에서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저절로 자유주의적 원리를 내포하는 식으로 실현되지 않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의식적으로 자유주의를 더 강하게 요청하고 실천해야 한다.


2.

“노동시장 개혁에 관해서는, 우리(노동당)와 존 하워드(자유당)의 차이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 존 하워드는 노동을 단지 다른 경제적 상품과 같은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실로 노동이 사람으로 된 것이라고 봅니다. 이들은 내적 존엄성을 지닌 인간들입니다. 직장에 출근할 때, 그들은 단지 통나무 한 토막이나 석탄 한 조각이 아니라 인간들이고, 내재된 권리를 지닌 사람들로서 제대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_ 케빈 러드(Kevin Rudd, 1957-, 現 주미 호주 대사, 前 호주 총리 (2007-2010, 2013), 前 호주 노동당 대표), 2006년 라디오에서.


자유주의를 사회정의나 경제적 자유와 연관 짓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좀 더 1차원적이고 본질적인 차원으로 돌아가 ‘사람’의 자유라는 측면, 인문주의(Humanism)의 측면을 강조하고 싶다.


자유주의에서의 자유는 결국 ‘사람’의 자유이고, 자유주의는 그것을 본질적인 규범적 가치로 여기는 사상이다.


자유란 추상적으로 이해하면 인간존엄성을 우선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성은 생존을 위한 자연적 본성이지만, 개성에 대한 존중은 그렇지 않다.


사회를 사람이 구성한 것이지만, 사람은 그 안에서 쉽게 소외되고 도구화된다.


그런 연유로 사람에 대한 존중은 의식적으로 매우 중요한 규범적 가치가 된다.


자유를 보장하는 방법에는 말 그대로 간섭하지 않는 통상적인 자유도 있을 수 있고, 현실적으로 부자유한 인간의 환경적 조건을 감안해 그것을 가능한 한 최소한의 개입으로 보정하는 자유도 있을 수 있다. (소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라고도 부른다. 다만 내가 알기로는 이사야 벌린이 이 구분을 제시했을 때는 과잉 개입에 대한 전체주의로의 미끄러운 경사로를 염려하는 맥락이었으므로 개념 자체는 언급하지 않는다.)


복잡화되고 계층화되는 등의 특징이 강해진 현대사회에서는 단순히 간섭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


생애과정을 놓고 보면, 사람은 벌써 유치원과 초등학교 때부터 무리 짓기와 소외감을 경험한다.


인적 네트워크의 강요는 사람이 성장하면서 점점 더 강해진다.


사람은 같은 부분도 있지만, 서로 다르고 서로의 독자적 영역을 보장해 주어야 하며 그럴 때만이 개인이 자신의 실존적 문제를 직면하고 나아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사회의 압력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사회 전체 차원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할 때만이 다양한 영역에서 개성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제반 성취와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은 결코 녹록한 과제가 아니다.


사람에 대한 소외와 인격의 침해는 가정에서의 위계적 가부장적 질서, 데이트 폭력과 직장 내 괴롭힘 및 성폭력에서부터 노동에 대한 도구화와 감정노동의 강요, 시장 논리의 교육과 복지 등에의 잠식, 정치에서의 포퓰리즘과 날치기의 만성화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차원으로 나타난다.


노동권 보장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효율성의 논리를 든다.


하지만 소위 시장 논리를 존중해 수리적 청산이 이루어진 결과 질 낮은 일자리가 더 많아지게 하는 것과 그 부분을 국가가 커버하고 고용 창출을 전체적으로 늘리기 위해 애쓰는 것 중 보통은 후자가 실제적으로 더 타당하다.


노동이라는 생산요소는 인격과 불가분의 관계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으로 생계를 영위할 수밖에 없으므로, 노동에 대한 존중과 복지의 충실은 시민의 존엄성과 자유의 유지를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한국사회는 오늘날 개인에 대한 관용과 공동체의 유지가 아니라 파편화와 이기주의 그리고 포퓰리즘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그 와중에 정작 날로 하락하는 사회적 지속가능성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구조와 제도의 개혁에 대한 문제에는 정치사회적 집중력이 모이지 못한다.


자유라는 것은 결국 사람을 사람답게 대우하는 것이고, 그를 위해서는 생활의 조건이 보장되어야 한다.


최근 이것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공존에 대한 절박한 요청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근본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열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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